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6. 파주 한향림옹기박물관

겨울밤 장독 뚜껑을 열고 코를 킁킁대며 동치미가 담긴 독을 찾던 유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린다. 반세기 전만 해도 장독대는 서민들의 집은 물론이고 산속의 사찰과 궁궐에도 반드시 있었던 살림살이였다. 파주 헤이리예술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한향림옹기박물관(관장 한향림)을 찾았다. 산속에 놓인 장독대가 정겨운 옹기박물관에서 처음 만난 추억의 유물은 기다란 원통형 물건들이다. “연통과 연가입니다. 아궁이에 불을 땔 때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만든 굴뚝은 연통과 연가로 이뤄져 있지요.” 최준석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한옥 온돌방에서 연기를 배출하는 굴뚝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다. 이처럼 ‘연가’는 굴뚝으로 빗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지붕 역할을 하는 물건이다. 새와 거북이 조각돼 있는 연가에서 옛사람들의 여유와 멋을 발견한다. 어릴 적 무심히 봣던 것을 나이가 들어 자세히 살펴보는 시간이 즐겁다. ■ 옹기에 쏟은 부부의 사랑 2004년 문을 연 옹기박물관은 본관인 옹기박물관과 분관인 현대도자미술관으로 이뤄진 도자 전문 사립박물관이다. 옹기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한향림옹기박물관은 어떻게 설립됐을까. 설립자이기도 한 한향림 관장은 대학에서 도자기를 만들던 시절에 옹기의 매력에 빠졌다고 한다. 도기나 자기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자연 친화적이고 역사가 긴 옹기에 마음이 끌렸다는 그의 고백이 놀랍다. “프랑스 유학 시절 유럽의 여러 미술관과 박물관을 다니며 도자기 명품들을 봤어도 옹기가 지닌 매력을 넘어서진 못했습니다.” 1987년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한 관장은 전국을 돌며 눈에 띄는 옹기를 모으기 시작한다. 당시만 해도 옹기는 도자기에 밀려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드물었기에 약 1천500점에 이르는 아름답고 소중한 옹기를 수집한다. 기업체 대표였던 한 관장의 남편이 적극 도움을 준 것이 큰 힘이 됐다. 부부가 마음과 뜻을 모아 세운 박물관이라 그런지 더욱 정감이 간다. “옹기는 인류의 일상생활 속에서 같이 숨을 쉬며 살아온 물건이지요. 집마다 장독대에 있던 항아리가 바로 옹기입니다. 플라스틱 용기가 나오기 전까지 옹기는 생활필수품이었고 조상의 지혜와 일상적인 미의식이 담긴 물품입니다. 이런 옹기들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정감이 가고 자연스럽게 힐링이 됩니다.” 옹기의 가치를 제대로 보존하고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박물관을 설립한 한 관장은 작가로도 촉망받았다. 1998년에 연 개인전에서 ‘산’을 소재로 한 독특한 옹기 작품을 선보여 호평받았고 대학 교수직을 제의받았으나 작품 제작과 옹기 수집에 전념하는 길을 선택한다. 우리 고유의 옹기를 보존하고 보여줘야 한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할머니나 어머니가 쓰던 장독도 세월이 흐르면 문화재와 예술품이 될 수 있다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인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옛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결국 예술을 누리는 첫걸음입니다.” ■ 팔도의 옹기를 만나다 한향림옹기박물관에 전시 중인 옹기의 대부분은 조선 후기인 1850년에서 1950년대 이전의 것들이다. 최 학예사의 안내로 팔도의 특색 있는 옹기와 마주한다. 지역마다 생김새가 다르고 개성이 뚜렷한 옹기를 한자리에서 만나는 시간이 즐겁다. “우리나라 옹기는 지역의 일조량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합니다. 경상도나 전라도처럼 일조량이 많은 경우 입구가 좁고 몸통이 불룩하지만 경기도의 경우 장에 더 많은 볕을 쪼이기 위해 넓은 입구와 일자형 몸통으로 제작됐습니다.” 입구가 넓은 것은 북부지방의 항아리일 가능성이 높고 배가 부르고 입구가 좁은 적은 것은 남부지방의 항아리일 가능성이 높다. 전시실 입구 왼편에 경상도 옹기와 전라도 옹기가 나란히 전시돼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차이는 무엇일까. “경상도 옹기는 배가 부른 둥근 모양을 하고 있으며 전라도에 비해 문양이 적거나 단순하고 유약의 색은 어두운 갈색으로 진하며 바닥에 비해 입구가 좁아 안정감이 있습니다.” 전라도 옹기는 경상도와 달리 화려한 문양이 돋보인다. 전라도를 예향이라 불리는 까닭을 옹기도 보여준다. 충청도 옹기는 짐작했던 대로 경기도와 남부지방의 중간 형태다. 경기도 옹기에 비해 어깨 부분이 더 볼록하며 남부지방 옹기에 비해 입구가 더 넓다. 제주도 옹기의 특징은 무엇일까. “전국에서 유일하게 유약을 바르지 않고 제작되는 옹기로 철분이 많은 화산토로 만들어 붉은색을 띠고 있습니다. 바닥을 넓게 만들어 바람에 쉽게 넘어지지 않도록 했지요.” 입구가 넓고 어깨 부분의 경사도가 급한 모양의 옹기는 일조량이 적은 추운 날씨에 잘 견디도록 만든 강원도 옹기다. “강원도에는 산이 많은 탓에 운반이 쉽도록 작은 크기의 옹기가 많습니다.” 경기도의 옹기들이 전시실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서울과 경기도 옹기는 장독대에 많은 항아리들을 효율적으로 둘 수 있도록 홀쭉하게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옹기 안으로 더 많은 햇볕을 받아 장이 익을 수 있도록 입구가 넓습니다.” 소나무의 송진을 모으던 용기 ‘송진독’은 식민지 시기 일제의 자원 수탈을 보여주는 특이한 유물이다. 두 팔을 벌린 모양의 간수통은 보기 드문 유물이다. 천일염을 이 간수통에 넣어 두면 간수가 나오는데 이 간수로 두부를 해 먹었다. 호롱불을 등잔에 넣었던 부엌등 같은 유물도 정겨운 유물이다. ■ 옹기, 흙으로 빚어 불로 만든 그릇 기획전이 열리는 2층에서 독불장군을 만난다. 5월에 개관한 기획전 ‘독불장군, 흙으로 빚어 불로 만든 그릇’은 박물관의 정성과 노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콧수염을 기르고 상투를 튼 ‘이대장’과 더벅머리 청년 ‘박건아’가 반겨준다. 기획전의 등장인물 캐릭터는 최 학예사가 직접 그린 작품이다. 전주는 옹기 제작의 물적 지원을 담당하는 인물, 옹기대장은 옹기를 빚을 줄 아는 전문기술자로 옹기를 만들고 가마에 서리며 굽는 사람, 건아꾼은 옹기대장의 보조기술자로 흙 준비, 옹기 말리기, 시유, 옹기 보수, 운반 등 제작 전반의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최 학예사는 전통가마 모형을 만들기 위해 경기 여주시 금사면 ‘오부자옹기’를 찾고 제96호 국가문화유산 김창호 옹기장에게 직접 들은 전통 가마와 근현대 옹기장들에 관한 이야기를 관람객에게 들려준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흙으로 그릇을 빚어 사용해 왔습니다. 흙은 점성이 있어 조물조물 무엇이든 만들기 좋은 재료이지만 마르고 난 후 쉽게 부서집니다. 그러나 이런 흙에 열을 가하면 훨씬 가볍고 단단한 물질이 됩니다.” 인류가 고온의 불을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전에 없이 뜨거운 불을 만난 흙은 비로소 온전한 그릇이 됐다. “불의 온도가 높아질수록, 불을 다루는 장인의 노력이 더해질수록 그릇은 더욱 견고하고 아름다워졌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도기와 자기, 즉 도자기입니다.”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옹기들은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가 사용하던 생활용품이었다. 이 옹기들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누구와 함께 살다 여기까지 온 건지 각각의 옹기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친절하게 들려준다. 박물관에 있는 옹기들이 태어나던 시기, 한창 옹기 수요가 급증하던 1900년대를 전후한 그 시절 옹기를 만들던 사람들을 만나 그때 그 이야기들을 차분히 들려준다. 관람객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한향림옹기박물관의 치열한 노력은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제11회 ‘자랑스러운 경기도 박물관인상’ 큐레이터상 수상(2015년)과 제17회 ‘자랑스러운 경기도 박물관인상’ 관장부문 수상(2021년)은 이를 대변하는 성과물이다. 국고지원사업 우수 박물관상을 수상하고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활성화 유공표창을 받기도 했다. 관람객들의 마음을 사기 위한 한향림옹기박물관의 고민과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5. 용인 경기도박물관

경기도박물관(관장 이동국)의 주말 풍경이 여유롭다.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위창 오세창의 삶과 예술 그리고 독립운동을 조명하는 특별전 ‘오세창: 무궁화의 땅에서’를 관람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위창 오세창(1864~1953)은 누구인가. “위창은 개화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서화가이자 수장가, 언론인이자 예술인으로서 대한민국 근현대 문화의 주춧돌을 놓은 분입니다. 전통이 뿌리째 흔들리던 시대, 꺾이지 않는 손으로 그 맥을 붙들어 ‘문화보국’의 가치를 지켜냈지요.” ■ 위창, 문화보국의 기초를 건설한 사람 전시를 기획한 박물관 관계자의 설명이 솔깃하다. “1919년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던 그는 우리 문화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해 애쓴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그가 모아 전한 수많은 글과 그림은 오늘날 ‘K컬처’의 근간이 됐습니다.” 제1부 ‘개화와 독립–역매亦梅·위창葦滄의 시대’를 살펴보며 그의 아버지가 개화사상가 오경석(1831~1879)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자료는 격변기를 뚜벅뚜벅 걸어간 부자의 모습을 그려준다. 제2부 ‘형태로 새긴 의미–금문金文 탐구와 전각 예술’과 제3부 ‘수장의 길–문화 독립을 향하여’에서 이름만 들었던 고서화와 금석 자료를 만나는 기쁨이 크다. 제4부 ‘붓끝으로 시대를 견디다–오세창의 글씨와 동시대 예술’에서 전서와 예서를 넘나든 위창의 서예작품을 감상하며 그의 우뚝한 생애를 더듬어본다. 내년 봄까지 열린다고 하지만 역시 일찍 관람하는 것이 좋다. 위창이 수집해 엮은 ‘근묵’과 ‘근역서휘’, ‘근역화휘’는 그가 얼마나 우리 문화를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강감찬을 비롯해 신사임당, 한석봉, 정약용, 김정희 등 빼어난 인물들의 글과 글씨 90여점을 만나는 행복한 시간을 가져보자. ■ 경기, 사람들이 모여든 곳 토기가 가득하다. 흙빛이 이처럼 아름다운지 미처 몰랐다. 수십만년 전 경기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풍성하다. 한탄강과 임진강, 한강과 그 지류인 연천 전곡리, 남양주 호평동 유적에서 확인된 옛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선사의 시작을 알리는 ‘경기 땅에 사람이 등장하다’부터 ‘마한을 넘어 백제를 세우다’와 ‘통일국가, 신라’로 이어진다. 고대사를 바꿔 쓰게 했던 주먹도끼를 떠올리며 아득한 선사시대로 떠나는 발걸음이 가볍다. 연천삼거리에서 발견된 겹아가리항아리는 청동기시대를 알려주는 대표적 유물이다. 화성 소근산성과 고양 멱절산성에서 한성백제의 유물인 세 발 달린 토기가 발굴됐다. 포천 자작리에서 발굴된 큰 독, 파주 육계토성에서 발굴된 삽날과 살포는 농업과 관련된 귀중한 유물이다. 유물을 살펴보다가 경기도가 오랫동안 백제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경기도박물관은 현재의 경기도 사람들에게 경기인의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까. ‘여기가 경기!’에는 경기도박물관에 오면 천년 경기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정수를 볼 수 있다는 다짐을 담아 유물을 배치했다. 고려시대를 ‘천하의 중심 고려’, ‘고려의 중심 경기 코리아의 시작’, ‘새로움이 시작된 곳’, ‘고려인의 삶’, ‘또 다른 출발’로 구성해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조선시대는 ‘경기, 나라의 근본’, ‘천혜의 요새’, ‘개혁의 중심’, ‘경기에 모이다’로 내용을 꾸며 근대 이전의 경기를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경기 사대부’들의 예술을 보여주는 ‘조선의 문화를 이끌다’, ‘예술로 꽃피우다’, ‘경기인을 만나다’라는 이야기도 배치해 재미를 더했다.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고려사절요’를 마주하며 세종의 역사 의식을 엿본다. 새와 꽃무늬가 새겨진 청자로 만든 의자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을까. 창공을 나는 학을 새긴 청자에서 고려의 풍요와 멋을 발견한다. 고려인들의 불심이 깃든 ‘초조대장경 화엄경 제1권’은 국보로 대접받는 귀중한 유물이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단심가를 부르며 죽음의 길을 선택한 포은 ‘정몽주 초상’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기개 있는 지식인을 보기 드문 시대여서 더욱 돋보이는 인물이다. ‘송언신에게 보내는 선조의 비밀 편지’를 보며 임금과 신하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표암 강세황의 글씨와 1790년 그려진 김홍도의 작품 ‘강가의 한가로운 풍경’도 눈길을 끄는 전시물이다. 15세기 후반에 빚어진 ‘백자항아리’와 17세기 제작된 ‘백자용무늬항아리’의 은은한 미색과 둥글고 부드러운 선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준다. 