[삶, 오디세이] 저패니메이션에 열광하는 젊은 세대

2025년을 마무리하며 올해 최고 흥행 영화 순위를 살펴봤다.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한국 영화 ‘좀비딸’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한국 영화시장에서 일본 영화가 연간 흥행 1위를 기록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이 작품만 있는 게 아니다. ‘극장판 체인소 맨: 레제편’이 5위에 오르며 일본 애니메이션 두 편이 각각 568만, 342만 관객을 동원해 천만 관객에 육박하는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극장판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우리들의 공룡일기’까지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며 명실공히 저패니메이션 붐이 형성됐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올해에만 나타난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이 극장가를 휩쓴 2023년의 경험에서 봤듯이 현재 한국 극장가에서 가장 강력한 팬덤을 보유한 장르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한국의 젊은 관객이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성 팬이 된 현상은 시간은 비싸지고 선택은 더 예민해진 동시대의 조건과 맞닿아 있다. 이들이 극장을 떠난 이유는 영화의 완성도가 아니라 체험의 부재 때문이다. 2030세대는 메시지를 주입하는 서사보다 스스로 발견하는 감각을 선호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이 지점을 잘 파고든다. 교훈을 강요하지 않고 세계를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주인공은 목적을 잃고 윤리는 불완전하며 결말은 종종 허무하다. 그 여백을 채우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체인소 맨: 레제편’의 흥행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목표 없는 주인공, 주변 인물들의 반복되는 배신과 죽음, 더 나빠지는 삶이 영화에 그려진다. 인권과 젠더 감수성의 기준으로 보면 불편한 요소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서사는 젊은 관객에게 묘한 쾌감을 준다. 삶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노력하면 보상받고, 올바르면 구원받는다는 도식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 대신 폭력과 액션이 터뜨리는 즉각적인 감각이 전면에 놓인다. 이는 청년세대가 느끼는 동시대적 리얼리즘에 가깝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더 이상 오타쿠의 은신처가 아니다. 2030세대에게 일본은 여행과 대중문화로 이미 친숙하며 팬데믹 시기 OTT를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은 일상적 시청 경험이 됐다. 극장에서 이를 극장용 버전으로 다시 보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연속이다. 한국의 극장은 현재의 급격한 변화를 잘못 판단해 왔다. 메시지와 완성도를 강화하면 관객이 돌아올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집에서 눕고, 멈추고, 재생하는 관람 방식은 이미 뉴노멀이 됐다. 이를 밀어낼 힘은 ‘더 나은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경험’에서 나온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대형 스크린과 사운드가 만드는 감각적 밀도, 그리고 혼자서는 성립하지 않는 집단적 반응을 만족시킨다. 극장의 표값 논란은 결국 체험의 문제로 환원된다. ‘어쩔수가없다’의 골든글로브 3개 부문 후보지명만으로는 타개하기 어려운 한국영화의 어두운 터널 한가운데서 체험이 있고 발견이 있으며 참여할 여지가 있는 극장의 재설계가 절실해진 이유다.

[삶, 오디세이] 그루터기에서 시작되는 기쁨

한 해를 돌아보면 기쁨이 아닌 다른 감정들이 더 오래 마음에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 웃기보다 울 때가 더 많았고 감사보다 근심과 걱정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만남보다 이별이, 열매보다 상실이 더 가까이 있었다. 그 자리는 마치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그루터기’(이사야 11, 1)와 같다. 잎도 꽃도 열매도 사라진 자리 말이다. 한때 풍성했던 삶의 흔적만 남겨둔 채 베어진 밑동처럼 적막하게 남은 자리 말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종종 이렇게 말한다. ‘이제 끝이구나.’ 그리고 그 끝에서 고개를 숙이고 깊은 한숨과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작은, 그러나 전혀 새로운 희망을 건넨다. 그루터기에서 새싹(이사야 11, 1)이 돋아난다고 말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이는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신다. 적막한 절망이 드리워져 있던 곳에서, 끝이라 여겨졌던 곳에서 미세한 생명의 싹이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새싹이자 우리의 눈물자리와 같은 그루터기에서 움튼 햇순이다. 그분은 조용히 말씀하신다. ‘네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끝처럼 보이는 이 자리에서 나는 다시 시작한다.’ 우리는 종종 기쁨을 거창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은 새싹 한 줄기의 침묵 같은 기쁨, 아픔 속에서 잔잔히 스며드는 위로의 기쁨이다. 어느새 마음을 다시 일으키는 힘이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마태 9, 12).”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기쁨이 완벽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부족하고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찾아오는 은총, 곧 선물임을 알려준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우리의 눈물 앞에 오신 까닭은 우리의 그루터기 같은 마음을 버려두지 않기 위해서다.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다. 성탄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라고 말하는 새로운 구원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세계 곳곳에서 이 노랫말 가사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힘차게 외쳐 부른다. “기쁘다, 구세주 오셨네.” 기쁨은 멀리 있지 않다. 그루터기 같은 내 삶의 눈물자리 한가운데, 이미 와 계신 그분 안에 있다.

[삶, 오디세이] 기다림의 골든타임

‘골든타임(Golden Time)’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뜻한다. 이 시간을 놓치면 회복이 어렵거나 결과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의료 현장에서 많이 사용되는 이 말은 응급 상황에서 골든타임을 놓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얼마 전 아침, 테니스 레슨을 마친 뒤 갑작스러운 전신 무력감과 심한 가슴 압박이 찾아왔다. 9년 전 심근경색으로 스텐트 시술을 받았던 경험이 있어 증상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즉시 운동을 멈추고 가까운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다행히 골든타임 안에 도착해 긴급 시술을 받을 수 있었고 의료진의 도움으로 무사히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 지금도 회복의 골든타임을 잘 지키기 위해 의료진의 조언을 따르며 몸과 생활을 관리하고 있다. 사람들은 골든타임을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시간’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삶에는 그와 반대로 속도를 늦춰야 지켜지는 골든타임, 곧 ‘기다림의 골든타임’도 존재한다. 며칠 전 TV 프로그램에서 90년대 음악계를 풍미했던 한 가수의 일화가 소개됐다. 그의 대표곡 중 하나였던 ‘내 인생은 나의 것’은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청소년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됐지만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노래였다. 교육심리학에서는 청소년기의 정서 발달에도 골든타임이 있다고 한다. 이 시기 부모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때로는 ‘기다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말하는 청소년의 외침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자기 삶을 찾아가는 과정의 한 표현일 수 있다. 그 시간을 참지 못하고 지나치게 억압하면 자녀와의 관계가 멀어지고, 다시 회복하기까지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해진다. 성경의 역사 속에도 기다리지 못해 더 큰 것을 잃어버린 이야기들도 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불안과 압박 속에 있었다. 블레셋의 대군을 보며 병사들은 공포에 휩싸여 하나둘 흩어져 버렸고 약속한 시간이 됐는데도 제사를 집례해야 할 사무엘 선지자는 오지 않았다. 사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스스로 제사를 드렸다. 그의 결정은 당시에는 불가피한 행동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일로 사울왕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왕이 됐고 사무엘 선지자는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세웠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지킬 수 있었던 골든타임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누구보다 빠른 속도와 즉각적인 답을 요구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신속하게 돌아가다 보니 기다림을 하나의 능력으로 보는 시각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일은 서두를수록 틀어지고, 기다릴수록 더 선명해지는 법이다. 건강에서도, 관계에서도,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서도 기다림이라는 골든타임을 지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 해의 문턱에 선 12월은 우리의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이다. 너무 빠르게만 달려오느라 놓친 것이 없는지, 기다려주지 못해 잃어버린 것은 없는지 돌아볼 수 있다면 지금 우리는 골든타임을 맞고 있는 것이다. 변곡점에 선 이 시간에, 서두름을 잠시 내려놓고 새해를 준비하기 바란다. 기다림을 잘 지킨 사람에게는 더 단단한 내일이 열릴 것이다.

