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할리우드를 빛낸 황금 아이콘, 로버트 레드퍼드가 17일 눈을 감았다. 1936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치면 90세 노인이건만 필자는 그의 주름진 얼굴을 모른다. 그저 ‘추억’의 번듯한 순정남, ‘스팅’의 능청스러운 사기꾼으로 그를 기억한다. 올해부터 동네 책방에서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독서모임에 들어가 함께 책을 읽기 시작했다. 10년 넘게 유지되고 있는 이 독서모임에서는 서로 이름도, 성도, 직업도, 고향도, 출신 학교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책으로만 만나 깔끔하게 토론하고 헤어진다. 쿨한 이웃들과 함께하는 느슨한 모임이 바쁜 현실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적절한 긴장감을 주고 있었다. 아침에 부고를 접하고 독서모임 단톡방에 영화 ‘추억’의 한 장면을 올리자 댓글이 쏟아졌다. 레드퍼드 영화 리스트, 미남 스타 사진, 스트라이샌드의 노래 영상 등이 줄줄이 올라왔다. 누군가는 마이클 잭슨을 추억하고 또 누군가는 잭 니컬슨의 근황을 떠올렸다. 우리는 이름도, 고향도 모른 채 책으로만 만나는 사이지만 대중문화의 기억을 나누는 순간 성큼 가까워졌다. 어느새 독서모임 이웃들이 친근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고향, 직업, 사는 곳, 출신 학교, 결혼 여부를 물어보는 건 실례지만 각자 좋아하는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펼쳐보이는 건 서로를 묶는 단단한 끈이 된다. 같은 노래, 같은 영화, 같은 스타를 나눈다는 건 이데올로기, 지역, 배움의 정도와 관계 없이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그 시절 추억을 털어놓는 일이다. 이런 점 때문에 대중문화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를 잇는 타임머신이며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한데 묶는 언어다. 정치의 협소한 편가르기를 넘어 같은 노래와 같은 스타를 기억하는 경험이야말로 연대의 시작이다. 최근 영화 ‘얼굴’(연상호)과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도 그 힘을 보여준다. ‘얼굴’은 1970년대 동대문 피복공장의 현실을 소환하고 ‘은중과 상연’은 IMF 외환위기 직후의 불안한 사회상을 서사로 엮는다. 통계나 분석보다 영화와 드라마가 불러내는 기억의 힘이 크다. 극단의 정치 진영과 유튜브 알고리즘 현상으로 우리 편과 남의 편을 나눠 사고하는 현실은 부박하다. 대중문화는 이 같은 현실을 순화시키며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나아가 연민해 연대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얄팍한 정치물로 같은 편끼리 위안하는 건 사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빛나기 위해 태어났으니까 이젠 숨지 않아”라는 가사를 품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 세대를 넘어선 희생으로 마무리된 ‘오징어게임’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대중문화는 시대를 증언하고, 낯선 이들을 친구로 만들며,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다. 레드퍼드의 퇴장은 끝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한 추억의 시작을 다시 확인시키는 사건이다. 한 시대의 종말이 아니라 그의 영화와 그에 대한 추억 속에서 한 시대가 여전히 빛나고 있음을 확인하고서 가슴이 뭉클했다.
오피니언
경기일보
2025-09-17 19: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