조선백자를 마주하면 왜 우리 민족이 흰색을 좋아했는지 조금 알 것 같다. ■ 경기, 나라를 지탱하는 뿌리 대동법 시행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잠곡 김육의 초상화가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우람한 소나무 아래 서 있는 이가 안민(安民)에 모든 것을 걸었던 정치가 김육이다. 명재상의 우뚝한 풍모가 소나무와 조화를 이룬다. 정조 시대의 대표 정치가 ‘심환지 초상’도 주목되는 유물이다. 머리털 한 올도 소중히 다룬 조선의 초상화를 오래 바라보면 그 시대와 그 사람의 인생이 그려진다. 옛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경기도박물관을 찾아 풍성하게 전시된 초상화만 관람해도 만족하지 않을까. 고려의 도읍 개성을 생각하면 우리의 현실이 분단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1천 년 동안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서 개경과 한양이라는 도읍을 가졌던 경기는 나라를 지탱하는 뿌리였습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개경과 한양을 나무와 물에, 경기를 뿌리와 샘에 비유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전시실 중앙 네모난 유리관 안에 놓여 있는 의자와 지팡이가 예사롭지 않다. 보기 드문 ‘사궤장(賜几杖)’이다. 나이 일흔이 넘은 1품 이상의 대신에게 왕이 팔걸이의자(几)와 지팡이(杖)를 내려줘 예우하는 법이 있었다. 이 유물의 주인이 백헌 이경석이다. 병자호란의 극복에 치욕을 감수하며 온몸과 정성을 다한 명재상이다. 1668년 70세가 넘은 이경석이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청했을 때 국왕 현종이 하사한 유물이다. 그 과정을 그림으로 담은 ‘연회도첩’을 살펴본다. 당대 석학들이 지은 축하의 글과 이경석 본인의 마음을 읊은 시를 기록했다. 교서와 궤장을 싣고 온 행렬이 이경석의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인 ‘지영궤장도’, 교서를 낭독하고 궤장을 전달하는 ‘선독교서도’, 의식이 끝난 뒤 연회를 거행하는 ‘내외선온도’다. 실감영상실에서 연회도첩을 토대로 구성한 친절한 전시는 ‘사궤장 제도’에 따라 이경석이 의자와 지팡이를 하사받는 장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멋진 투구와 창이 보인다. 효종의 뜻에 따라 북벌을 준비한 이완 장군(1602~1674)의 특별한 유물과 마주한다. 이완은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맡아 각종 군제개혁 사업을 주도하며 국방 강화에 주력한 인물로 유명하다. “장군이 생전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투구와 창으로 경주 이씨 구당공파 정익공 종중에서 기증한 유물입니다.” 금으로 상감한 용과 연꽃과 당초무늬를 장식한 투구를 찬찬히 살펴본다. 창날에 뚫린 구멍은 아마 깃발을 달기 위한 것이리라. 황동으로 만든 띠를 둘러 장식한 창 자루도 주목된다. 이완을 의정부 우의정으로 임명하는 현종의 교지도 주목된다. 박물관에서 여성의 초상과 마주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런 면에서 채용신이 그린 ‘기계 유씨 47세 초상’은 관람객의 눈길을 절로 머물게 한다. 용인 이씨 문중으로부터 기증받은 이돈상의 초상화가 넉 점이나 있다. 이를 통해 초상화가 그려지는 과정을 알 수 있다.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경기도박물관이 자리한 야트막한 산자락에 경기어린이박물관과 백남준아트센터도 자리 잡고 있다. 박물관과 미술관은 언제 찾아도 좋다. 겨울은 우리의 생각을 깊게 만드는 계절이다. 경기인의 뿌리를 알려주는 경기도박물관을 찾아 우리 생각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4. 양주 조명박물관

아담한 동산에 둘러싸인 조명박물관(관장 구안나)에 들어서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양주시 광적면 석우리에 자리한 조명박물관은 토종 조명기업으로 중소기업문화경영 대상을 받았던 필룩스㈜가 2004년 건립해 개관한 사립박물관이다. 조명박물관의 운영 목표 중 첫째가 ‘사라진 고유한 조명문화의 복원 및 재생’이다. ■ 사라진 조명문화의 복원과 재생 조명박물관 1층에 있는 역사관은 불빛의 역사를 친절하게 알려주는 흥미로운 공간이다. “50만 년 전, 최초의 인공조명인 ‘불’을 발견한 인류는 필요에 따라 불을 이용하면서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안상경 학예사의 설명에 귀 기울이며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정겨운 유물을 만난다. 순수한 자연물이 소재인 홰와 관솔을 비롯해 밀랍초와 촛대, 호롱과 등잔, 좌등, 등경, 등가 같은 유물은 전기가 일상화되기 이전의 전통 조명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조명 유물을 살피다 보면 관람객은 자연스레 추억을 더듬기 마련이다. 전시실에서 만난 재미난 유물이 여러 가지다. 밤길을 걸을 때 발밑을 비추는 조족등은 실물로 처음 대하는 유물이다. 품격이 느껴지는 조선 양반가의 안방처럼 꾸며 놓은 공간이 나타난다. 방 안에는 나비 장식을 한 촛대와 겨울밤에 둘러앉아 군밤을 굽던 화로가 놓여 있다. 놋쇠로 장식한 고풍스러운 가구 위에 놓인 등잔의 호롱불만큼 한국인에게 친숙한 유물이 또 있을까. 1970년대까지 시골에서 사용했던 호롱불은 나이 든 관람객에게는 친숙한 물건이지만 아이들에게는 마냥 신기한 유물이다. 과거를 회상할 때 흔히 쓰는 ‘주마등’이 삼국시대부터 사용된 장식용 등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전기를 이용해 불빛을 내는 전구의 발전을 살펴보는 시간도 유익하다. 방 안을 밝히고 거리를 밝혀 주던 전깃불은 마차와 자동차, 바닷길을 안내하는 등대에 장착돼 사고의 위험을 크게 줄인다. 필라멘트가 들어있는 전구를 찬찬히 살펴본다. 에디슨이 발명한 둥근 전구는 한동안 조명기구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인류의 일상을 확 바꾼 전구도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기다란 형광등이 등장하면서 과거의 유물로 밀려난다. 형광등이 수은의 방전으로 생긴 자외선을 가시광선으로 바꿔 빛을 낸다는 사실, 형광등을 밀어낸 발광다이오드(LED)는 전류가 흐르면 빛이 나는 반도체라는 사실도 배운다. 아름답고 우아하게 장식한 조명기구의 변천사 역시 흥미롭기는 마찬가지다. 조명은 20세기에 혁명적으로 진화한다. 영사기도 조명의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다. 텔레비전과 컴퓨터, 우리들의 손에 들려 있는 스마트폰도 조명의 역사를 빛낸 물건이다. ■ 과유불급, 박물관의 철학을 담다 ‘빛 공해 전시관’은 조명박물관의 철학을 보여주는 성찰의 공간이다. 인공 불빛이 발명되고 진화하면서 인류는 드디어 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그 대신 어두움을 몰아낸 불빛은 사람은 물론이고 나무와 곤충과 새를 비롯한 동식물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고 있다. ‘공해’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과잉 조명에 대한 성찰과 반성으로 조명박물관은 2005년부터 해마다 ‘빛 공해 사진 UCC 공모전’을 열고 수상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말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전시명을 ‘빛공해 과유불급 이야기’로 정한 박물관의 속 깊은 생각이 느껴진다. 상설 전시 ‘빛과학관’은 과학이 들려주는 빛 이야기 공간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접하고 있지만 빛에 대해 아는 지식은 너무나 적습니다. 빛의 본질을 재미있고도 쉽게 알아가는 곳입니다.” 빛의 굴절, 빛의 분산, 빛의 직진, 빛의 색 혼합 같은 기본적인 빛의 원리와 성질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빛에 대한 전문가가 된 느낌이다. ‘라이팅빌리지’는 어린 관람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올빼미일까, 부엉이일까, 커다란 눈을 가진 새가 호롱불을 바라보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니 호롱불이 웃고 있는 아이 모습이다. “상설 전시장에 있는 조명 유물을 캐릭터화해 어린이들이 역사 속의 조명을 보다 쉽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게 만든 캐릭터 체험 놀이공간입니다.” ‘라이터 로드’는 빛 상상 공간이다. 빛의 다양한 모습을 연출한 공간이 미로처럼 구성돼 아이들에게 마법의 집처럼 즐거움을 선사한다. 각 공간을 지날 때마다 다른 주제를 가진 빛의 모습을 상상하고 만날 수 있다. 소나기를 뿌리는 먹구름 속에서 번갯불이 번쩍인다. ‘폭풍전야’는 자연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준다. 지하 1층은 더욱 신비롭고 즐거운 공간이다. ‘스스로 체험 학습실’은 세 살 이상의 모든 관람객이 여러 개의 공간마다 설치돼 있는 체험 안내문을 읽고 스스로 체험학습을 즐길 수 있다. 라이트 테이블, 빛공해 피해 동식물 종이접기, 박물관 유물 컬러링을 체험할 수 있다. ■ 기이한 하나, 익숙한 둘 조명박물관은 조명문화의 발전과 빛과 예술의 새로운 만남을 위해 2009년부터 시작한 ‘라이트아트 공모전’을 열고 있다. 짐작하듯 ‘라이트아트’는 창의적인 작가들을 선정해 여는 ‘빛의 축제’다. 박물관은 빛을 주제 및 소재로 하는 작가들을 발굴하고 이들과 교류하며 빛 예술의 세계를 확대하고 있다. 선정된 작가에게 활동 지원비와 조명박물관에서 개인 전시 및 외부 전시 출품 기회와 홍보도 지원해 준다. 2025년 제14회 ‘필룩스 라이트아트’ 전시 공모에서 선정된 신예진 작가의 개인전 ‘기이한 하나, 익숙한 둘’은 관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약 자연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설계한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빛이 부서지는 천장 아래에 나무, 미디어, 금속이 얽힌 숲이 나타난다. 두 번째 공간에 들어서니 더욱 놀라운 풍경이 펼쳐진다. 사마귀의 형상을 품은 거대한 나무가 움직인다. 엔진을 설치해 안개와 붉은 조명에 반응하며 생명체의 내장을 지나가는 듯한 모습은 무섭다. 이 작품의 메시지를 구안나 관장이 풀어준다. “신 작가의 작업은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생명 그 자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제안합니다.” 조명박물관이 서울시와 공동으로 주최하는 ‘빛공해 공모전’은 특히 주목되는 사업이다.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빛공해 공모전’은 빛의 공해를 바로 알고 좋은 빛, 상생의 빛, 건강한 빛을 추구하기 위해 2005년부터 실시된 친환경 공모전입니다.” 우리 생활의 공해의 빛, 생명의 빛, 문명의 빛을 주제로 사진 또는 UCC 응모작을 공모해 건강한 조명 문화가 미래 조명문화임을 꾸준하게 알리고 있는 조명박물관의 발걸음이 미덥다. ■ 겨울밤에 주고받은 선물 매년 이맘때면 조명박물관은 크리스마스 특별전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지난 몇 년 동안 어떤 주제로 관람객을 맞이했을까. ‘꿈꾸는 크리스마스’(2022년), ‘크리스마스 숲을 지나’(2023년), ‘두근두근,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2024년)로 이어졌다. 올해는 어떤 주제로 관람객을 맞이할까. “올해 크리스마스 특별전은 ‘겨울밤에 주고받은 선물’인데 세계 여러 나라의 크리스마스 풍습을 소개하는 체험형 전시입니다.” 관람객은 마치 세계 여행자가 된 듯 각 나라의 전시 공간을 돌며 워크북에 스탬프를 찍고 북극곰에게 어떤 선물을 줄 수 있을까를 함께 고민하는 체험형 전시다. 잠시 한여름에 열리는 호주의 크리스마스 풍경에 빠져본다. 거대한 고양이가 등장하는 아이슬란드의 전설, 비밀의 나라 산타의 방까지 보여주는 전시는 세계 곳곳의 따뜻한 겨울밤을 담고 있다. “‘겨울밤에 주고받은 선물’ 전시에서는 세계 곳곳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따라가며 그 속에 담긴 웃음과 설렘, 그리고 사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아이와 어른 모두가 마음의 선물을 주고받는 순간을 느끼며 겨울밤의 빛처럼 따뜻한 추억을 만들어 보세요.” 조명박물관은 눈 오는 겨울밤 외딴집에서 비치는 불빛처럼 우리에게 따뜻한 추억과 훈훈한 감동을 선사하는 박물관이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3.남양주 프라움악기박물관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11월17일 오후 2시, 남양주시 와부읍 한강변에 자리한 프라움악기박물관 콘서트홀에 ‘섬집아기’가 울려 퍼졌다. ‘2025 이흥렬 기념 음악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며 어머니의 사랑을 되새긴다. ‘어머니 마음’의 작곡가 이흥렬(1909∼1980)의 음악이 오랜 생명력을 갖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해요.” 음악회 사회자로 나선 80대의 아들 이영조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장의 해설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 음악으로 감동을 나누며 누구나 주인공이 되는 집 ‘한국의 슈베르트’로 불리는 이흥렬 탄생 117주년 기념 음악회가 열린 프라움악기박물관(관장 김정실)은 2011년 9월 개관한 1종 전문박물관이다. 이흥렬의 유족들이 뜻을 모아 유품을 박물관에 기증한 2014년부터 해마다 작곡가의 생일인 11월17일 박물관 콘서트홀에서 기념 음악회를 열고 있다. 정겨운 가곡을 듣고 부르며 특별한 시간을 보낸 탓일까. 1층에 전시된 이흥렬의 유품들과 마주하는 시간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작곡가가 생전에 사용했던 낡은 피아노와 친필로 그린 악보 및 가곡집을 살펴보며 음악이 전해주는 따뜻한 힘을 생각한다. 프라움악기박물관은 국내 최초로 개관한 서양 악기 박물관답게 설립 목적과 지향점이 분명하다. “프라움악기박물관은 16세기부터 현재까지 제작, 연주된 서양의 다양한 건반악기,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 등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전시함으로써 서양 음악의 아름다움을 악기를 통해 소통하고 감동을 나누고자 합니다.” 