[삶, 오디세이] 업에서 법으로

불교에서 인간의 삶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업’이다. ‘업’의 원어인 ‘Karma’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인도에 있던 통념이다. 일반적으로 ‘행위(行爲)’라고 번역한다. 즉, 업은 우리의 행위(행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인도에서는 업이 사람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닌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한 사람이 태어나면 그의 집안, 성별, 이름 등에 의해 모든 것이 이미 결정돼 있다고 여겼다. 이렇게 업을 차별적이고 부정적으로 사용해 만든 것이 ‘카스트’라는 신분제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카스트 제도는 한 사람의 ‘태어남(출생신분)’에 의해 모든 것이 정해지고 그 태어남은 전생의 업의 결과이기에 이번 생에도 그 업대로 이어진 삶을 살아야 하고 결국 다음 생에도 이번 생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만 한다고 여긴 차별적 신분제도다. 지금 사람들이 이런 카스트에 대해 들으면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불평등한 제도라고 여길 것이다. 그럼 인도인은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우리보다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기 때문일까. 아니다. 바로 카스트의 불평등이 불평등인지 느낄 수 없고 사회 전반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가르치고 여기게 해서 잘못된 것이라고 느껴지지만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고 점차 그 불평등한 제도 속으로 자신을 서서히 밀어넣어 끝내 그 제도의 일원이 돼버린 것이다. 그러나 2천600년 전 태어난 태자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청년은 그렇게 고정돼 있고 결정된 삶과 업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출가해 수행한 끝에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된 것이다. 그리고 맨 처음 한 것이 바로 사람은 ‘태어남’에 의해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가에 의해 삶이 만들어진다고 설하였고 그 가르침이 훗날 불교라는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고정적이고 정해진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 모든 것은 변하고 노쇠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삶과 힘을 갈구하지만 그런 고민의 순간에도 결국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살아 있는 모든 시간 우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살아감이라는 것이 무엇을 하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모르고 놓치는 순간이 많다. 그리고 그 시간은 항상 우리 곁에 있지만 한순간도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야 하는 2025년과 맞이할 수밖에 없는 2026년의 사이를 살아간다. 지금 이 순간 한 찰나도 허투루 놓치는 시간 없이 모든 일상을 업에 의해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법으로 행위하며 이끌고 가는 시간으로 살아가야 한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업이라 해도 지금은 눈앞에 펼쳐진 법의 자리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내일의 삶이 나타날 것이다. 살아있기에 살아가도록 업이 아닌 법으로 지금을 행위하여 2025년 연말의 오늘을 살아가자.

[삶 오디세이] 독립영화의 조용한 반격

극장 산업의 침체는 팬데믹 이후 변화한 관객성과 밀접하다. 팬데믹 동안 OTT에서 장르성이 뚜렷한 콘텐츠를 손쉽게 접한 관객은 더 이상 극장까지 갈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돈과 시간을 들여 외출할 만큼 확신이 드는 작품이 아니라면 발걸음은 집 밖으로 향하지 않는다. 클릭 한 번으로 시청을 시작하고 재미가 없으면 바로 멈춘다. 편리하지만 공허한 풍경이다. 그래서 화제도 빠르게 불붙고 금세 꺼져 버린다. 이 환경을 위기로 보는 시각이 크지만 또 다른 변화를 품고 있다. 극장의 필연적 쇠퇴 속에서도 관객은 더 신중하게 영화를 고르고 더 깊게 작품을 만난다. 유행 따라 소비하던 방식은 힘을 잃고 영화를 하나의 세계로 대하는 시네필의 태도가 새로 부상하고 있다. 2025년은 독립예술영화가 작품성과 관객 동원에서 의미 있는 성취를 만든 해처럼 보인다. 계절마다 시대정신과 실험정신을 품은 영화들이 극장을 지켜냈다. 올해 큰 울림을 준 작품들은 ‘아침바다 갈매기는’(박이웅), ‘여름이 지나가면’(장병기), ‘3670’(박준호), ‘3학년 2학기’(이란희), ‘세계의 주인’(윤가은), ‘사람과 고기’(양종현) 등이다. 이 영화들은 사회적 소수자와 노동계급을 중심에 놓고 현실의 문제를 진지한 리얼리즘으로 응시한다.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젊은 어부를 위해 침묵을 택하는 괴팍한 노인을 따라간다. 양희경·윤주상 등 중견 배우들의 앙상블, 이주 외국인 여성과 청년 노동자의 삶이 교차하며 바닷가 마을의 비극과 이웃의 연대가 잔향을 남긴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소년들이 겪은 한여름 해프닝을 통해 ‘어른의 규칙 밖’에서 벌어지는 비정함을 보여준다. 10대 소년 배우들의 놀라운 연기는 오래 마음에 남는다. ‘3670’은 탈북한 게이 청년이 정체성을 찾아 게인 친구들과 만나다가 고립및 상처와 맞닥뜨리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는 슬픔을 강요하지 않고 어디에나 살고 있을 이웃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3학년 2학기’는 특성화고 실습생의 노동 현실을 조용히 파고든다. 대졸 중심의 고용 구조에 가려진 청소년 노동 문제를 진지하게 드러낸다. 올해의 영화로 불릴 만한 ‘세계의 주인’은 피해자다움의 허구를 정면으로 건드린다. 큰 상처를 겪은 여고생이 ‘평범하게 살아갈 권리’를 스스로 증명해 내는 기특한 영화다. ‘사람과 고기’는 박근형, 장용, 예수정 등 노년 배우들의 힘으로 빛을 발한다. 평생 열심히 살았으나 고기 한 점 맘 편히 먹지 못하는 노년이 된 이들의 치기 어린 행동은 웃음과 슬픔이 묘하게 섞인 해방감을 안긴다. 이 여섯 편의 영화는 스펙터클보다 인물의 심리와 관계를 좇으며 도파민 소비에 길든 감각을 향해 거꾸로 나아간다. 여백을 남기고 인위적 연출을 줄였으며 절제된 대사와 현장 사운드, 침묵의 리듬을 내세운다. 로컬의 감각도 핵심이다. 지역 소도시, 공장, 학교, 바다, 골목 같은 장소가 익숙하면서도 갇힌 공간처럼 그려지고 그 안에 삶의 무게가 켜켜이 자리 잡는다. 교훈보다 체험과 공감을 중시하는 내러티브다. 천만 관객 영화는 신화가 됐고 중심이 흔들리자 작은 영화들이 균열을 만들고 있다. 한국 영화는 플랫폼 시대에 더 작고, 더 느리고, 더 일상적인 감각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산업은 위축됐지만 감각은 깊어졌고 영화의 폭은 오히려 넓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쇠퇴가 아니라 조용한 반격이다.