프라움악기박물관에서 펴낸 ‘악기, 그 아름다운 비밀’이란 책자에 실린 설립자 김정실 관장의 말이다. ‘프라움(PRAUM)’이란 이름에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프라움은 자부심을 뜻하는 영어 ‘프라이드’와 공간을 뜻하는 독일어 ‘라움’을 결합한 것입니다.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과 음악을 전공하는 음악학도 등 음악을 즐기며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서양 악기와 음악을 통해 감동을 나누고 자랑스러운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음악을 통해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감동을 나누는 박물관을 설립한 설립자의 생각이 궁금하다. 음악을 좋아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자란 설립자 김정실 관장은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와 친숙해 악기박물관을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전시실 곳곳에 전 세계 이름난 박물관을 탐방하며 진귀한 서양 고전 악기를 직접 수집해 악기박물관을 세운 설립자의 정성이 느껴진다. ■ 멀리 오래가는 클래식의 힘 “클래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아름다움을 발합니다. 정밀한 세공으로 다듬어진 악기는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내밀한 소설처럼 이야기가 담긴 클래식을 품고 있습니다.” 설립자의 각별한 악기 사랑은 한국 최초의 악기박물관 탄생의 출발점이다. 김 관장의 말처럼 프라움악기박물관은 ‘음악을 듣고, 만지고, 느끼고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문화공간’이다.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명품 악기들을 만나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특별하다. 초등학교 교실에 울려 퍼지던 풍금을 떠올리며 건반악기부터 살펴본다. 일렬로 나열된 건반 또는 버튼을 이용해 소리를 내는 건반악기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팽팽한 줄을 울려 소리를 내는 하프시코드와 피아노는 ‘현명악기’로 불리고 공기를 울려 소리를 내는 오르간이나 아코디언은 ‘기명악기’로 불립니다.” 악기 몸체를 울려 소리를 내는 첼레스타와 전기에너지를 이용해 소리를 내는 신시사이저도 건반악기에 포함된다는 사실도 확인한다. 하프시코드는 또 어떤 악기일까. “해머가 현을 쳐서 소리를 내는 피아노와 달리 하프시코드는 현을 뜯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피아노보다 몸체가 작지만 키는 크게 보이는 하프시코드의 생김새가 귀엽다. 1808년 영국에서 만들어진 그랜드 포르테 피아노는 박물관을 대표하는 귀한 악기다. “영국의 유명한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에드워드 벤저민 브리튼이 1961년까지 소유했던 악기여서 더욱 가치가 높습니다.” 수선화 문양의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업라이트 피아노는 얼핏 조각 작품품처럼 보이는 흥미로운 유물이다. 2층 전시실에는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하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를 만난다. 진동을 이용해 소리를 내는 현악기의 역사가 무척 오래됐음을 배운다. 성서와 그리스신화에도 등장하는 하프의 우아한 모양이 관람객의 눈길을 끈다. “이보다 더 오래된 현악기는 기원전 3000년경으로 추정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리라’라는 악기입니다.” 1800년대 후반 영국에서 제작된 ‘콘서트 싱글 액션 하프’의 머리 장식이 왕관 모양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아래에 양 머리와 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에서 기둥으로 사용된 여인상이 조각돼 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품격 있는 악기에 깃든 장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자개를 사용해 나비 문양을 상감으로 장식한 1920년대 만돌린과 전복 상감으로 지판을 장식한 2004년 제작한 만돌린을 비교해 보는 시간도 재미있다. 이름은 들어봤으나 생김새조차 제대로 몰랐던 비파를 가까이서 살펴보는 특별한 기회도 가진다. 스트라디바리의 명기 ‘메시아’를 복제한 프랑스 장인 장 밥티스트 비욤의 바이올린은 특히 주목해야 할 전시물이다. 명품을 만들어낸 위대한 장인의 섬세한 손길을 눈으로 확인하는 시간이 즐겁다. 물론 한국의 장인이 제작한 아름다운 바이올린도 여러 점 전시돼 있으니 어떤 차이가 나는지 비교하며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다. 박물관에는 현악기들을 어떻게 만드는지 제작 과정을 볼 수 있고 직접 연주할 수 있는 체험 공간도 있다. ■ 음악으로 너와 나를 잇다 2025년 진행한 프라움 문화대학의 주제는 ‘바로크 시대로 떠나는 행복한 문화 여행’이었다. 쳄발리스트 송은주 예술 총감독의 ‘하프시코드와 바로크 시대’와 윤철희 국민대 교수의 ‘작곡가와 피아노의 관계–포르테피아노와 모던피아노’ 같은 흥미로운 강좌가 이어졌다. ‘격이 있는 강의와 나눔’은 프라움악기박물관이 추구하는 경영철학이다. 2025년 ‘KBS프라움 인문학 최고경영자과정’을 KBS문화예술과학원과 협업해 진행한 기획도 같은 맥락이다. “K-인문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인문학을 널리 알리고자 시작했습니다.” 국립대 인문학 교수진과 유명 음악가들이 강좌를 진행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특별 기획전시 ‘바로크, 누구나 바로! 바로!’전은 17세기부터 18세기 중엽에 이르는 바로크 시대의 악기와 음악을 조명하는 전시였다. 현악기 제작자인 마에스트로 김남현과 쳄발리스트 송은주 총감독은 프라움악기박물관을 생동감 있게 만드는 주역이다. 서울시합창연합회장이자 건국대 겸임교수인 권동현 지휘자의 합창단 운영도 있다. 매월 넷째 주 토요일 수준 높은 공연도 펼쳐진다. 토요 콘서트는 빼놓을 수 없는 프라움악기박물관의 자랑이다. 2층의 음악홀에서 매월 넷째 주 토요일에 열리는 콘서트는 세계적 피아니스트 연주회로 그 진가를 선사한다. 공연이 끝난 후에는 연주자들과 함께 다과를 들며 음악과 인생을 이야기한다. ■ 매혹적인 악기들의 집 프라움악기박물관의 고풍스러운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흐, 모차르트, 쇼팽, 베토벤 같은 위대한 음악가들이 음악을 들으며 그들이 사용한 악기를 만난다. 매혹적인 악기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선율에 취해 창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는 시간은 특별하다. 한강 풍경은 어느 계절에 찾아도 좋지만 철새들의 군무를 볼 수 있는 초겨울이 가장 아름답다. 박물관과 미술관을 순례하기에 좋은 계절이 찾아왔다. 프라움악기박물관을 비롯해 실학박물관, 남양주역사박물관, 미호박물관, 우석헌자연사박물관, 왈츠와 닥터만 커피 박물관, 모란미술관, 한강뮤지엄 등 아름다운 박물관과 미술관이 즐비한 남양주로 여행을 떠나자.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2. 수원 해우재

화장실 문화를 바꾼 도시가 있다. 수원시는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공공화장실은 지저분하다는 통념을 깨고 화장실문화를 바꾸고 꽃피운 발상지다. 수원시 이목동에 화장실 박물관 ‘해우재(Mr. Toilet House·관장 이원형)’가 있다. ‘근심을 해결하는 집’ 해우재는 똥박물관을 비롯해 문화센터와 문화공원을 갖추고 있는 세계 최고 최대의 체험학습 공간으로 국내외 방문객들이 즐겨 찾는 관광명소로 사랑을 받고 있다. 세계 화장실문화를 선도하는 해우재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 개똥이에서 ‘미스터 토일렛’으로 문화센터에서 해우교를 건너 황금똥교를 지나면 보이는 해우재 앞 벤치에 점잖은 신사가 앉아 있다. 수원 사람 심재덕(1939~2009)의 동상이다. 뒷간에서 출생해 유년 시절 ‘개똥이’로 불렸던 해우재 설립자 심재덕의 생애가 궁금하다. “설립자 심재덕 의원님은 특별한 태생 장소 때문인지 화장실에 대한 애착이 유별났다고 해요.” 해우재에서 교육과 홍보를 담당하는 이정아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수원문화원장을 지내며 화성행궁 복원운동을 주도하던 심재덕은 1995년 민선 1기 수원시장에 당선돼 공공화장실에 주목합니다. 모두가 만류한 ‘2002 한일 월드컵 수원 유치에 성공한 것을 계기로 화장실을 주목하게 됐다고 해요.” 이때부터 심재덕은 깨끗하고 이용하기 편리한 화장실을 만들자는 ‘화장실 문화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한다. 광교산 길목에 있는 ‘반딧불이화장실’은 심재덕의 철학을 잘 보여주는 수원시 제1호 공공화장실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공원과 광장을 비롯한 시내 곳곳에 깨끗하고 산뜻한 화장실이 들어섰다. 공공화장실 건립에 많은 돈을 쏟아붓자 비난하는 여론도 일어났지만 심재덕은 이에 굴하지 않고 뚝심 좋게 밀어붙였다. 공공화장실의 관리에 정성을 쏟아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니 시민들의 태도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 해우재는 ‘아름다운 화장실 혁명’의 선구자 심재덕의 집 아름답고 깨끗한 화장실은 수원시민의 긍지이자 자랑이 됐다. ‘아름다운 화장실 혁명’의 선구자 심재덕은 운동의 범위를 넓혔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국제사회에서 거의 다루지 않던 화장실 문제를 공론화하고 그 문제 해결을 위해 전 세계가 힘을 모아야 한다며 민간 국제기구인 ‘세계화장실협회(WTA)’를 창립합니다.” 심재덕의 활동을 주목한 외국 인사들은 ‘미스터 토일렛’이란 애칭으로 그를 부르기 시작한다. 심재덕은 세계화장실협회 창립을 기념하고자 30여년간 살던 집을 허물고 변기 모양의 집을 짓고 그 이름을 ‘해우재’라 했다. 2007년 11월11일 완공된 해우재는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화장실이 얼마나 중요한 공간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시장님이 돌아가신 후 유족들이 고인의 뜻을 받들어 2009년 7월 수원시에 기증했고 수원시는 그 뜻을 기리기 위해 리모델링을 거쳐 ‘수원시 화장실문화 전시관 해우재’로 재탄생시켜 2010년 10월부터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하고 있습니다.” 설립부터 이제까지 심재덕 시장의 뜻을 계승해 활발한 사업을 펼치고 있는 이원형 관장의 말이다. 해우재 상설전시실은 속이 알찬 공간이다. “관람객들은 공공시설로 지은 건축물로 여겼던 해우재가 설립자의 집을 개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랍니다.” 설립자가 가족들과 한동안 살았던 집의 거실 한가운데 화장실을 배치한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 일반 박물관보다 규모는 작지만 재미난 공간 배치와 충실한 내용이 돋보인다. 한중일 세 나라 화장실의 차이는 무엇일까. 역사를 더듬고 화장실에 관련된 과학을 배우는 시간이 유익하다. 사진과 설명으로 화장실문화를 바꾼 수원시 화장실 문화운동의 전개 과정을 찬찬히 살펴본다. ■ 황금똥은행 2025 기획전시 ‘황금똥은행전’과 해우재 기획전시 ‘현재, 화장실, 미래전’은 12월 말까지 열린다. 전시실에서 자주 마주치는 단어가 ‘황금똥’이다. “지난 어린이날 해우재 ‘황금똥은행’에서 발행한 어린이 통장입니다.” 통장을 펼쳐보니 “미래를 함께하는 건강한 은행” ‘황금똥은행’이라 쓰여 있다. 통장에 아이의 성명과 자신의 키, 몸무게, 똥 색깔을 써넣도록 빈칸을 두고 ‘브리스톨 대변표’를 실어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똥을 관찰하도록 유도한 것은 좋은 아이디어다. 제1형 견과류처럼 분리된 단단한 덩어리의 형태부터 제7형 단단한 조각이 없는 완전한 액체 상태로 구분해 자신의 똥을 살필 수 있는 기준이 재미있다. “똥이 치료제로 쓰인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인체에 살고 있는 미생물은 90% 이상 장내에 존재하고 질병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지요. 똥에서 1천80종의 미생물이 검출됩니다. 대변 이식술은 장내 미생물의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을 대상으로 건강한 사람의 똥에서 검출한 미생물을 직접적으로 이식하는 시술입니다.” 해우재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사람답게 들려주는 내용이 똥박사 수준이다. “지금 똥이 필요하신가요. 질병에 걸려 급히 건강한 똥의 이식이 필요한 경우 황금똥은행에서는 건강한 똥을 대출해 드립니다.” 어린이 통장은 황금똥을 누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재미있게 알려준다. 해우재에서는 해마다 ‘해우재 황금똥 그림잔치’를 열고 있다. 전시실에서 올해 ‘제13회’를 맞은 황금똥 그림잔치 수상작을 살펴보며 웃음 짓는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상상력이 빛나는 즐거운 공간이다.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똥 체험관이다. 체험관을 둘러보는 유치원 아이들의 표정이 밝다. ‘신비로운 몸속 여행’을 떠나면 아이들도 사람의 몸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정직한지를 깨닫게 된다. ‘황금똥 물렁똥’은 무엇을 먹으면 황금똥을 누고 무엇을 먹으면 물렁똥을 누는지 쉽고 재미있게 알려준다. ‘뿌글뿌글 뿡뿡 황금똥이 나와요!’는 변비로 고생하는 어른들이 부러워할 쾌변에 관한 이야기다. ‘유익한 똥 이야기’는 어른들에게도 유익한 내용이다. 아이와 함께 ‘재미있는 똥 영상’을 관람하고 화장실 에티켓을 이야기해 보는 것도 좋겠다. 해우재 문화센터 1층 똥도서관에 들어서면 사방이 온통 제목에 똥이 들어간 책이 꽂혀 있다. 책을 싫어하는 아이도 똥 이야기책은 좋아한다니 꼭 찾아봐야 할 소중한 공간이다. ■ 화장실 문화공원 전시실을 나와 공원을 산책하며 조형물을 살펴보는 시간도 즐겁다. 공원에는 온통 똥 누는 사람들이다. 신사 옆에 앉은 꼬마는 바나나 같은 황금똥을 누고 있다. 금색을 칠한 똥이 바나나 같다. “관람객들이 하도 많이 만져 닳았어요.” 공주도 똥을 누고 신사도 똥을 누고 있다. 똥 누는 사람들 속에 간밤에 오줌을 싼 벌로 키를 쓰고 한 손에는 바가지를 들고 서 있는 아이의 표정이 재미있다. 공원을 둘러보다 문득 우리 화장실 역사가 아주 오래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백제와 신라 시대 사람들이 사용하던 변기의 이름이 ‘호자’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삼국 시대 우리 조상들의 생활상을 알게 해주는 화장실 모형이 눈길을 끈다. 노둣돌은 신라 시대 귀족 여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우리 민족도 오래전부터 수세식 변기를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왕궁리 화장실은 7세기(백제 무왕·600~641년) 무렵에 만들어진 최초의 공중화장실이다. 매화틀은 임금님용 이동식 화장실답게 장식이 고급스럽다. 서양의 화장실 문화도 재미있다. 고대 로마에서 사용한 수세식 변기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봐도 수준급이다.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걸상식 좌변기를 사용했습니다.” 양산과 굽이 높은 구두가 똥오줌을 피하기 위한 물건이라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서양 변기의 변천사를 살펴본다. 공원을 한 바퀴 돌면 화장실의 역사와 문화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똥을 통해 건강한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특별한 박물관 해우재는 화장실문화를 바꾼 사람 심재덕의 생각을 배우는 즐거운 공간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1. 고양 중남미문화원박물관