[삶, 오디세이] 죽음을 마주하며 배우는 삶

가톨릭교회에는 ‘성월(聖月)’이라는 개념이 있다. 특정한 달에 특별한 지향을 두고 신앙 안에서 기념하는데 11월은 ‘위령성월’로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달이다. 매년 위령성월이 다가올 때마다 필자는 자연스레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을 기억하는 이달은 역설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자문하게 된다. 호주 간호사 브로니 웨어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여러 해 동안 임종을 앞둔 환자들을 돌보며 그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공통으로 하는 후회를 기록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후회들에는 ‘돈을 더 벌었어야 했는데’, ‘좋은 집에서 살고 고급 차를 탔어야 했는데’, ‘대통령이 되고 사장이 돼야 했었는데’같이 돈, 물질, 지위에 관한 말이 아니었다. 그가 정리한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한 다섯 가지 후회는 △‘나는 다른 사람들이 기대했던 삶이 아닌 진정한 나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 용기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 감정을 표현할 용기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친구들과 계속 연락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더 행복해지도록 내버려뒀더라면 좋았을 텐데’ 였다. 그는 이 후회들을 단순히 세상에 알리려고 쓰지 않았다. 그는 많은 이들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비로소 행복이 선택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 글을 썼다. 안락함을 주는 삶의 익숙한 방식과 습관에 갇혀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진정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선택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삶은 선택이며 그 선택이 우리의 삶을 이루기에 의식적으로, 현명하고 솔직하게, 진정 자신이 바라는 행복을 잘 선택하라고 힘줘 말한다. 가수 고(故) 신해철씨도 생전에 한 프로그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흔히 꿈을 이루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그 과정에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고 꿈이 곧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신은 네가 무슨 꿈을 이루는지보다 네가 행복한지 아닌지에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니 꿈을 이룬다는 성공의 결과보다는 자신의 행복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꿈과 행복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많은 이들이 꿈과 목표를 향해 달리느라 자신이 진정 바라는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일상에서 오는 소소하지만 소중한 행복마저 흘려보낸다는 것이다. 이들은 공통으로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삶의 과정이며 매일의 선택 속에 있다고 말한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위령성월, 우리 각자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기 바란다. ‘삶의 마지막 순간, 미소 지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삶, 오디세이] 감사의 계절 11월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남겨 놓기 전 아직은 여유를 부릴 수 있고 마지막 한 달을 준비하는 달이 11월이다. 유난히 길고 뜨거웠던 여름의 열기가 지나가고 비가 잦았던 가을도 어느새 끝자락에 서 있다. 집 앞의 나무는 여름의 푸른 옷을 벗고 붉은빛으로 물들었다가 이제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겨울을 재촉하는 세찬 바람에 길거리에 나뒹구는 나뭇잎이 겉으로는 쓸쓸해 보이지만 하늘을 향해 치솟았던 푸른 잎에 담았던 생명을 땅속 깊이 나무의 뿌리로 내려보내 추운 겨울에도 나무의 생명을 지키려는 고귀한 결단이 낙엽이다. 11월은 그렇게 ‘비움’ 속에서 새로운 ‘채움’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목회자인 필자에게 11월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 교회는 매년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며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로 고백한다. 농부가 땅에 씨앗을 심고 열매를 거두기까지의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을 흘리는가, 그리고 가을 추수의 마당에서 돌아보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고 고백하듯 우리의 일상과 가정, 직장 속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축복을 기억하며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날이 추수감사절이다. 1621년 미국 플리머스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간 청교도들은 낯선 땅에서 첫 수확을 한 후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신들을 도운 원주민들과 함께 축제를 열었다. 그 감사는 풍요의 열매만이 아니라 이웃의 도움과 함께 이겨낸 절망 속에서 드린 생명의 고백이었다. 그래서 감사는 형편이 좋아서 하는 감정이 아니라 삶의 선택이자 태도다. 우리의 삶이 농경사회가 아니더라도 삶에는 여전히 ‘수확’이 있다. 직장에서의 성과, 가정의 평안, 자녀의 성장, 그리고 일상의 숨결까지 모두 우리의 노력 이상으로 주어진 선물이다. 그러므로 추수감사절은 단지 한 해의 마무리가 아니라 삶의 모든 자리에서 ‘은혜’임을 고백하는 기회다. 한국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고 사람 사이의 관계는 점점 느슨해지고 있다. 그래서 11월의 감사는 더욱 소중하다. 감사는 마음의 온도를 높이고 관계의 거리를 좁힌다. 경험론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랜시스 베이컨은 말했다. “감사는 행복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이다.” 감사는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지름길이며 행복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감사할 때 불평은 사라지고 감사할 때 마음은 따뜻해진다. 11월, 감사로 살아내는 시간 단풍이 지고 나무가 겨울을 준비하듯 우리도 감사로 마음을 다잡는 11월을 살았으면 좋겠다. 감사는 잎을 버림으로 뿌리를 지키는 힘이며 잃어버린 관계를 되살리는 생명의 통로다. 11월, 우리는 무엇을 거뒀고 또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 감사의 계절에 마음을 낮추고 서로의 삶을 향해 따뜻한 감사의 인사를 나누기 바란다. 11월은 다시 감사를 시작하는 달이다.

[삶, 오디세이] 손에 손잡고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지금 천년고도인 경주에서 열리고 있다. 필자는 경주에서 강의를 하기에 이번 APEC을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부지런히 준비하고 함께했는지를 지켜볼 수 있었다. 특히 이번 APEC은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정상까지 참석하게 돼 어느 때보다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으며 한반도를 비롯해 전쟁과 긴장 상태인 국가 간의 대화가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중요한 APEC 개최를 앞두고 준비 상황이나 모습에 대해 여러 의견이 분분했다. 그럼에도 이제 APEC은 시작됐기에 더 이상 서로에 대한 책임 문제나 엇갈린 의견을 멈추고 대한민국에서 지금 APEC이 열리고 있다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대한민국 국민이기에 성공적 개최라는 희망에 앞서 원만하고 무탈하게 이번 국가적 행사가 잘 진행되도록 응원하고 화합해야 한다. 그렇기에 오늘도 많은 경주시민과 각 지역에서 모인 자원봉사자들이 바쁘고 힘든 일정에도 보람되고 뿌듯한 마음으로 APEC에 참석한 각국의 정상을 맞이하고 있다. 이번 APEC은 우리나라에서 열린 주요 국제 행사 중 하나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리게 된 첫 번째 국제 행사라면 단연 88서울올림픽을 꼽을 수 있다. 그때의 공식 주제가는 ‘손에 손잡고’였다.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아픔을 비롯해 전 세계 모든 이들이 차별을 넘어 우리나라에서 하나 되기를 염원하는 내용을 담은 주제가였고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다. 불교에서 함께한다는 의미는 ‘화합(和合)’이다. 표현 그대로 ‘화목하게 함께하는 것’이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신의 입장과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자신이 우선 이익돼야 다른 사람도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공동체를 화합승가, 화합대중이라 해서 함께 화합하며 살아가는 그 자체를 하나의 수행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화합은 적극적 동참(同參)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함께 있기 위해 타협하거나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나서서 손잡아 이끌어 줘 공동의 목표와 서원을 함께 성취하고 함께 누리는 것이다. 이는 모든 중생과 더불어 깨달음으로 나아가겠다는 대승 보살의 자리이타(自利利他),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88서울올림픽이 그랬듯 이번 APEC도 이제 시작됐다. 앞선 과정과 모습보다는 지금은 이 순간과 이 시간에 후회와 미련이 남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손에 손잡고 화합해 우리나라의 모습을, 우리나라의 친절을, 그리고 우리나라를 각국 정상들과 세계인들에게 아름답게 전해지도록 해야 한다. 각자의 생각과 이익만을 내세워 이 시기를 자칫 후회로 남긴다면 그 후회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의 후회가 될 것이다. K-문화 콘텐츠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이 시대를 선도하고 있다. 문화가 알려지면 다음은 그 나라를 찾게 된다. 어쩌면 이번 APEC은 K-문화를 넘어 우리 대한민국에 찾아오고 싶고 함께하고 싶어 하는 세계인의 기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억에도 2025 APEC을 위해 모든 국민들이 손에 손잡고 아름답게 화합했고 모두가 하나 돼 원만하게 회향할 수 있었다고 남겨졌으면 한다.