“보석처럼 빛나는 사설 박물관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모자를 벗고 깊은 경배를 드렸다. 그러나 중남미박물관을 방문했을 때는 모자를 벗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대 마야 문명으로부터 시작해 오늘의 중남미문화에 이르기까지 내 눈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공간과 시간의 울타리를 훨씬 뛰어넘은 문화의 위대함이요, 소중함 그 자체였다. 더구나 그것을 한 개인의 힘으로 해낸 것이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고 이어령 교수가 한 말이다. 그를 놀라게 한 ‘한 개인’은 중남미문화원박물관을 설립자 홍갑표 전 이사장을 가리킨다. ■ 문화는 나눠야 빛난다 단풍이 물드는 숲에 싸인 중남미문화원박물관의 풍경이 고즈넉하다. 고양시 덕양구 고양향교 옆에 자리한 중남미문화원박물관은 1994년 설립됐다. 중남미문화원박물관을 찾으면 누구나 그 규모 및 소장품을 보며 감탄한다. 홍 전 이사장은 33년간 중남미 멕시코, 코스타리카, 도미니카공화국, 아르헨티나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이복형 전 대사의 부인이다.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은 그는 골동품 애호가로 주말마다 골동품 가게와 벼룩시장을 돌며 유물을 수집한다. “은퇴할 무렵 박물관 설립을 결심하고는 더 열심히 유물과 미술작품을 수집했습니다.” 벼룩시장에 나오는 골동품에 매료돼 게릴라들이 총격전을 벌이는 산속으로 골동품 구하겠다고 쫓아가기도 할 정도였다. 이렇게 모은 유물을 수십차례에 걸쳐 모두 컨테이너에 실어 배로 들여왔다고 하니 설립자의 정성과 열정이 놀랍다. 그뿐만이 아니다. 설립자는 이 전 대사가 받은 퇴직금 2억원을 몽땅 박물관 건축비로 사용하고 자신이 중남미에서 가발과 속눈썹 사업으로 번 돈도 모두 전시 시설 건립에 쏟아부었다. 중남미문화원은 설립자가 수집한 예술품에 중남미 10여개국으로부터 기증받은 다양한 전시물이 더해져 볼거리가 풍성하다. 박물관으로 시작했던 중남미문화원은 미술관과 조각공원, 종교전시관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마야, 아스테카, 잉카의 고대 문명과 스페인 식민 시대 유물 3천점, 각종 중남미 역사·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 아시아 최초의 중남미박물관 중남미문화원은 아시아 최초로 중남미 문화와 역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립 박물관이다. 중앙홀에 들어서니 뜻밖에 분수대가 있다. “스페인식 성당이나 큰 저택에서는 중앙홀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분수대를 즐겨 만들었습니다.” 이 박물관에서만 14년 연속으로 근무한 이지훈 학예사의 설명이 재미있다. 사면의 벽에는 성화와 성물, 조각품이 배치돼 시간여행을 떠나게 해 준다. 홀을 천천히 둘러보며 중남미의 이국적인 정취에 취해 본다. 150년 된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는 가끔 열리는 음악회 때 사용되는 유물이다. 중앙홀 천장을 올려다보니 금빛 태양상이다. “중남미인들에게 태양은 신봉의 대상이었습니다. 주변으로 난 창이 중앙홀 내부에 자연 채광이 이뤄지게 설계됐지요.” 이 중앙홀도 설립자 홍 전 이사장이 직접 설계한 것이라고 한다. 박물관에서 가장 소중한 유물은 어디에 배치돼 있을까. 아마 관람객이 가장 먼저 들르는 제1전시관일 것이다. 과연 토기 한 점에 엄청난 사연이 들어 있다. “BC 3년경 멕시코와 페루 고원지대에 정착한 인디오들이 사용했으며 가마솥에서 구운 것입니다.” 마야 토기와 코스타리카, 파나마 일대의 초로테가 토기 등 천년이 넘었으나 옛모습을 잘 간직한 유물이다. 남녀 모습의 토우가 신라와 비슷해 반갑다. 중앙아메리카 엘살바도르 지역에서 출토된 토우는 당시 인디오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는 유물이다. 얼굴에서 우리와 골격이 비슷한 몽골계통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는 점이 흥미롭다. 725년경 멕시코 콜리마에서 나온 ‘다산의 여신상’이다. 여신의 풍만한 허리에 열매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아이들의 모습이 재미있다. “머리 위의 물고기가 다산을 상징하는데 다산 기원은 농경사회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머리 위에 불을 피우는 화로를 인 불과 시간의 신 ‘우에우에테오틀’은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노인의 모습이다. 이지훈 학예사의 설명이 흥미롭다. 우리 조상과 중남미 원주민 조상 뿌리가 북방계 몽골계통으로 같다는 사실이 놀랍다. BC 3000년경 인디오와 아스테카인들이 만든 토기를 살펴본다.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중남미 유적이다. “콜럼버스 이전 시대 유물은 대부분 종교와 연관이 있습니다. 여기서 종교는 모든 자연을 신으로 숭배하는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등을 의미합니다.” ■ 유물에 깃든 옛사람들의 이야기 강물에 뛰어들어 악어를 잡는 재주가 뛰어난 재규어 형상의 조각이 여럿이다. 여기에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 “가장 오래된 인류 신앙의 하나인 애니미즘은 신석기 시대 농업의 시작과 함께 자연물을 숭배하게 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재규어는 인디오들에게 지배적인 영향을 끼친 동물이지요.” BC 1000년 무렵부터 생산된 세련된 토기도 예술품이다. 중남미에서 번성한 아스테카와 마야는 중남미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전시관에는 남미 북단 아마존 지역에서 카누를 이용해 이주, 현재의 도미니카공화국 일대 문화를 번성시켰던 타이노족의 의례용 나무 의자 두오와 도끼, 방망이 등과 특히 멕시코 톨텍 왕조의 석조물이 전시돼 있다. 스페인과의 접촉 이전에는 카사바가 주식이었으나 이후 옥수수를 재배했다. 메타테는 콜럼버스 이전 시대부터 지금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는 절구의 일종이다.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갈돌, 갈판과 비슷해 눈길을 끈다. “주로 말린 옥수수나 씨앗, 곡식을 곱게 가는 데 사용하거나 반죽을 만드는 데도 사용합니다.” 가면이 어쩌면 이처럼 다양할까. “우리는 생존하는 한 각자의 이름과 가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이들과 공존하며 결국 가면이 곧 우리의 진정한 모습임을 발견하게 된다.” 멕시코의 위대한 시인 옥타비오 파스의 말을 입증하듯 제3전시관은 온통 가면이다. “다양한 색채의 가면들은 축제, 카니발, 종교의식 등에 사용됐으며 성서 속 인물, 천사, 쌍가면, 각종 동물과 곤충, 악마 등 모양이 너무나 다양합니다.” 틀라틸코는 마야 문명의 대표 가면으로 젊은 시절과 노인, 사후의 모습, 즉 인간의 일생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강물의 악어를 사냥하는 날쌔고 강한 재규어의 벌린 입속에 전사의 얼굴이 들어있는 재규어 전사 가면이 멋지다. 긴 뿔과 뾰족한 송곳니가 달린 악마의 가면은 쳐다만 봐도 무섭다. 반면 위촐 구슬 가면은 너무나 정교한 문양과 화려한 색상으로 사람을 놀라게 한다. ■ 우리 가까이에 있는 먼 나라의 놀라운 풍경 식민기 이후 생활용품을 전시하고 있는 제4전시관에 들어서니 마음이 편안하다. 일상용품을 전시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대농장의 목동들이 사용하는 마구, 가축들의 소유주 머릿글자를 새긴 대형 철제 인두,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다수 배출한 중남미 문학을 상징하는 수타자기, 선진 자본의 착취를 상징하는 멍에와 카리브해 청새치를 비롯해 원두 분쇄기, 다리미, 투박한 우리와 달리 거리의 구두닦이 통이 너무 우아하다. 라틴음악의 대표 악기 반도네온, 삼포냐, 아요요테, 봄보, 트롬페타, 차랑고 등도 재미있는 볼거리이다. 발랑간단은 18세기에서 19세기에 아프리카 혈통의 여성 노예들이 허리에 매단 장식품인데 점차 작아져서 팔찌와 목걸이, 브로치가 됐다. 노예들이 사용한 것이지만 공예품들이 너무나 우아하고 정교해 감탄하게 만든다. 중남미문화원으로 들어서면 이국적인 분위기가 충만하다. 아름답게 가꾼 정원을 걸을 수 있고 책이나 TV에서만 봤던 잉카·아스테카·마야 문명의 유물을 맘껏 볼 수도 있다. 지구 반대편 나라들의 빼어난 문화를 맘껏 느낄 수 있는 곳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0. 광명 기형도문학관

기형도문학관 벽에 그려진 시인의 모습을 살펴본다. 문학관이 개관한 때를 나타내는 ‘기형도 2017~’이라는 글자와 시인이 이 땅에 살았던 시간을 나타내는 ‘1960~1989’라는 숫자가 눈길을 끈다. 그런데 시인의 머리에 앉은 노란 고양이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 청춘의 시인을 만나는 공간 기형도는 한국 문단에서 특별한 존재다. 생전에 한 권의 시집도 내지 못하고 29세로 요절했으나 여전히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윤동주 시인을 닮았다. 1989년 5월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36년이 흐른 지금도 잘 팔리는 스테디셀러다. 문학관 마당에 세운 대리석 조형물을 살펴본다. 타일에 새겨진 활짝 웃고 있는 시인의 얼굴이 풋풋하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로 이어지는 그의 시 ‘빈집’과 왼손으로 턱을 괴고 원고를 쓰고 있는 시인의 사진과 그의 짧았던 생애를 알려주는 글이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로 시작되는 ‘엄마 걱정’이란 시를 읽으며 소년 기형도의 모습을 상상한다. 기형도를 우리 시대에 살아 숨 쉬게 하는 기형도문학관은 언제 어떻게 세워졌을까. 문학관 설립 이전부터 광명시에는 기형도의 존재를 시민들에게 꾸준하게 알리던 기관과 단체가 여러 개 존재했다. 기형도기념사업회의 ‘시길 밟기’와 광명문화원의 ‘추모시 낭송회’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광명시 중앙도서관에 ‘기형도 특별 코너’를 설치하고 광명시민회관에서 추모 공연을 벌인다. 하안문화의집에서 ‘이야기 콘서트’와 시극을 공연하고 광명문화학습축제에서 ‘시인 다방’을 운영한다. ‘기형도 시인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한 운산고등학교도 빼놓을 수 없다. 시민들의 활발한 활동을 바탕으로 광명시도 움직인다. 기형도 시비를 건립하고 기형도문화공원을 조성하며 시인을 기념하는 사업과 행사를 펼친 것이다. 2015년, 마침내 광명시는 기형도 시인을 기리는 문학관을 짓기로 결정한다. 시인을 기억하는 인사들과 유족이 함께 ‘시인 기형도를 사랑하는 모임’을 결성해 뜻을 하나로 모아 2017년 11월 마침내 기형도문학관을 개관한다. 2018년 3월 경기도 제1호 공립문학관으로 등록된 기형도문학관은 현재 광명시 출자 출연기관인 (재)광명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 푸른 문, 젊음의 방 푸른색은 기형도를 상징하는 색이다. 푸른 문에 들어서면 기형도의 일생과 문학을 알려주는 공간이 시작된다. 여러 개로 나뉜 상설전시실의 공간이 시적이다. ‘시인 기형도’를 시작으로 ‘이야기 하나-유년의 윗목’, ‘안개의 강’, ‘이야기 둘-은백양의 숲’, ‘이야기 세-저녁 정거장’, ‘빈집’, ‘더 넓게 더 멀리’, ‘기형도 시 필사하기’, ‘시인들, 기형도를 읽다’로 이어진다. 처음 마주하는 전시물이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로 번역된 시집이다. 시인이 사망하고 두 달 뒤 출판된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살펴본다.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라는 평론가 김현의 절절한 발문은 오래도록 화제가 됐다. 1주기 때 펴낸 ‘짧은 여행의 기록’과 ‘기형도전집’도 살펴본다. 시인의 생애를 알려주는 유물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풍성하다. “공부만 잘했던 것이 아니라 노래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렸어요.” 김재숙 해설사의 소개말을 들으니 다재다능했던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 등단작인 ‘안개’의 무대가 안양천이라는 사실도 새롭다. 동아일보사 마크가 찍힌 상패에 또렷하게 새겨진 기형도란 시인의 이름을 확인한다. 공무원인 아버지와 일찍 세상을 떠난 누나를 그리워하는 시를 소리내어 읽어 본다. 연세대에 재학하던 시절에 청년 문사로 우뚝했던 사실을 알려주는 상패와 작품을 발표했던 교지도 여러 권 보인다. 