[삶, 오디세이] 이념의 종말 이후

세계가 극단의 정치로 몸살을 앓는 지금,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그 불안한 징후를 예리하게 포착한 두 편의 영화가 있다. 극장에서 상영 중인 할리우드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그리고 지난 주말 OTT로 공개돼 화제가 된 한국 영화 ‘굿뉴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언어로 좌우의 유령을 그린다. 두 영화는 다른 땅에서 만들어졌지만 같은 싸움을 기록한다. 좌파 혁명가와 우파 국가권력, 두 세력은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지만 결국 같은 본능을 드러낸다. 권력을 지키려는 욕망이다. 이들은 교훈을 설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오락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영상 문법으로 전체주의적 국가의 허위를 겨눈다. 정치나 좌우 대립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피로감을 느끼는 젊은 세대에게 두 영화는 각각 액션과 코미디의 외피로 다가와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극단의 정치 현실 속에서 이보다 더 유효한 상업 전략은 없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이민자 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첨예한 정치적 갈등과 민주주의의 위기를 정면으로 다룬다. 1960년대 흑표범당을 연상시키는 급진단체 ‘프렌치 75’는 자본과 폭력의 회로 안에서 신앙으로 변질된다. 혁명가였던 가장은 체제를 뒤집겠다는 신념 대신 삶의 방향을 잃은 채 딸을 찾아 나선다. 그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니다. 빛나던 과거를 되풀이하며 생존하는 낡은 세대의 초상이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저항이 상업적 언어로 변질된 시대에 폭력은 신념의 도구가 아니라 생존 제스처가 됨을 보여준다. 굿뉴스는 1970년대 냉전 한복판으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일본 좌익 무장단체 적군파가 민간 항공기를 납치한 ‘요도호 사건’을 영화적 은유로 차용하는 영화는 사건을 관리하고 조작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를 풍자한다. 정부는 김포를 평양으로 꾸며 가짜 납치극을 벌인다. 작전은 성공하지만 이를 수행한 개인은 지워진다. 변성현 감독은 국가권력을 거대한 무대로, 정보기관과 군인을 그 무대의 배우로 그린다. 이 블랙코미디는 냉전의 미디어적 본질을 폭로한다. 두 영화 속 좌파 청년들은 여전히 이상을 말하지만 그 언어는 낡았고 그들의 혁명은 또 다른 권위로 변질된다. 반면 우파 중년들은 애국을 외치며 공작을 꾸민다. 두 진영 모두 자신이 진실의 편이라 믿지만 결국 서로 닮아 간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극좌 혁명가는 권력의 언어를 배우고 굿뉴스의 우파 정권은 혁명의 연출을 모방한다. 좌와 우는 거울처럼 서로를 반사하며 생존한다. 폭력 기호, 선전 기술, 희생 미학이 거대하고 매혹적인 스펙터클로 전시된다. 두 영화는 현실의 극단 정치를 장르 유니버스 안으로 끌어와 오락적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전략은 놀랍도록 효과적이다. 관객은 웃고, 긴장하고, 그 속에서 좌우 대립이 결국 같은 회로에서 작동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앤더슨은 비극의 언어로, 변성현은 희극의 언어로 권력의 스펙터클을 해부한다. 서로 다른 결의 영화지만 둘 다 ‘이념의 종말 이후’를 냉정하게 기록한다. 영화가 다시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됐음을 확인하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영화는 아직 살아 있구나.

[삶, 오디세이] 상대를 위한 선택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의 인기가 연일 뜨겁다. 애니메이션 뮤지컬이자 판타지 액션인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오래전부터 악마들이 세상에서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으며 세력을 넓히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귀마’가 있었다. 이를 막고자 노래의 힘을 이용하는 ‘여성 그룹(헌트릭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노래를 통해 ‘혼문’이라는 마법의 장벽을 세워 인간 세계를 보호하고자 한다. 한편 귀마는 과거 인간이었던 ‘지누’를 중심으로 ‘남성 그룹(사자 보이즈)’을 조직해 헌트릭스의 팬들을 빼앗고 혼문의 힘을 약화시켜 자신이 더 강해지려 한다. 귀마의 계획대로 모든 것이 진행될 무렵 지누의 행동이 영화의 반전을 일으킨다. 귀마와 루미가 대치하는 장면에서 귀마의 공격에 루미가 점점 밀리고 있는 상황, 지누가 루미를 구하기 위해 귀마의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낸다. 지누는 루미 덕분에 비로소 자신이 양심을 따를 수 있게 됐고 그 결과 자신이 진정 자유로워졌음에 감사한다. 그 순간 지누의 영혼은 루미의 칼 속으로 옮겨지고 루미는 그 칼로 귀마와 사자 보이즈를 무찌르며 새로운 혼문이 세워진다. 많은 관객이 이 장면에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누의 선택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과거와 달리 결정적 순간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다. 세상이 ‘나를 위한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지금 케데헌은 ‘너를 위한 방식’이라는 역설적 선택을 보여준다. 바로 ‘너를 위해 나의 목숨까지 내어 주는 선택’이다. 그렇다면 지누의 이러한 선택은 영화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천주교에서는 지누와 같은 선택을 가리켜 ‘대속·속량’이라 칭한다. 그리고 이미 2천년 전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대속·속량의 삶을 선택한 이가 있다. 그는 온 인류가 자신들이 지은 죄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는 생전에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말했는데 실제로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완성했다. 이 사랑이야말로 천주교 신앙의 본질을 이루며 교회를 움직이는 힘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필자의 두 눈에 들어오는 이 세상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을 중심으로 가난보다는 풍요를, 비판보다는 안정을, 사람보다는 규범을, 관계보다는 제도를, 수용보다는 폐쇄를, 자비보다는 단죄를 더 선호하고 선택한다. 이는 ‘너를 위한 방식’이 아닌, 철저히 ‘나를 위한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세계 곳곳을 불안하게 만드는 지정학적 갈등과 전쟁으로, 세계 무역질서를 뒤흔드는 특정 국가의 과도한 관세 정책으로, 비국가 세력의 잇따른 공격으로 인한 테러와 안보 불안으로, 그리고 사회·정치적 양극화의 심화로 이어지며 결국 우리의 정치·경제·문화 전반에서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을 위협하고 있다. 영화 속 루미와 지누의 장면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군가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가.’ 이 시대야말로 우리의 대속·속량의 선택들이 모여 ‘사랑의 새로운 혼문’이 세워져야 할 때다.

[삶, 오디세이] ‘카이로스’의 시간

자연에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다. 나무는 계절에 따라 열매를 맺는다. 사람도 계절에 따라 맺는 열매가 다르다. 그래서 제철에 맺는 열매가 가장 맛있다. 봄에는 딸기가 맛있고 요즘은 문경 사과와 제부도 포도가 제맛이다. 시간을 계절로 나누기도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하던 언어인 헬라어는 시간을 ‘크로노스’ 와 ‘카이로스’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시간으로 순차적, 연속적인 의미로 시계나 달력으로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쉽게 우리의 일상과 관계된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 혹은 기회의 시간을 의미한다. 크로노스가 양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질적인 시간이다. 며칠 전 4년 전에 결혼한 둘째 아들이 첫딸을 얻었다. 아침에 회사에 출근한 아들에게 병원에서 전화가 와 조퇴하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간다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빠, 엄마를 반씩 빼닮은 아기 사진을 보내왔다. 며느리는 지난 열 달 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심한 입덧과 잠을 설치고 손발이 붓는 고통스럽게 보낸 열 달이 크로노스의 시간이다. 열 달 동안 음식을 가려먹고, 건강하고 지혜로운 아이의 출산을 위해 기도하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태교하고 무거워지는 몸을 버티며 보낸 결과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수 있었다. 우리 때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요즘은 아기의 아빠를 분만실에 들어오라고 해 탯줄을 끊게 한다고 한다. 아들에게 아기의 탯줄을 끊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느냐고 물었더니 특별한 생각이 없었단다. 갑자기 물어 서둘러 대답하느라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첫아이의 탯줄을 자르면서 왜 특별하지 않았겠는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 줬다. “열 달 동안 엄마와 연결된 탯줄을 통해 생명을 공급받다가 이제부턴 아빠가 너의 생명의 보호자가 돼 네가 살아갈 이 세상의 필요를 책임져 줄게. 내가 아빠야.” 그 의미가 아니었을까 했더니 아들이 ‘맞다’고 했다. 이 순간이 바로 카이로스의 시간이다. 한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나는 과정은 열 달의 크로노스의 시간을 거쳐 카이로스의 시간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 카이로스의 시간은 매우 중요하고 위험하다. 생명이 엄마의 몸에서 분리돼 이 땅에 한 명의 독립된 인격체로 완성되는 이 결정적인 카이로스의 순간은 너무나 중요한 시간이다. 그래서 그 순간을 잊지 않고 삶의 자리가 흔들릴 때도 그 순간을 기억하며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을 수 있다. 기회는 당연한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 고통과 수고가 수반된다. 그 과정을 통해 생명이 탄생하고 인류가 보전된다. 근래 우리나라 젊은이의 사망 원인 최고가 자살이라는 통계가 발표됐다. 힘들지 않았던 시대가 어디 있었겠는가.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또 있겠는가. 다만 그 힘든 삶의 무게를 받아 주고 보듬어 줄 사람이 없으면 크로노스에 혼자 머물다 카이로스에 이르지 못해 포기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음을 명심하라. 성경의 인물 다윗은 아버지가 맡겨준 양치기에 최선을 다했다. 아버지의 양을 지키기 위해 물맷돌을 던져 사자와 곰을 물리쳤다. 또 한가로운 시간에는 수금을 연주하며 음악적 재능을 배양했다. 한 마리의 양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는 훗날 왕이 돼 어린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물맷돌을 던지던 그 실력은 나중에 적군 골리앗의 이마를 명중시키는 능력자가 됐고 그의 음악 실력은 사울왕이 악령에 시달릴 때 찬양을 통해 악령을 물리쳐 줬다. 다윗이 크로노스의 시간을 게으름과 원망으로 보냈다면 그는 결코 골리앗을 쓰러뜨리지 못했고 유대의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시간을 성실과 인내로 미래를 준비했다가 결정적인 카이로스의 시간을 맞이해야 한다.

[삶, 오디세이] 달 밝은 가을 저녁, 추석

식을 줄 모르던 한여름의 무더위도 시간 앞에 덧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가을이 다가왔다. 가을은 그 이름에서부터 아름다움과 쓸쓸함을 전해주는 계절이다. 높디높은 하늘과 청아한 날씨는 어디로든 떠나고 싶게 만들고 무엇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그저 반갑고 즐겁게 만드는 시기다. 가을의 이러한 매력은 아무래도 1년의 후반부에 접어드는 시기이기에 다소 불안해지고 걱정도 있지만 그것들을 아름다운 날씨에서 좋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며 해소할 수 있게 하기에 우리는 가을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을 대변이라도 하듯 가을에 접어들어 맨 처음 맞이하는 명절이 바로 ‘추석’이다. 민족의 대명절이라 불리며 고향에 내려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추석 차례상을 준비하는 모습만으로도 어느덧 가을이 왔고 우리도 추석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요즘 추석이 갖는 ‘가족’의 울림이 다소 약해지는 듯해 안타깝다. 모두들 바쁜 일상을 살고 명절에도 일할 수밖에 없는 시기를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명절에 고향을 찾아가거나 가족들과 모여 식사 한 끼 하는 것조차 어려운 모습이다. 반면 추석 연휴를 이용해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준비하며 추석 차례상은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에 부탁하거나 생략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떨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이때만이라도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간 별일은 없었는지 혹은 가족들이 도와줄 일은 없는지 등을 물으며 결코 이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가족들이 있고 그들이 나를 믿고 지탱해 주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는 시기가 추석이다. 여러 뉴스와 미디어에서도 홀로 사는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사회에서는 인간성이 상실된 황당한 사건 사고가 늘어나고 있다. 어쩌면 이 둘 사이에 중요한 관계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사람다운 삶’이다. 홀로 태어나 홀로 살다 홀로 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철학적 사상이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무수한 인연들과 함께하고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가고 더불어 살다 그들의 곁에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밖에 없다는 식의 삶을 살아가려 하기에 점차 피폐해지고 인간성을 상실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秋夕’은 가을 저녁을 의미한다. 달 밝은 가을 저녁에 가족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한 저녁 식사 한 끼를 하는 그런 일상적 삶. 그런 일상을 보내본 게 언제였는지 떠올려 보자. 다시금 찾아온 추석에 가장 소중한 인연인 가족과 함께 내가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고 행복한 존재인지를 느끼는 가을 저녁을 맞이해 보자.

[삶, 오디세이] 기억의 파편 모아내는 대중문화의 힘

1970년대 할리우드를 빛낸 황금 아이콘, 로버트 레드퍼드가 17일 눈을 감았다. 1936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치면 90세 노인이건만 필자는 그의 주름진 얼굴을 모른다. 그저 ‘추억’의 번듯한 순정남, ‘스팅’의 능청스러운 사기꾼으로 그를 기억한다. 올해부터 동네 책방에서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독서모임에 들어가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유지되고 있는 이 독서모임에서는 서로 이름도, 성도, 직업도, 고향도, 출신 학교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책으로만 만나 깔끔하게 토론하고 헤어진다. 쿨한 이웃들과 함께하는 느슨한 모임이 바쁜 현실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적절한 긴장감을 주고 있었다. 아침에 부고를 접하고 독서모임 단톡방에 영화 ‘추억’의 한 장면을 올리자 댓글이 쏟아졌다. 레드퍼드 영화 리스트, 미남 스타 사진, 스트라이샌드의 노래 영상 등이 줄줄이 올라왔다. 누군가는 마이클 잭슨을 추억하고 또 누군가는 잭 니컬슨의 근황을 떠올렸다. 우리는 이름도, 고향도 모른 채 책으로만 만나는 사이지만 대중문화의 기억을 나누는 순간 성큼 가까워졌다. 어느새 독서모임 이웃들이 친근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고향, 직업, 사는 곳, 출신 학교, 결혼 여부를 물어보는 건 실례지만 각자 좋아하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펼쳐보이는 건 서로를 묶는 단단한 끈이 된다. 같은 노래, 같은 영화, 같은 스타를 나눈다는 건 이데올로기, 지역, 배움의 정도와 관계 없이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그 시절 추억을 털어놓는 일이다. 이런 점 때문에 대중문화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잇는 타임머신이며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한데 묶는 언어다. 정치의 협소한 편가르기를 넘어 같은 노래와 같은 스타를 기억하는 경험이야말로 연대의 시작이다. 최근 영화 ‘얼굴’(연상호)과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도 그 힘을 보여준다. ‘얼굴’은 1970년대 동대문 피복공장의 현실을 소환하고 ‘은중과 상연’은 IMF 외환위기 직후의 불안한 사회상을 서사로 엮는다. 통계나 분석보다 영화와 드라마가 불러내는 기억의 힘이 크다. 극단의 정치 진영과 유튜브 알고리즘 현상으로 우리 편과 남의 편을 나눠 사고하는 현실은 부박하다. 대중문화는 이 같은 현실을 순화시키며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나아가 연민해 연대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얄팍한 정치물로 같은 편끼리 위안하는 건 사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빛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이젠 숨지 않아”라는 가사를 품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 세대를 넘어선 희생으로 마무리된 ‘오징어게임’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대중문화는 시대를 증언하고, 낯선 이들을 친구로 만들며,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다. 레드퍼드의 퇴장은 끝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한 추억의 시작을 다시 확인시키는 사건이다. 한 시대의 종말이 아니라 그의 영화와 그에 대한 추억 속에서 한 시대가 여전히 빛나고 있음을 확인하고서 가슴이 뭉클했다.