동인들과 어울리며 펴낸 빛바랜 책자들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우등상장과 개근상 등 수를 헤아리기 힘든 상장이 이어진다. 아들이 남긴 물건을 매만지며 아들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해 가슴이 먹먹하다. 시인이 남긴 사랑의 흔적을 혹 찾아볼 수 있을까. 1982년 시인이 어느 여성에게 준 ‘연서’가 남아 있다고 알려준다. 손바닥만 한 종이에 시인은 무슨 사연을 담았을까. “안양에서 방위병으로 근무하며 안양 수리시 동인 활동을 하던 시기에 남긴 것입니다. 기형도 시인은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술자리에 지인들과 함께 어울리곤 했다고 해요. 술집에서 술값을 내준 여성 회원에게 시를 써 준 편지가 세 점 있습니다.” 1980년대의 어두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작고 푸른 방에 들어선다. 발길을 멈추고 잠시 희망을 찾아 몸부림쳤을 시인의 모습을 그려본다. 강성은, 황규관 등 젊은 시인들의 목소리로 들려주는 기형도 시인의 시가 새롭게 다가온다. 시인과 가까웠던 문인들이 추억하는 기록 영상물과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시인의 시를 편히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한 문학관의 기획력이 돋보인다. 기획전시실에는 무엇을 전시하고 있을까. 작가 이완이 풀어내는 1980년대 풍경이 정겹고 재미있다. 자유의 여신상, 아톰, 소니 텔레비전, 대법전, 노래 테이프 등 그 시대를 보여주는 물건들이 새롭게 다가온다. 흑백사진과 이발소에 걸려 있었을 것 같은 풍경화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기획전 ‘바람은 그대 쪽으로’는 기형도 시인이 1986년 ‘시운동’ 8집에 발표한 ‘바람은 그때 쪽으로’를 모티브로 한 것이란다. 다목적실과 도서 공간, 조용히 책 읽기에 좋은 2층의 북카페도 마음에 든다. 강당과 창작체험실이 있는 3층도 시민들이 애용하는 공간이다. ■ 기형도 시인학교 ‘기형도 시인학교’는 무엇을 전달할까. “기형도 시인학교는 문학관의 교육 기능을 강화하고 시민들이 일상에서 문학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마련된 프로그램입니다. 시 창작과 감상, 비평 등 다양한 관점에서 시문학을 접할 수 있도록 강연, 연계 특강, 워크숍 등으로 구성돼 있지요.” 이장근 시인의 동시반 ‘시의 정원’과 강성은 시인의 시 창작반 ‘시의 오솔길’ 그리고 이수명 박소란 안현미 시인이 함께하는 시 합평반 ‘시의 숲길’과 하혁진 평론가의 문학 평론반 ‘사이의 마음들-관계와 감정으로 쓰는 평론’ 같은 프로그램이다. 문화 소외계층을 위한 전시 투어 및 창작 프로그램 ‘너와 나의 시(詩)선’ 워크숍도 진행됐다고 한다. 시인의 작품이 동시대 시인과 작가들의 창작 원천이 됐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김영승, 나희덕, 박덕규, 송재학, 오규원, 이문재, 이상희, 임동확, 진은영, 채호기, 최하연, 함성호, 황인숙 등 우리 시대의 시인들이다. 물론 김연수, 김이정, 신경숙처럼 기형도에 힘입어 작품을 쓴 소설가들도 있다. ■ 기형도의 시길을 걷다 세기를 넘고 지역을 넘고 장르를 넘는 기형도 문학의 저력이 무엇일까. “시길 주변에 중앙대 광명병원과 이케아가 있어 시길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문학관을 나와 김지우 과장의 안내로 문학관 옆에 새롭게 조성한 ‘기형도 시길’을 산책하며 대표 작품을 다시 음미한다. ‘질투는 나의 힘’이나 ‘정거장에서의 충고’ 같은 시인의 시를 새긴 시비들이 가로수처럼 서 있다. 문학관을 꼼꼼하게 관람한 덕분일까. 그 사이 기형도의 시가 훨씬 편히 읽힌다. 길 끝에 나타나는 ‘기형도 문화공원’에서 다시 ‘빈방’을 읽어본다. 문학관 가까이에 있는 오리서원과 충현박물관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정승을 지낸 조선의 청백리 오리 이원익 선생을 기리는 공간이다. 보물로 지정된 오리선생의 초상화를 비롯한 귀중한 유물과 인조가 하사한 관감당도 둘러볼 만한 곳이니 함께 찾아보면 좋겠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9. 수원 세주묘엄 박물관

깊은 산속에 들어선 듯 자동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솔향이 가득한 길가에 들국화를 보며 걸으니 먹구름이 개는 것처럼 넓고 환한 공간이 열린다. 수원특례시 팔달구 우만동에 자리한 봉녕사에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박물관이 있다. ‘세주묘엄박물관’은 한국 불교계 최초의 비구니 강사이자 율사로서 비구니 승가의 새 시대를 연 세주당 묘엄(世主堂 妙嚴·1932~2011) 스님을 기념하는 공간이다. “2012년 12월 개관한 세주묘엄박물관은 현대 한국 불교 최초의 비구니 율사 묘엄 스님의 한 생애를 살필 수 있는 곳입니다.” 이기범 학예연구사의 소개말을 들으니 묘엄이란 분이 더욱 궁금해진다. ■ 한 생애를 생생하게 만나는 곳 한국 불교계의 큰어른이자 비구니 승가 교육의 개척자인 한 인물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상설전시실이 아담하다. ‘한국 사찰음식의 재발견’에 사찰음식에 관한 묘엄 스님의 어록이 새겨져 있다. “사찰음식은 기본에 충실한 음식이며 그 기본이란 바로 자연과의 조화다.” ‘자연과의 조화’란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다. 불교도가 아니지만 법명은 들어봤던 고승들과 함께한 스님의 흑백사진을 살펴보는 시간도 즐겁다. “세주 묘엄 스님은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이 함께한 봉암사 결사에 18세의 나이로 동참하고 ‘운허’와 ‘경봉’으로부터 전강을, ‘자운율사’로부터 전계를 받았습니다. 스님은 봉녕사 승가대학을 세워 승가 교육의 기초를 다지고 한국 불교 최초로 비구니 계율 전문교육 기관인 금강율원을 건립해 평생 후학 양성에 힘썼던 분이지요.” 60여년간 계율을 실천하며 정성을 다해 후학을 양성하고 비구니 승단을 중흥시킨 묘엄 스님의 치열한 생애가 유물과 함께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묘엄 스님의 일생을 따라가며 고난의 근현대사와 마주하는 시간도 소중하다.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는 과정도 살펴볼 수 있으니 여성사를 연구하는 이들도 찾아보면 좋은 공간이다. ■ 꽃으로 오시다 묘엄 스님은 한국 불교의 큰어른 청담 스님의 둘째로 태어났다. 스님의 딸로 태어난 사연이 궁금하다. “대를 이어야 한다는 집안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청담 스님은 독신 청정의 계율을 저버린 대가로 이후 혹독하고 치열한 참회정진을 이어가며 수행자의 본분을 찾고자 노력했다고 전해집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까닭에 시대의 격랑을 헤쳐 나가야 했다. “1940년대 초 종군위안부 징집을 피해 당시 청담 스님이 주석하던 대승사로 보내집니다.” 결혼 대신 절을 찾은 것이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묘엄은 성철 스님의 조언과 독려 속에 출가의 길로 들어선다. 출가 후 열정 넘치던 묘엄은 봉암사 결사의 구성원이 돼 한국 불교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기도 했다. 불교계에 남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일이었다. 들불처럼 일어난 변화의 바람은 묘엄 스님의 길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남녀 차별이 존재하던 승단 내 분위기가 변화하며 비구 스승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공식적인 최초의 비구니 교육자로 한국 불교사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 여성의 지위 향상에 힘쓴 교육자 성철 스님이 한국사를 정리해 묘엄 스님에게 가르쳐줬다는 기록물, 아버지 청담 스님이 직접 써 준 글씨 ‘명심(銘心)’, 상좌들의 법명을 지어줄 때 쓴 것으로 전해지는 메모, 폐지를 재활용해 법문을 위해 적은 메모지에서 ‘자연과의 조화’를 실천한 선지식의 단아한 모습을 발견한다. 작지만 품격이 느껴지는 불상은 2003년 달라이라마가 선물한 것이다. 묘엄 스님이 사용하던 돋보기안경과 수첩, 차를 우려 마시던 다구, 매일 마주했을 발우, 겨울에 목을 둘렀던 목도리 등 모두 스님이 일상에서 마주했던 유물이다. 밭을 매던 호미와 화단을 가꿀 때 사용했을 꽃삽, 바느질할 때 사용한 작은 가위, 다기가 놓인 연꽃처럼 생긴 예쁜 찻상도 눈에 들어오는 유물이다. 글씨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던 분답게 여러 자루의 붓과 벼루를 비롯한 문방구도 남겼다. 얼핏 여성과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도리와 집게, 드라이버 같은 공구들도 보인다. 남자의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해결했던 스님의 일상을 상상케 하는 유물이라 더욱 정감이 간다. ■ ‘스님들의 선화(禪畫)와 묘엄 스님’ 10월1일부터 시작된 ‘2025 세주묘엄박물관 하반기 기획전-스님들의 선화와 묘엄 스님’은 작지만 알찬 기획이다. 박물관 영상실에서 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영상 ‘꽃으로 오시다’를 감상하고 기획전을 관람한다. 기획전에 등장한 전시물들은 어떤 사연을 가졌을까. “묘엄 스님께 여러 스님이 선물하거나 봉녕사에 기증한 선화들입니다. 묘엄 스님이 교류한 스님들의 선화 작품을 통해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되새기고 스님들의 차원 높은 선화를 관람객들이 감상하도록 기획했습니다.” 달마도가 눈에 띈다. 자주 봤던 그림과 달리 선이 무척 굵은데 가운데가 희다.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할까. “소공 이명우 스님은 평생 달마도를 그린 달마대사 전문 화가이자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선승입니다. 50년 넘게 달마도를 그려 달마도의 대가로 불리는 선화계의 거목이지요.” 같은 ‘달마도’지만 느낌이 전혀 다른 작품이 보인다. 붓질 두어 번으로 달마대사의 전신을 그려낸 작가의 솜씨가 대단하다. 가을이라 그런지 ‘빈 산에 사람이 없다’는 뜻의 ‘공산무인’이란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수안 스님이 묘엄 스님에게 선물한 그림 속에 나오는 글귀도 한 편의 시다. ‘강이 고요하니 달이 물 위에 있고, 산은 비어 가을빛 정자에 가득하다. 스스로 거문고 타다 절로 그만두니, 처음부터 남이 듣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오.’ 눈을 맑게 씻어 주는 선화에 적힌 글은 마음을 씻어 주는 잠언이다. “난초는 드러나지 않는 골짜기에 나서 사람이 없더라도 꽃을 피운다.” ■ 솔바람 소리에 마음의 문을 여는 곳 가을을 알리는 꽃 무궁화 그림은 19세에 대한제국 황실에서 연 조선 화공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해 고종황제로부터 자질을 극찬받고 진사를 제수받았던 탄공 선사의 작품이다. 19세부터 백양사에서 10년 동안 근대의 큰스님으로 손꼽히는 하동산 스님과 함께 10여년간 용맹정진했던 고승이다. 고승이 피었다 지고 또 피는 꽃으로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를 그린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의 문화가 세계에 꽃을 피운다’라는 뜻을 새긴 이 그림은 1985년 작인데 2025년에 더욱 어울리는 그림이다. 놀랍게도 이 작품이 100세에 그린 작품이다. 수령이 백년은 넘었을 것 같은 매화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다. “매화는 마침내 추워진 다음에 꽃을 피운다”는 글도 뜻이 깊지만 ‘무진년(1988년) 104세 늙은이 금강산인 탄공’이라 쓰인 글이 더욱 놀랍다. 예쁜 천에 그림을 그리고 수를 놓은 보자기는 전시장의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든다. 연꽃 두 송이가 그려진 하얀 천에 ‘꽃 마음 내 마음’이라는 글을 수놓은 주인공은 청담 스님으로 조계종 종회 의장과 해인사 주지, 조계종 총무원장 등을 지내면서 대한민국의 불교 정화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다. 부채에 찻잔을 두 손에 든 동자를 그린 작가는 누구일까. “묘엄 스님이 1990년 여름 한낮에 그린 것입니다. 뜻을 풀어 보면 ‘창 밖은 휘영청 달빛 가득한 삼경인데 옛글을 읽다 말고 이윽고 맑은 물을 다려 보네. 어디선가 솔바람 소리 들려오고 산실엔 훈훈한 향기 가득 넘치네’라는 내용입니다.” 고전 번역이 전문인 학예사의 뜻풀이를 들으니 그림이 더욱 가깝게 다가온다. 세주묘엄박물관이 자리한 봉녕사는 도심의 숲처럼 아늑하고 편안하다. 곱게 물들어 가는 단풍과 가을꽃이 만발한 사찰의 뜨락과 숲길을 거닐기만 해도 위로와 새 힘을 얻을 것 같다. 세주묘엄박물관에서 다시 깨닫는다. 이 세상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사실을.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8. 용인 한국민속촌박물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장독대가 정겹다. 짚 멍석에 빨간 고추가 널려 있는 마당에 들어서면 빛바랜 초가지붕에 둥근 박이 여물고 장독대 옆 감나무에 홍시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외양간에는 송아지를 낳은 암소가 느릿하게 여물을 먹고 있고 부엌에선 밥 짓는 냄새가 구수하게 풍긴다. 오랜만에 고향집을 찾은 사람처럼 정겨운 마을 풍경에 빠져든다. ■ 마당과 골목이 살아 있는 생활사 박물관 경기 용인시 기흥구에 자리 잡은 한국민속촌은 한국의 전통문화와 한국인의 풍속을 알려주는 역사의 공간이다. “197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한국의 전통 마을은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농경과 공동체의 질서는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흩어졌고 가옥과 민속은 기억으로만 남게 되지요. 이런 상황에서 1974년 개관한 용인 한국민속촌은 단순한 전통 체험 공간이 아니라 지방의 문화적 차이를 한자리에 모아 후대에 전하려는 선진적이고 실험적 시도였습니다. 한국민속촌에서 만나는 팔도의 농가는 지역의 성정과 풍토, 그리고 생활의 지혜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한국민속촌박물관에서 14년째 일하고 있는 나형남 학예연구사의 설명을 들으며 초가지붕을 바라본다. 