[삶, 오디세이] 유능한 사람과 위대한 사람

유능한 사람과 위대한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필자는 유능한 사람을 ‘맡은 일을 잘해내는 똑똑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반면 위대한 사람은 능력은 다소 부족할지라도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가톨릭 교회의 사제는 어떠해야 할까. 두말할 것 없이 위대한 사람이 돼야 한다. 이 엄중한 부름 앞에 서 계신 분이 바로 김대건 신부다. 그는 한국 최초의 방인(邦人) 사제로 신자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던 사람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사제의 권위를 내세워 신자들 위에 군림하지 않았다. 오히려 짧은 6개월의 사목활동 동안 안타깝게 체포돼 옥중에 있으면서도 신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 격려했다. 또 혹독한 문초 가운데서도 신자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질문에는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25년이라는 짧은 생애였지만 그는 희생과 헌신으로 한국 교회의 주춧돌이자 사제들의 수호자가 됐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 이후 2025년 현재, 한국 교회에는 7천명이 넘는 사제가 탄생했다. 필자 역시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많은 사제 중 과연 몇이나 ‘위대한 사제’일까. 다른 이들에게 묻기 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유능한 사제가 되고 싶은가, 위대한 사제가 되고 싶은가.’ 사제로서 15년 남짓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남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순간이 더 많이 떠오른다. 입술로는 사랑과 희생을 말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주님의 시선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했다. 칭찬과 인정이 사제로서 잘 살고 있다는 증거라 착각하며 살아왔던 지난날을 마주한다. 유능함이 존재 자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능력이라는 조건으로 공허한 자존감을 채우려 했음을 고백한다. 초라하고 가난한 필자의 빈 마음 속에 김대건 신부의 옥중 서한이 나지막하게 울려 퍼진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마음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희 이런 난시(難時)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우(主祐)를 빌어, 삼구(三仇)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 광영하고 여등(汝等)의 영혼 대사(大事)를 경영하라. ...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矜憐)하실 때를 기다리라. 할 말이 무수하되 거처가 타당치 못하여 못한다. 모든 신자들은 천국에 만나 영원히 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 입으로 너희 입에 대어 사랑을 친구(親口) 하노라.”(‘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한국교회사연구소·1996·384-386) 필자를 포함한 이 시대의 사제들은 유능함이 아니라 위대함,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신자들을 위해 바쳐지는 희생과 헌신의 삶임을 위대한 목자의 진심 앞에서 결심해야 할 것이다.

[삶, 오디세이] ‘칭찬’이 사라지는 시대

칭찬은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 성품, 성과 등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격려하는 것을 말한다. 상대방의 수고와 노력과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힘을 주는 것이다. 성경의 잠언 말씀에도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 하지 말며…”(잠 27:2)라고 했다. 칭찬은 자기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상대방을 칭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칭찬을 받으면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돼 기쁨과 자신감을 얻게 된다고 한다. 아이들은 칭찬을 받으면 칭찬받는 행동을 반복하게 되고 칭찬을 통해 유대 관계가 깊어지고 긍정적인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은 칭찬이 사라지는 시대다. 좀처럼 남을 인정하고 칭찬하지 않는다. 또 남들로부터 칭찬받는 일도 별로 없다. 스위스 출신의 사회학자인 장 지글러 박사는 이런 말을 했다. “세계 인구의 30억명이 굶주린 채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든다. 그러나 그보다 많은 40억명의 인구가 매일 밤 누군가로부터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그리워하며 잠자리에 든다.”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칭찬의 관계가 돼야 한다. 칭찬이 있는 곳에는 좌절도 낙심도 포기도 절망도 발붙일 곳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읽었던 연필과 볼펜의 칭찬 이야기를 소개한다. 연필이 볼펜에게 “너는 한평생 칼질당할 일이 없으니 마음 하나는 편하겠다. 죽을 때까지 같은 굵기로 발자국을 남길 수 있다니 대단해. 땅바닥에 아무리 세차게 내동댕이쳐도 심이 부러지지 않는 내공을 가졌구나”라고 칭찬하자 볼펜은 연필에게 “너는 깎을 때마다 향기가 나서 사람을 기쁘게 해. 또 실수했더라도 지울 수 있으니 무슨 걱정이야.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침을 흘리지 않는 비결은 뭐지”라고 칭찬했단다. 사람은 어떤 관계이든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칭찬거리가 있다. 목민심서에는 “베려고 하면 풀이 아닌 것이 없고 품으려 하면 꽃이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 잡초가 돼 풀처럼 베는 것도, 예쁜 꽃으로 존중받는 것도 누군가의 선택으로 되는 것이다. 나태주 시인은 시 ‘풀꽃’에서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라고 노래했다. 가만 가만히 오랫동안 바라보면 예쁘고 사랑스러워 들풀도 꽃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들풀도 꽃으로 보는 눈만 있으면 누구든 칭찬할 수 있다. 필자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다. 큰아들이 태어나고 3년 후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아내와 함께 기도해 셋째를 낳았는데 딸과 아들, 쌍둥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자녀들이 장성하고 결혼해 3명의 손주가 있다. 10월에 또 한 명의 손녀가 태어난다. 아들딸을 키울 때는 바빴고 힘들었고 눈앞의 일에 집중하느라 다 칭찬하지 못하고 그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이 몹시 아쉽고 자식들에게 미안하다. 그런데 손주가 태어나 자라는데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무한칭찬, 무한사랑으로 손주들을 만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마음에 심어 놓으신 것이 분명하다. 이 땅의 모든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손주를 지극 정성으로 사랑하고 칭찬한다. 그 힘으로 연약한 생명들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8월의 무더위가 지나가고 푸르른 생명들이 열매로 익어가는 9월에는 고개를 들어 멀리 바라보며 많이 칭찬하는 시간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삶, 오디세이] 모두가 지금에 산다