짚으로 초가집의 지붕을 만드는 이엉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민속학자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재미있다. 전통을 잇고 보존하는 전문가의 손길로 단장된 민속촌박물관에 들어서면 도시에서 자라난 신세대들도 이내 전통의 매력에 빠져든다. 굽은 골목을 기웃거리고 마루에 걸터앉아 기둥을 쓰다듬으면 한국인의 피에 흐르는 고유한 정서를 누구나 느끼게 마련이다. 물론 보여주는 것만큼 다양한 체험도 마련돼 있다. “천연 염료로 염색을 직접 해 보는 체험부터 짚공 놀이까지 18가지의 전통 체험을 즐길 수 있습니다.” 부모와 함께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나이 지긋한 관람객들의 표정도 아이들처럼 밝고 활기차다. 가정을 지키는 성주신에게 집안의 평화와 풍년을 기원하는 ‘성주고사’를 비롯한 민속문화를 체험하는 가족들도 있다. 한국인의 뿌리가 무엇인지 뒤늦게 깨달은 듯 나이가 지긋한 흰머리의 관람객도 아이들처럼 해맑은 미소를 짓는다.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벼가 자라는 논이 보인다. 이제는 보기 힘든 담배밭과 목화밭처럼 전통 시대의 주요 작물이 자라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것도 자랑이다. 껍질이 터져 하얀 솜이 꽃처럼 예쁘다. “약초 30여종을 비롯한 전래작물 100여종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한국민속촌은 한국인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생활사박물관’이다. ■ 옛 모습을 살려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다 용인 한국민속촌은 1974년 10월3 개천절에 개관한다. 한 해가 지난 1975년 12월에는 한국민속촌박물관을 개관해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리고 보존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무려 50년 전에 사라져가는 전통 민속문화를 보전하려는 목적으로 99만㎡(약 30만평)의 너른 땅에 거금을 들여 야외에 민속박물관을 조성한 일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민속촌에도 외국인 관람객들이 많이 보인다. K-­문화의 매력에 빠져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늘어났기 때문이겠다. 2010년대부터 한국민속촌은 우리 민속문화와 전통의 새로운 가치를 탐구하며 찾아내 관람객들에게 더욱 깊이 다가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2019년 12월 한국민속촌은 연간 방문객이 150만명에 이른다. 한국민속촌박물관이 거둔 성공의 비결은 무엇일까. “조선시대 마을은 전국의 여러 지방에 있던 집을 통째로 옮기거나 복원한 집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철저한 고증과 자문을 거쳐 사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생활문화를 재현하고 있어 언제 찾아도 좋습니다. 체험형 전시와 전통 방식을 계승한 생활공예, 절기별 세시풍속을 체험할 수 있고 이 분야의 전문인들이 재현하며 잊혀 가는 문화유산의 가치를 관람객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선조들의 지혜와 슬기가 깃든 전통문화를 만나기 위해 전통민속관을 둘러본다. “7개의 전시관에 옛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생활 유물 860여점이 전시돼 있습니다.” 안내문처럼 전통민속관은 다양한 문화유산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얼핏 보면 같은 것처럼 보이는 항아리도 자세히 살펴보니 전라도와 충청도가 다르고 강원도와 경상도가 다르다. 가옥 구조도 따뜻한 남부와 겨울이 긴 북부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루와 부엌의 위치는 물론이고 장독대의 구조도 자연환경에 맞춰 발전한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가구와 항아리 같은 일상의 생활용품도 무엇이 닮았고 무엇이 다른지를 비교하며 소개하면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한국인이 빚어낸 고유한 문화의 특성을 9개 전시관에 3천여점의 흥미로운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세계민속관을 둘러보면서 다시 깨닫는다. ■ 닮았지만 다르다 조선시대 가옥을 둘러보며 옛사람들의 손길을 느껴보는 시간이 즐겁다. 안채와 사랑채, 부엌과 창고, 대청과 마루, 골방까지, 각 공간은 실제 생활에서 기능과 의미가 다르다. 부엌에서는 연기와 냄새, 불빛과 조리 도구의 배열이 마치 어머니가 식사를 준비하는 순간처럼 생생하다. 대청과 마루에 앉으면 아이들이 놀고, 손님을 맞이하며, 가문과 마을의 이야기가 오갔을 시간을 상상하게 된다. 집 안의 물건 중에서 소반을 주목해 살펴본다. 영남지역 소반은 장인 특유의 날카로운 선과 단단한 구조로 양반의 위엄이 느껴진다. 반면 전라도 소반은 둥근 모서리와 부드러운 곡선이 특징으로 한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밥을 나누는 정겨운 풍경을 연상시킨다. 이번에는 공방이다. 괭이와 낫을 만들었던 대장간을 비롯해 옹기, 죽기, 목기 등 공방이 아홉 곳이나 운영되고 있다. 공방을 담당하는 장인들이 직접 물건을 제작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어 인기가 많다. 목가구, 도자기, 농기구 등 전통 생활 도구가 무려 2만여점이라고 하니 널려 있는 것이 모두 문화유산인 셈이다. 전시된 물건 하나하나가 소리와 촉각, 온도까지 감각적으로 연결된다. 메주를 쌓은 장독대의 무게감, 떡살의 문양과 손으로 만졌을 때의 질감, 볏짚으로 엮은 지붕의 거친 촉감, 한지로 만든 등불의 은은한 빛까지 민속관은 오감을 통해 전통을 경험하게 만든다. 정문에서 가까운 옹기생활관도 볼거리가 풍성하다. 한국의 멋과 정서가 듬뿍 담긴 옹기를 맘껏 감상할 수 있어 사랑받는 공간이다. 형제처럼 닮았으되 서로 모양이 조금씩 다른 700여점의 옹기를 찬찬히 살펴보며 지역의 특성을 찾아내는 시간은 각별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 옛사람들의 지혜를 배우는 성찰의 공간 “정월 대보름에는 액운이 물러가고 만복이 올 수 있기를 바라며 달집태우기를 합니다. 봄바람 불어오는 영등날은 농사에 큰 바람을 관장하는 영등할머니가 오시는 날입니다. 농촌과 어촌에서는 매년 2월1일이 되면 한 해 농사의 풍년을 빕니다.” 한국민속촌박물관에 들어서면 관람객은 단순히 ‘보는’ 사람이 아니라 공간과 물건과 시간을 함께 호흡하는 존재가 된다. 전통민속관을 천천히 걷다 보면 공간은 시간이 중첩된 장소가 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루와 골방, 부엌과 대청의 이야기들이 이어지고 작은 소반 위에 놓인 물건 하나가 그날의 식사, 한 가족의 일상, 계절의 변화까지 상상하게 만든다. 전통민속관은 한국인들의 삶과 지혜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하고 오늘 우리에게 전통이 무엇인지, 왜 그것을 이어가야 하는지 질문하는 현장이다. 공간과 물건과 빛과 소리, 냄새와 촉감이 어우러져 과거와 현재를 잇는 통로가 된다. 한국민속촌은 물질이 넘쳐나고 소비가 권장되는 이 풍요의 시대에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공간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7. 소전미술관

한국 도자기의 매력에 흠뻑 빠진 사람이라면 시흥 소래산 자락에 안겨 있는 소전미술관을 기억할 것이다. 늘씬한 자태와 신비로운 빛깔을 가진 고려청자, 수수하지만 표현 기법이 놀라운 분청사기, 선비처럼 맑고 단아한 조선백자까지 한국의 명품 도자기를 두루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이기 때문이다. 고즈넉한 미술관으로 기억되는 소전미술관이 크게 변신했다. “닫혀 있던 아픔을 대신하여 더욱 시민들과 함께하는 소전이 되겠습니다. 소수의, 가진 자의 미술관에서 시민의 시민을 위한 미술관이 되겠습니다.” 소전미술관(관장 이동섭)의 홈페이지에 실린 이사장의 인사말에서 변신한 까닭이 어렴풋이 감지된다. ■ 시민의, 시민을 위한 미술관으로 새롭게 변신하다 소전미술관은 극동그룹 창업주이자 장학사업을 위해 (재)소전재단을 설립한 소전(素田) 김용산 회장(1922~2007)이 평생 모은 도자기를 비롯한 고미술품과 조각, 회화를 기반으로 1996년 5월 개관한 사립미술관이다. 키 큰 나무들이 둘러싼 미술관 마당에 산책하는 가족들이 보인다. 마당의 풍경은 여전하지만 미술관 안은 완전히 바뀌었다. 높다란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이 미술관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북카페로 변신한 1층 곳곳에 ‘장미의 화가’로 알려진 성백주 화백의 분위기 있는 장미 그림이 걸려 있다. 세계적인 화가 호안 미로의 멋진 작품과 마주한다. 스페인에서 가장 존경받는 화가이자 조각가로 알려진 미로가 1976년 제작한 ‘샤리바리(Charivari)’란 작품이다. 궁금하다. 미로는 왜 이 작품에 프랑스어로 ‘시끄러운 소리’ 혹은 ‘소음’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굵고 검은 몇 가닥의 선과 빨강 파랑 노랑 초록의 원색이 어울려 동물 혹은 사람 얼굴 같기도 해 다시 보게 만드는 매력적인 그림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제작된 피아노나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가 그려진 프랑스 세브르 도자기도 빠뜨리지 말고 챙겨봐야 할 중요한 유물이다. 이처럼 미술관 곳곳에 정말 귀중한 유물이 배치돼 있으니 눈여겨 살펴보면 좋겠다. 그윽한 한국의 미를 보여주던 도자기 전문미술관이 북카페로 과감한 변신을 시도한 까닭은 무엇일까. 박우섭 상임이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지난해 봄부터 대중에게 좀 더 널리 미술관을 알리고 대중이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카페와 미술관이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바꿨습니다.” 소전미술관은 2024년 봄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한다. “관람객과 적극적인 소통을 위해 ‘더 숲 소전’과 함께 오픈형 미술관으로 새롭게 문을 연 것입니다.” 카페를 찾는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미술작품과 만날 수 있도록 새롭게 단장했다는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토로나 등 그동안 사립미술관이 남몰래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알고 있기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소명의식은 뚜렷하다. “소전은 모든 사람이 예술의 향유자이자 창조자가 되는 것을 추구합니다. 예술에 친근해질 수 있는 기회, 쉽게 미술품을 감상하면서 직접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가 돼 전시까지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꾸준하게 수행하고 싶습니다.” 변신 후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 기대 이상의 반응이다. “분위기가 좋아 미술관을 찾는 북카페 손님들이지만 곳곳에 작품이 전시돼 있으니 자연스럽게 스며들 것입니다.” 너른 잔디밭과 편히 쉴 수 있는 다다미방도 있어 주말에는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많이 찾고 있단다. 가족이나 동아리가 함께할 수 있도록 의자도 여유롭게 배치한 것도 돋보이는 점이다. 나선형 계단을 올라 2층에 다다르면 시선이 한결 여유로워진다. 대관 전시회 ‘봄빛 그림회’는 15일까지 이어진다. 장미와 목련, 해바라기 등 꽃 그림이 많아 전시실이 유난히 밝고 화사하다. 아마추어들의 작품은 평범한 관람객에게는 예술에 다가가기가 오히려 좋지 않을까. ■ 명작을 만나는 행복한 시간 살아가면서 미술사에 이름을 올린 대가의 작품과 직접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소전미술관은 대가의 명작을 편히 만날 수 있다. 2층에 복도에 놓인 흉상의 주인공이 베토벤이다, 사실 베토벤의 흉상을 조각한 이가 로뎅의 제자이자 동지였던 앙투안 부르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양손의 베토벤’은 무심히 지나치기도 하지만 반드시 음미해야 할 명작이다. 베토벤의 음악에 감동한 부르델은 ‘베토벤’ 연작을 1888년부터 192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5점이나 제작한다. 베토벤의 외모를 재현하던 부르델의 손길은 차츰 깊어져 위대한 음악가의 내면 깊숙이 숨어 있는 영감과 열정의 뿌리까지 보여준다. ‘운명’ 같은 명작을 탄생시킨 위대한 음악가의 내면 풍경을 표현하기 위해 고심하는 부르델의 진지한 얼굴이 떠오른다. 스승 로댕이 부르델을 “미래의 등불”이라 격찬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소전미술관은 잔디 마당과 정자까지 갖춘 정원이 일품이다. 미술관 마당 곳곳에 세계적인 조각작품을 설치한 설립자의 생각이 돋보인다. 프랑스의 추상 조각가 세자르 발다치니(1921~1998)가 1963 제작한 ‘엄지손가락’ 앞에 선다. 2m가 넘는 높이의 커다란 엄지손가락은 돋보기로 확대한 것처럼 섬세하게 조각돼 있다. 발다치니는 왜 하필 엄지손가락에 꽂혔을까. 매일 보는 손가락이지만 발다치니의 조각 앞에서 엄지손가락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부르델이 1908년 조각한 ‘고귀한 짐’의 여인은 모습은 서양인이지만 하는 일과 마음은 우리의 어머니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오른손으로 어린아이를 안고 왼손으로는 과일이 가득 담긴 무거운 바구니를 들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모성의 위대한 힘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이라 설명을 읽지 않으면 동일한 작가라는 사실을 파악하기 어렵다. 이처럼 대가의 예술세계는 범인(凡人)의 생각을 가볍게 넘어선다. 미술관 앞에는 평화로운 동산으로 데려줄 것 같은 늘씬한 두 마리의 ‘말’이 나란히 서 있다. 여의도 한화생명빌딩의 ‘물고기’를 제작한 유리공예가 심현지의 작품이다. 미술관 마당과 뒤란 곳곳에 전시한 수석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듯해 안타깝다. 이 정도의 품격과 아름다움을 갖춘 수석을 만나려면 창덕궁의 후원이나 경복궁에 가야 한다. ■ 문턱을 낮춘 열린 미술관 소전미술관은 훌륭한 미술자료실도 갖추고 있다.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는 열린 자료실이다. 미술관에는 1만권의 책이 소장돼 있다. 미술관을 만들 무렵에는 도서관을 꾸밀 계획이었는데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그 시대 도록에 멈춰 있지만 희귀하고 소중한 자료가 많다. 이러한 자료를 밑천 삼아 인문학 동아리 활동을 꾸릴 수도 있단다. 미술관 기획을 맡고 있는 김미숙 학예연구사는 올봄 ‘씨실과 날실’이란 특별기획전 자료를 보여준다. 지속가능한 소전미술관의 철학에 맞는 훌륭한 전시라는 느낌이 온다. 시민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마음, 문턱을 낮추고 재미와 교양을 갖춘 기획으로 시민들을 미술관으로 불러들이려는 소전미술관의 생각이 변신을 추동한 동력이다. 소전미술관을 품고 있는 소래산은 산책을 하기에 좋은 산이다. 미술관 곁에 소래산 삼림욕장을 갖추고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 300m 남짓한 아담한 산이라 노약자도 큰 부담이 없다. 산행길에서 보물로 지정된 마애보살입상을 마주할 수도 있다. 청자를 창안한 고려인들의 신앙과 미감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소중한 유물이다. 조선 세종 때의 명재상 문효공 하연을 모신 소산서원과 묘소도 그리 멀지 않으니 시간을 내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가을은 미술관을 찾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시흥 소전미술관은 누구나 찾아도 편안한 문턱을 낮춘 열린 미술관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6. 양평군립미술관

양평의 매력은 무엇일까. “서울 근교의 지자체 도시 중 가장 수려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며 땅, 산, 물 사람이 건강한 문화예술인의 도시입니다.” 양평군립미술관 이홍원 학예실장의 소개말에 자부심이 묻어난다. 양평군립미술관은 31개 시·군이 속해 있는 1천400만의 경기도에서 양평군을 ‘문화예술의 도시’로 부르게 한 주역이다. ■ 양평을 전국의 지자체가 주목하는 까닭 2011년 12월 개관한 양평군립미술관(관장 하계훈)은 수준 높은 현대미술 전시와 창의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단기간에 전국의 지자체가 주목하는 공립미술관으로 성장한다. 2024년까지 13년 만에 160만명이 찾을 정도로 양평군립미술관이 예술가와 관람객에게 사랑받는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전문성과 열정을 갖춘 구성원들이 정성을 쏟아붓는 기획전시는 언제나 생동감 넘친다. “신진작가 공모 전시와 창의교육 프로그램은 양평군민들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증거가 넘친다. 양평군립미술관은 개관 3년 만에 ‘경기도 공사립 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에 2년 연속으로 최우수기관에 선정되고 2019년부터 3년 연속으로 ‘문화체육관광부 문화가 있는 날 지역특화프로그램’에 선정됐다. 문화체육관광부 공립미술관 평가 인증기관, 교육부 교육기부 진로체험 인증기관, 공립미술관 평가 인증기관이기도 하다. 2018년에는 ‘자랑스러운 박물관인 큐레이터상’을 수상하고 2024년에는 ‘올해의 박물관·미술관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전문미술관이지만 ‘문턱이 낮은 행복한 미술관’을 지양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전시와 교육, 문화기획으로 군민과 함께하는 미술관 구현이 목표입니다.” 이승근 홍보팀장의 말이다. 이런 자랑을 뒷받침하듯 대중성과 수준 높은 프로그램 기획으로 지역 미술문화를 정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특한 외관은 물론이고 여러 모습으로 변신하는 미술관의 내부 구조도 주목된다. 특히 전시장을 연결하는 복도의 벽면까지 알뜰하게 활용하는 ‘이음전시실’은 공간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모범 사례로 꼽힌다. 인구 12만7천명의 작은 지자체인 양평군이 1년에 얼마의 예산을 공립미술관에 지원할 수 있을까. 그러니 전시 비용을 최대한 절약하고 비품을 재활용하는 일은 미술관 큐레이터의 상식이자 기본 임무이다. 9월21일까지 이음전시실과 제1~4전시실에서 열린 ‘2025 양평이 주목하는 청년작가전’은 양평 출신으로 수준 높은 작품을 선보여온 양경렬, 이재형 작가의 작품 50여점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두 작가의 초기작부터 최근까지를 조명하는 전시여서 작가의 변화하는 관심과 대상을 보여주어 관람객의 호응이 높았다.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복도와 좌우 벽면에 작품 구상을 담은 작가의 메모와 스케치까지 전시돼 관람의 재미를 더해줬다. ■ 미래의 인재를 키우고 치유하는 문화공간 여름방학에 진행된 토요 어린이예술학교 ‘빛의 화가, 클로드 모네’는 문턱 낮은 미술관을 지향하는 양평군립미술관 철학과 지향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결과물을 전시하는 지하 1층 스페이스관에서 양평 어린이들의 반짝이는 작품과 마주한다. “양평교육지원청이 협력한 ‘두물 공유학교 사업’으로 올해가 두 번째지요.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를 주제로 한 10주간의 수업에 어린이 18명이 참여해 모네의 작품세계를 배우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빛과 자연을 담아내는 활동입니다.” 아이들의 작품은 기대 이상이다.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처럼 빛과 색의 변화를 관찰하고 순간의 인상을 담아낸 아이들의 솜씨가 놀랍다. 어린이들이 모네에게 보낸 편지도 재미있다.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의 그림 후배 김은유예요. 저는 당신의 그림을 보고 감동했어요.” 두물공유학교는 지역사회와 미술관이 함께 만드는 어린이 교육 모델로 지속해 나갈 가치가 충분한 훌륭한 프로그램이다. 성인을 위한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9월 주말에 6강좌로 진행된 2025 경기도박물관·미술관 지원사업 위캔드아트 ‘미술인문학-아트콜로키움: 예술로 보고, 듣고, 성찰하는 삶’이 시선을 끈다. 수채화 정규반과 아크릴화 정규반을 운영하는 ‘위캔두 아카데미’나 ‘책과 함께하는 작은 미술관’도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다. “5월과 6월에는 ‘2025 양평아트페스티벌’의 프로그램으로 전문가 초청 강연과 미술 전업 작가를 위한 저작권 교육을 진행했습니다.” 8월에는 한국미술평론가협회와 함께 ‘한국현대미술의 예술성’을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열어 작가와 관람객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미술관에서 이뤄지는 행사에 군수가 매번 방문해 격려하는 풍경도 양평에서는 흔한 일이다. “5월 개최한 ‘2025 양평 아트페스티벌’에 보름간 총 3천222명의 관람객이 미술관을 찾았지요. ‘도화선-예술로 꽃피우는 희망의 불씨’를 표어로 내건 페스티벌은 가라앉은 미술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역과 예술과 사람을 잇는 새로운 문화 네트워크의 가능성을 입증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공간75’를 비롯한 양평지역의 10개 갤러리가 참여해 창작과 유통이 공존하는 예술 전람회의 모범을 제시한 것은 주목해야 할 성과물이다. “단순한 전시를 넘어 지역 갤러리와 작가들에게 실질적인 판로를 제공하고 미술시장의 활성화를 도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습니다.” 양평군이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도약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는 양평 아트페스티벌이 지속가능한 예술 행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세종대를 비롯한 15개 수도권 미술대 및 예술대와 협력관계를 구축하며 경기 동부권의 예술 허브로서의 입지를 바닥부터 다지는 양평군립미술관의 숨은 노력도 빠뜨릴 수 없다. ■ 군민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미술관 인구 비율로 따지면 양평은 전국 지자체에서 화가가 가장 많은 도시다. 이런 까닭에 양평군민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안목과 관심은 100만이 넘는 대도시보다 높다고 평가된다. 양평군립미술관이 높은 수준의 전시를 꾸준하게 기획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비결은 지역민과 행정이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지역민의 관심과 지자체의 지원에 힘입어 양평군립미술관은 기획전시와 대관전시로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2025년 신진작가 전시지원 사업인 ‘뉴 앙데팡당’은 어떤 사연을 담고 있을까. “‘뉴 앙데팡당’은 민선 8기 공약 ‘더 큰 미술관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우수한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이들의 작품세계를 심층 조망하는 양평군립미술관의 대표적 작가 지원사업입니다. 35 대 1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한 이번 공모에서 동시대 미술의 감각과 실험성을 두루 갖춘 신진작가 7인을 최종 선정했습니다.” 7인의 작가 중 피정원과 희박의 작품을 전시한 ‘뉴 앙데팡당: 십자말풀이 파트 1’(6~7월)과 박혜수와 정운의 작품을 전시한 ‘뉴 앙데팡당: 십자말풀이 파트 2’(8~9월)가 전시됐다. 10월1일부터 ‘뉴 앙데팡당: 십자말풀이 파트 3-이상덕, 김명득, 전희수’가 11월까지 열린다. 2025년 봄부터 9월까지 진행한 전시의 면면을 살펴본다. ‘한국 현대 구상미술의 단면: 사실과 재구성展’(3~5월)을 시작으로 ‘양평군립미술관 신소장품전’(3~5월), ‘2025 양평아트페스티벌_도화선(圖花線): 예술로 꽃피우는 희망의 불씨’(5~6월), ‘2025 양평이 주목하는 청년작가전-양경렬·이재형전’(7~9월)이 이어졌다. 물론 기획전시 사이사이 대관전시가 열려 미술관을 찾으면 언제 나 수준 높은 작품과 마주할 수 있었다. 한편 야외공원에서 2025 양평군립미술관 소장품전이 열리고 있다. 조각작품을 감상하다가 한 작품 앞에 선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재해석한 조각품이다. 양평군립미술관은 거인 골리앗과 맞서 싸워 승리하고 마침내 왕이 된 소년 다윗처럼 야심이 크다. 문화 명소 양평군립미술관의 변신은 현재진행형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5. 이천 경기도자미술관

신비롭고 아름다운 도자를 마주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이천의 안산 설봉산 자락에 안겨 있는 경기도자미술관은 놀랍게 발전한 현대도자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매력적인 미술관이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탄생시킨 한국인의 저력과 미감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대도예 오디세이 “미술관 소장품 중 해외 작품은 비엔날레 국제 공모전의 수상작과 기증작입니다. 2024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를 기념하며 소장품 상설전에 전시된 역대 비엔날레 주요 수상작과 출품 이후 기증한 작품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김지수 큐레이터의 설명대로 경기도자미술관은 세계 거장들의 작품을 두루 만나볼 수 있는 국내 유일한 현대 도자미술관이다. 소장품 상설전 ‘현대도예–오디세이’는 한국 현대도예의 발전상을 친절하고 흥미롭게 보여준다. 전시실에서 만난 꼬마 로봇은 즐거움을 더한다. “관람객 누구나 편안하게 10~15분간 인공지능(AI) 로봇의 안내를 받으며 상설전시관을 관람할 수 있어 아이는 물론이고 어른들도 좋아합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도자 작품을 마주하며 경기 이천이 한국 도예의 산실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현대 한국 도예가 시작됐다는 사실도 감동적이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한 황종례의 ‘귀얄문기’와 권순형의 ‘심산(深山)’은 작가의 예술혼이 물씬 느껴지는 작품이다. 유근형의 ‘청자버들문매병’과 조소수의 ‘백자포도양각항아리’는 전통과 현대의 창조적 만남을 보여주는 멋진 작품이다. “루디 오티오의 ‘욕심쟁이들’과 피터 볼커스의 ‘펜린’은 도예의 통념을 바꾼 작품들입니다.” 현대도예의 새로운 역사를 보여주는 작품은 관람객의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조선의 도자 기술을 배워 가 세계에 동양의 도자를 알린 일본의 저력이 느껴지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조각처럼 보이는 모리노 히로아키 타이메이의 작품은 실험성과 예술성이 돋보인다. 개미집을 형상화한 로손 오예칸의 ‘치유하는 존재’나 토비욘 크바스보의 ‘튜브조형물’은 도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상상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옷을 벗은 늙은 여인이 얼굴을 찌푸리며 베개를 뜯고 있다. 미국 작가 팁 톨랜드의 ‘짜증’은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신비로운 작품이다. 세계적 작가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전시관 곳곳에 배치해 재미를 더해주는 것도 고마운 일이다. ■2025 경기도자미술관 기획전 ‘호모 세라미쿠스’ “9월19일 개관해 내년 2월까지 열리는 ‘호모 세라미쿠스’는 ‘도예가’라는 존재를 새롭게 조명하는 전시입니다. 도예가들은 겸손하게 자연과 호흡하고, 묵묵히 불의 시간을 견디며, 삶의 파편을 성찰과 지속의 손길로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실패와 시련’의 의미를 다시 묻습니다.” 