음력 7월15일은 ‘백중(百中)’이라는 세시풍속이 있는 날이다. 농경사회에서 무더운 여름 동안 휴식을 취하고 곳간에 쌓아 뒀던 음식을 먹으며 가을의 추수를 기다리던 우리의 옛 전통이지만 지금은 어떤 날이며, 왜 있는지조차 희미해지고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백중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불교만의 전통으로 이끌어 지금까지도 백중 기도의 법회를 열고 있다. 불교에서의 백중은 ‘百中’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百衆’이라고 해 모든 중생에게 공양을 베푸는 의미로 법회를 한다. 살아있는 지금의 우리와 더불어 우리를 있게 해준 부모와 인연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해 모두가 보다 나은 내일을 맞이하길 바라는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찰에서 이 시기에 백중과 우란분절 법회를 봉행한다. 백중 법회에서는 부모를 비롯해 우리와 인연된 모든 떠나 보낸 영가들을 위한 제사와 그들이 불교적으로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좋은 윤회의 삶을 받아 나아가길 바라는 천혼(薦魂)의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우란분절은 산스크리트어의 ‘우람바나(ullambana)’를 음사한 ‘우란분’을 절기로 둬 ‘盂蘭盆節’이라 한 것이다. 즉, 다른 의례와 달리 우란분절은 민중의 절기로 삼았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깊이 신앙됐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전통의례다. 이 우란분절에는 부처님의 제자인 목련존자와 그의 어머니에 관한 설화를 담은 ‘목련경(目連經)’이 그 배경이 된다. 존경받는 수행자인 목련존자를 아들로 둔 그의 어머니는 다른 수행자들이 목련보다 수행이 낮고 부족한 이들이라 무시하며 많은 업보를 쌓았고 죽은 후 그 업에 의해 지옥에 떨어져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목련은 가슴 아파하며 부처님께 어머니를 구제해 주시길 간청드리지만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업에 의한 과보를 함부로 바꿔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공양을 베풀고 지극한 마음으로 업보를 참회하면 조금씩 그 삶이 나아질 것이라 가르쳐 주셨고 목련은 그 가르침대로 매년 우란분절에 많은 이들에게 공양을 베풀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려 그 공덕으로 어머니를 지옥에서 아귀로, 다시 개로 윤회하게 이끌었고 끝내는 도리천궁에 태어나게 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드린다. 이처럼 우란분절은 바로 자신의 부모님에게 불교적으로 효행을 해드리는 날로 혹시라도 사후에 어려움을 겪으실지 모르는 부모님을 생각해 기도를 올리는 법회다. 불교는 무아(無我)를 말하는 종교이지만 지금의 자신을 진아(眞我)라고 해 인연들과 더불어 존재한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건 부모와 인연들이 우리와 함께해줬고 지금도 함께하는 덕분이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오늘 하루지만 부모님과의 소중한 인연을 한 번 더 생각하고 기억함으로써 새롭게 맞이하는 가을의 문턱에서 감사한 시간을 스스로 만들고 행복한 지금에 모두와 함께 살아가자.

[삶, 오디세이] 세계화된 한국문화, 그렇지 못한 이주노동자 일터

한국 소프트파워의 글로벌 장악력이 체감되는 이 시대, 케이팝은 더 이상 낯선 이국의 장르가 아니라 세계인의 일상에 녹아 있고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OTT 플랫폼을 타고 전 세계 시청자들의 대화에 오르내렸으며 최근에는 미국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글로벌 성공을 거둠으로써 K-콘텐츠의 확장성을 입증했다. 이러한 가운데 대통령은 문화의 산업화를 선언하면서 문화는 이제 국가 성장엔진으로 인식되고 있다. 문화의 세계화는 어느덧 한국인의 자부심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무대 뒤편에는 전혀 다른 얼굴의 한국이 있다. 바로 외국인 노동자의 삶이다. 농촌의 계절 수확, 건설 현장의 고단한 노동, 공장의 단순 반복 작업 등 한국 사회의 기초는 이미 이주 노동자의 손길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이 매일 처하는 일터에서의 현실은 우리가 자랑하는 한국문화의 확장성이나 개방성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벽돌공장 이주노동자 학대 사건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세계화되지 못한 노동 감수성 속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냈다. 한국문화는 K를 머리에 붙이고 세계를 누비지만 열악한 숙소, 여권 압수, 브로커의 착취, 산업재해의 불균형한 위험 등 외국인 노동 현장은 국경 안에 갇혀 있다. 사실 K-콘텐츠는 오래전부터 이 모순을 비춰 왔다. ‘반두비’(2009년)는 이주민 청년과 한국 청소년의 우정을 통해 차별과 배제를 드러냈고 ‘방가? 방가!’(2010년)는 외국인 노동자로 위장한 한국 청년의 삶을 통해 사회의 편견을 풍자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2021년)은 외국인 노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의 고립과 차별을 생생히 드러냈고 영화 ‘아침바다 갈매기는’(2024년)은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결혼이주여성의 시선을 통해 다문화 사회의 이질감을 보여줬다. 이렇게 스크린과 플랫폼은 한국인의 일상 속 그림자를 이미 오래 비추고 있었던 셈이다. 이 문제는 우리의 과거에도 닿아 있다. ‘국제시장’(2014년)의 독일의 탄광과 병원에서 땀 흘린 한국인 광부와 간호사는 타국의 외국인 노동자였다. ‘미나리’(2020년)는 낯선 땅에서 뿌리 내리려 애쓰는 한국 이민 가정을 통해 우리가 언제든 세계 속의 이방인이 될 수 있음을 환기한다. 이렇게 볼 때 한국 내부의 외국인 노동 문제는 과거의 우리의 문제였고 현재 우리가 타국에서 겪는 문제일 수 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외국인 노동자를 값싼 노동력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시민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 국적을 넘어 모두가 안전하고 존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보편적 권리의 확보다. 사업장 변경 제한 같은 구조적 종속을 완화하고 주거·의료·교육까지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적 개선 또한 절실하다. 이렇게 사회 내부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적 포용성이 일반화될 때 한국문화의 세계화도 지속가능성을 얻게 될 것이다. 영화와 드라마는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불균형에 대해 질문을 던져 왔다. 이 불균형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한국문화의 세계화는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 진정한 세계시민 의식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존엄을 보호하는 일에서 비롯한다. 그 존엄성을 지켜낼 때 한국은 비로소 세계 무대에서 제 몫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삶, 오디세이] 동행의 축복

인생이란 참으로 신비하다.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니고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행복한 것만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누가 가장 행복한 인상을 사는 것일까. 비행기 일등석을 타는 인생이라고 다 행복한 것도 아니고 삼등석 맨 뒷자리에 앉아 가는 인생이라고 다 불행한 것도 아니다. 그럼 누가 가장 행복할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타고 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가장 편하고 가장 행복한 인생이다. 그러니 인생길을 혼자 걸어가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어가라. 어릴 적 나는 강원도 시골에서 자랐다. 산속의 밤은 도시보다 일찍 시작된다. 산 넘어 옆 동네에 이모 집이 있었다. 종종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밤길을 나서 이모 집에 마실을 가시곤 했다. 낮이라면 혼자서도 갈 수 길이지만 밤길에는 항상 어린 나를 데리고 이모 집에 가서 놀다 오셨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말은 어두운 밤에 이모 집을 들어서면 이모가 무척 반기시면서도 “아는 뭐 하러 데리고 왔나”라고 하시면 어머니는 “언니, 밤길에 얘라도 데리고 오면 든든하다”고 하셨다. 그렇다. 밤길에 아무런 힘도 쓸 수 없고 오히려 짐이 될 것 같은 어린아이 하나만 있어도 마음이 든든한 것이 인생이다. 신학교 다닐 때 종종 삼각산에 올라가 산 기도를 한 적이 있다. 금요일까지 대전에서 공부하고 토요일과 주일은 서울 집에 가서 교회 일을 했다. 토요일 밤에 성가대 연습과 교회학교 교사 훈련까지 마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서둘러 산 기도를 위해 혼자 삼각산에 올라갔다. 그때 막대기 하나, 돌멩이 하나를 손에 들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목자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 하나면 양 떼는 안전할 수 있다. 밤길에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맞은편에서 사람이 다가오면 손에 있는 돌멩이, 막대기보다 먼저 인사하는 것이 최선이다.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인사하면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사람도 당연히 나와 같은 경계심과 두려운 마음을 내려놓고 인사를 받고 덧붙여 “편안한 길 되세요”라고 축복을 나누게 된다. 인사를 나누기 전에 불편했던 관계가 먼저 인사를 함으로써 동지가 되고 내 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과 인사를 잘하는 것임을 유학 생활 중에 깨달았다. 넓은 땅에 사람이 흔하지 않은 곳에서 사람을 만나면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서로 먼저 인사를 한다. 나에 대한 상대방의 경계를 풀고 그에게도 평화의 시그널을 보내므로 안전한 생활을 할 뿐 아니라 좋은 이웃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점점 개인화되고 전문화되기에 좋은 만남, 좋은 이웃이 더욱 필요하다. 초등학교 1학년 방학을 맞은 손주가 집에 와서 놀다가 “지금은 AI 시대야”라고 하는 말이 신기하게 들려왔다. AI 시대, 첨단과학 다 좋은데 좋은 친구, 좋은 만남이 없다면 그는 불행하게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가져도 불행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고 가진 것이 적어도 동행하는 인생이 가장 복된 인생임을 늘 기억하고 평생 동행의 축복이 있으면 좋겠다. 죽음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 이유는 혼자 가는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조차도 동행하는 인생이 있다. 그리고 죽음 너머에 그를 기다리고 환영하는 동행이 있다.

[삶, 오디세이] 내일은 다르길

연일 이어지는 불안정한 날씨로 지구의 모두가 힘들어하는 요즘이다. 우리도 7월의 마른장마 이후 갑작스러운 극한호우로 여러 피해 지역과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폭염. 작년 이맘때도 비슷한 일을 겪었으나 올해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가장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내년엔 올해보다 더 더워질 것이고 반대로 겨울엔 더 추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여름의 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즐겁게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잘 다녀오라는 인사 대신 “물 조심해라”, “어딜 가든 조심해라”는 말을 당연한 듯 하고 있다. 예전에도 여름엔 더웠고 장마엔 비가 많이 내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 정도가 달라졌다. 과거의 기준으로 그것들을 표현할 수 없어 새로운 기상용어까지 만드는 실정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젠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까와 더불어 근원적인 물음도 필요한 시점이다. 당연히 그 원인은 우리 인간들의 무분별한 자연 파괴와 산업·공업화, 그리고 쓰레기다. 이것 외에도 너무나 많지만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다. 그러나 이것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발전할 수 있었고 지금의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참으로 모순적이고 양날의 칼과 같은 현실이다. 여러 미디어나 사회운동으로 쓰레기 줄이기, 자연환경운동, 재활용이 강조되고 있어도 모두가 쉽게 변화하고 따르지 못하는 것도 이처럼 편리함와 불편함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오늘을 살펴보자. 습식사우나와 같은 찜통더위, 더위를 식혀 주나 싶지만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극한호우,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초강력 태풍.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편리함을 쫓고 불편함을 이기지 못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우리의 업보다. 불교에서 업은 두 종류가 있다. 일반적으로 한 개인의 행위에 의해 생기는 업을 ‘불공업(不共業)’이라 하고 한 집단이나 사회가 함께 만들고 함께 받는 업을 ‘공업(共業)’이라 한다. 그리고 공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연환경을 ‘기세간(器世間)’, 그 기세간에 살고 있는 생물을 ‘유정(有情)’, 즉 중생이라 한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는 바로 ‘공업중생’이다. 지금의 이런 모습은 바로 우리, 공업중생이 만든 것이고, 우리가 지금도 내일도 겪어야 하는 공업의 기세간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없고 우리의 자손들을 힘들게 할 수 없기에 지금부터 우리의 삶을 바꿔야 한다. 불편함이 편리해지고 귀찮음이 당연함이 될 때 우리의 내일이 달라질 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공업으로 내일의 기세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온전한 세상으로 바꿔야 한다. 탓이 아닌 배려와 원망이 아닌 실천으로, 오늘 우리의 하루를 조금씩 바꾼다면 그 업이 공업이 돼 다른 누가 아닌 우리가 다시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삶, 오디세이] 설명 없이도 존엄한 ‘몸’

살 빠진 것 같다, 오늘 머리 스타일이 예쁘다, 동안이다 등 우리는 너무 쉽게, 때로는 너무 무심히 타인의 외모에 대한 인사를 건넨다. 칭찬으로 둔갑한 사실상의 평가와 지적인데도 말이다. 겉모습에 대한 인사는 예의상 이뤄지는 스몰토크 같지만 실은 너의 몸을 나는 이렇게 보고 있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그 악의 없는 인사말이 타인의 몸에 대한 권리를 아무렇지 않게 침범한다는 데 있다. 몸은 누구나 가진 것이지만 누구나 존중받는 것은 아니다. 마른 몸은 칭찬받고 뚱뚱한 몸은 조언받는다. 젊은 얼굴은 부러움의 대상인 반면 주름진 얼굴은 침묵을 강요당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특정한 외모를 이상화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몸을 교정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우리는 마치 남의 몸이 모두 코멘터리 가능한 대상인 양 굴고 스스로의 몸도 언제나 비교당할 준비를 하며 살아가는 듯하다. 이 얼마나 불필요한 소모전이란 말인가. 하지만 우리의 몸은 설명되거나 정당화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분하다. 어떤 몸도 타인의 시선과 발언을 통과해야만 존재의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매의 다양성은 인간 조건의 자연스러운 결과이기에 그 어떤 몸도 평가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 외모에 대한 칭찬과 지적, 인사와 충고 모두가 타인의 신체를 통제하는 방식일 수 있다면 우리는 이제 그 언어를 멈출 책임이 있다. 이러한 몸에 대한 관용은 좋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 아닌 타인의 외모에 대해 설사 좋은 말일지라도 침묵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윤리다. 그런 관점에서 몸이 불편해 보인다거나 옷이 안 어울린다거나 하는 등의 모든 말은 걱정이나 호의의 탈을 쓰고 있지만 실은 주관적 시선에 기반한 통제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몸에 대해 말하는 순간 나는 그 말을 듣는 존재를 해석 가능한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간섭하지 않을 책임과 간섭받지 않을 권리를 서로 보장하는 사회야말로 건강한 몸의 공동체다. 타인의 몸에 말을 얹지 않을 자유, 나의 몸이 평가당하지 않을 권리, 그것이 지켜질 때 우리는 비로소 각자의 몸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 무엇보다 몸에 대한 자존감은 남의 인정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몸이 지나온 시간과 경험을 스스로 긍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 아팠던 날들, 견뎌낸 상처, 웃었던 얼굴, 늙어가는 손 등을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겉모습에 대해 말하고 싶어질 때 내 몸이 나의 시간이고 나의 역사인 것처럼 그 또한 마찬가지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 사실 앞에서 우리는 누구도 타인의 몸을 가볍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몸은 감각의 통로이자 정체성의 토대이며 타인과 세상을 경험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다. 누구의 몸도 이상적인 기준에 맞춰 조율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서로 다른 몸으로 존재하며 그 다름이야말로 인간다움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그 어떤 수식어 없이, 설명 없이, 다만 그 자체로 충분히 존엄하다. 그러니 적어도 7일 중 하루는 타인의 겉모습에 대해 말하지 말자. 그 침묵의 시간이 쌓여 우리는 타인의 몸을 진정으로 존중할 수 있고, 더불어 내 몸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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