한정운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실로 들어서는 데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전시를 담당한 큐레이터는 도자라는 물성을 넘어 인간과 예술, 삶에 대한 깊은 사유로 이어지며 도자가 품은 인간적 깊이와 예술의 본질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주문한다. 현재의 도예가들은 과거와 작업 방식 및 환경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와 장인정신에서는 연속성을 보여준다. 경기도자미술관은 유사성과 지속성에 주목해 ‘호모 세라미쿠스Homo Ceramicus’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도예가라는 존재를 조명한다. ‘흙을 다루는 인류’를 뜻하는 ‘호모 세라미쿠스’는 경기도자미술관에서 처음 제안한 신조어다. “이 새로운 이름을 통해 도예가라는 존재를 보다 입체적이고 깊이 있게 바라보게 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목표입니다. 관람객들이 도예가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기 바랍니다. 덧붙여 고단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그들의 태도와 작업을 반추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3부로 구성된 전시의 1부 ‘겸손하게 호흡하다’는 흙의 순환과 그 순환성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도예가의 숙명, 그들의 자연에 대한 태도를 조명한다. 흙에서 태어나고 자란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살찌우다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도예가가 자연의 회복에 깊이 사유하는 존재임을 전달하는 톤투어리스트의 영상 작품, 원초적 방식으로 점토와 접촉하고 노동을 반복하는 도예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니일 브라운스워드의 작품이 기획전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준다. 디지털 세계와 물질 세계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임지현과 대형 설치작품을 통해 실패와 잔해까지 포용하는 도예가의 탐구정신을 보여주는 백인교, 자연을 자신과 분리하지 않고 자신을 감싸는 존재로 바라보는 사이토 유나의 시선도 재미있다. “자연의 질서에 귀 기울이며 작업을 이어가는 그들의 겸손한 태도는 작품에 고스란히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도예는 인간과 세계가 가장 깊숙이 만나는 창작의 방식이지요.” ■흙이 예술로 변모하는 창조의 시간을 엿보다 2부 ‘견디며 위로하다’는 전시 방식부터 신선하다. 찻잎이 가득 담긴 곳에 예쁜 다기들이 놓여 있다. 향긋한 찻잎을 만져본다. 도예가에게 차를 마시는 일은 삶과 작업, 재료와 정신성을 관통하는 의례처럼 여겨진다. “자신이 빚은 찻잔을 들어 천천히 차를 음미해 도자기의 질감, 무게, 균형, 온기를 몸으로 되새기며 자신의 작업을 다시 한번 감각적으로 경험합니다.” 차를 마시는 것은 자기 반성의 시간이자 흙을 다루며 느꼈던 긴장과 집념을 잠시 내려놓는 쉼의 순간이다. 한국적인 감각을 섬세하게 구현한 차 도구를 선보이는 강영준, 존재와 소멸·변화와 치유의 순환을 이야기하는 우시형, 달을 주제로 한 감성적인 차도구를 선보이는 문찬석, 끊임없이 변화하며 완성되는 은채 도자를 제안하는 이혜미, 수양과 정신적 성찰의 매개가 되는 차 도구를 제시한 신현철, 치유의 의미를 담은 오브제를 선보인 박미란, 한지를 모티브로 한 실험적 차 도구를 선보인 박성극 등 이들의 작업은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몰입 속에서 작품을 완성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아름다움을 향해 흙과 대화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도예가의 모습이 먹먹하다. 3부 ‘성찰하며 살아가다’는 6명의 도예가가 만든 미니 자화상과 경기도자미술관의 소장품 24점을 함께 보여준다. 죽음의 슬픔을 해학적으로 풀어내는 꼭두는 무슨 뜻을 지니고 있을까. 이 공간에서 만나는 자화상은 도예가의 내면을 비추는 창이다. 작품들은 도예가의 삶의 태도와 감정을 관찰하도록 ‘희로애락’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이준성, 김예지, 박선영, 김운희, 양혜정, 조윤상은 도예가가 흙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흙은 도예가에게 자기만의 철학을 빚어내는 도구이자 감정과 세계를 잇는 거울이며 더 나아가 존재의 근원을 끊임없이 질문하게 하는 매개체로 기능합니다.” 매일 수양하듯 흙을 다루는 도예가들의 일상은 묵직한 울림을 준다. “흙은 불을 견뎌야 비로소 도자가 된다.”, “깨진 그릇은 실패가 아니라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정말 그렇다. 도예가들은 실패가 끝이 아니라 성장의 일부이며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소중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술관을 찾은 당신도 시련을 통해 더 단단해질 수 있다는 숨겨진 메시지를 꼭 발견하기 바란다. “이번 전시에서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의 자세로 오늘을 빚어가고 있는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 그리고 용기를 선사하는 경기도자미술관은 현대 도자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세계적인 미술관이다. 햇살과 바람이 부드럽다. 미술관을 찾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설봉산은 경기도자미술관을 비롯해 설봉호수를 배경으로 설봉국제조각공원과 이천시립박물관, 이천시립월전미술관을 품고 있는 문화예술의 산실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4. 동두천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

경기도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소요산 자락에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이 있다. 하늘의 별을 닮은 박물관 건물은 벽과 내부를 곡선으로 처리해 부드럽고 편안하다. 두 개의 나무를 연상시키는 박물관 대문에 올라앉은 상상의 동물 친구들이 관람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모두의 꿈과 상상을 키우는 자연 놀이 숲’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관장 허윤형)은 우리 아이들이 꿈과 상상을 키우는 놀이 숲이다. “기획전시실이 ‘관람’을 통해 생각을 키워가는 공간이라면 상설전시실은 ‘체험’에 집중해 어린이들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며 성장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습니다.” 문채원 학예사의 안내처럼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은 오감을 자극하는 체험이 중심이라 산만한 아이들도 빠르게 전시에 몰입한다. 1층 상설전시실 ‘놀이 숲’에서 처음 만나는 동물은 어린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공룡이다. 목이 기린처럼 기다란 저 대형 공룡의 이름이 무엇일까.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초식성 공룡인데 몸속을 탐험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암벽 오르기, 소화 체조하기, 미끄럼틀 타기, 트리타워 오르내리기 같은 신체활동을 하며 브라키오사우루스 몸속을 탐험합니다.” 공룡이 살았던 과거의 숲으로 떠나는 여행만큼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또 있을까. 아이들에게 바다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미난 공간이다. 푸른 파도가 넘실대고 고래가 헤엄치는 ‘바다 놀이터’는 36개월 미만의 영아들만 입장이 가능하다. 배와 고래 등을 타고 재미있게 놀 수 있어 언제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전시실에 왜 괴물이 있을까. ‘몬스터가 나타났다’라는 설명이 붙은 이 작품은 작가 카밀라 알베르티의 ‘러닝 인 디스바인딩’이다. 이 흥미로운 작품은 작가와 서울예술대 학생들이 경기 안산시를 비롯한 바닷가와 농촌과 도시에서 수집한 나무뿌리, 돌, 유리 같은 여러 물건으로 만든 것이란다. 버려진 물건으로 생태 회복의 중요성을 알리는 작품으로 탄생시킨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인간은 생태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하나일 뿐 자연과 공존해야 합니다.” ■아이돌: 아이와 돌의 이야기 우리 아이들에게 돌은 어떤 존재일까. 7월부터 시작된 기획전시 ‘아이돌’은 이름에서 상상이 되듯 어린이의 시선에서 돌을 다양한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다. 2층 기획전시실에서 만난 색색의 돌로 쌓은 돌탑들이 들꽃처럼 예쁘다. 전시실 가운데 색색의 예쁜 돌을 담은 상자가 놓여 있어 누구나 만져볼 수도 있다. 진짜 돌도 있고 인공으로 만든 돌도 섞여 있어 관람과 체험이 더욱 재미있다. 내년 7월까지 이어지는 기획전 ‘아이돌-아이와 돌의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해줄까. “돌을 주제로 한 ‘아이돌’의 인기가 너무 좋아 놀라고 있습니다.” 김성문 장유정 진귀원 하석홍 4명의 작가가 참여한 기획전 ‘아이돌’ 역시 전시와 체험이 반반이다. 자연이 만든 예술품인 돌을 쓰다듬고 귀에 대어 보는 아이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유문암, 현무암, 흑요석 같은 돌의 특징은 무엇일까. 커다란 돋보기로 돌을 자세히 살펴보고 손을 넣어 상자에 담긴 돌의 촉감을 느껴보는 시간이 즐겁다. 옛사람들의 무덤인 고인돌도 만나볼 수 있고 악기로 변신한 돌도 만날 수 있다. 나무 틀에 ‘ㄱ’자 모양으로 다듬은 여러 개 돌을 매달아 만든 전통악기 ‘편경’은 돌이 아름다운 소리도 간직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방망이로 편경을 두드리니 맑은 소리가 전시실을 가득 채운다. “친구랑 놀이공원에서 하루 종일 놀고 싶어요”, “내 꿈을 이뤄줄 마법의 돌을 찾고 싶어요”, “내가 만든 발명품이 세상을 바꿨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의 소원이 담긴 글을 하나씩 읽어본다. 돌이 아이들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소통의 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어린이의 오감을 예술로 키우는 체험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은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관람객을 위해 지난해 기획전시실을 새롭게 꾸미고 다채로운 주제의 기획전시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첫 기획전 ‘탱탱볼’은 현대미술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 전시였는데 주말마다 어린이를 위한 전시해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숨바꼭질하듯 아기자기하게 꾸민 박물관의 실내 구조도 아이들의 상상력을 쑥쑥 키워줄 것 같다. 위층과 아래층을 연결하는 길을 숲속에 난 오솔길처럼 나선형으로 설계한 것이 재미있다. “교육은 박물관의 주제인 숲과 생태를 살려 자연의 생명체들과 어울리며 다섯 가지 감각을 깨워내는 방향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확장돼 발달장애 어린이들도 자연을 느긋하게 감각하고 예술적 경험에 참여할 수 있는 나눔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차별화된 교육 콘텐츠는 다양한 기관, 많은 사람과 만나고 있어 주목된다. 재구성이 가능한 모듈형 플랜트 박스에 기반한 체험전시 ‘내 마음은 풀full’을 국내 곳곳의 기관에서 순회전시로 선보이고 있는 것도 거둔 성과의 하나다. 환경 문제를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문제에 공감하고 생태 감수성을 키워가는 ‘오감이 환경동화’를 펴낸 것도 빠뜨릴 수 없다. 동두천양주교육지원청과 협력해 학교 연계 교육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함께 만드는 박물관’을 실현하기 위해 지역사회와 적극 협력하고 있는 점도 돋보인다. 숲과 생태, 문화예술 그리고 어린이라는 주제 의식을 공유하는 관련 기관들과 콘텐츠를 공동 기획하고 가족 단위 관람객이 박물관을 더욱 풍성하게 즐길 수 있는 행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특히 올해는 동두천소방서와 협력해 4월부터 매주 목요일 소방 안전 체험을 진행하고 있다. 경기아트센터 등 공연 기관과 협업해 계절마다 눈과 귀를 사로잡는 공연을 선보이는 사업도 꾸준히 펼치고 있다. 전시실 곳곳에 지역시민으로 구성된 자원봉사자를 배치해 안전하고 즐거운 관람을 돕고 있는 것도 북부어린이박물관의 자랑이다.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복합문화공간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은 작년 가을 2020년 재개관 이래 최초로 소장품 수집 심의위원회를 개최해 국내외 작가 5인의 현대미술 작품 7건을 수집 및 기증받았으며 순차적으로 전시할 예정이다. 앞에서 소개한 카밀라 알베르티의 작품 외에도 1, 2층 상설 전시장에서 이우만, 한성필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은 어린이처럼 성장하고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부터 부모와 조부모까지 모든 세대를 아우르며 모두의 꿈과 상상을 키우는 자연 놀이 숲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이 오고 싶어 하는 박물관을 넘어 다양한 세대가 어울릴 수 있는 ‘가족박물관’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은 내년이면 개관 10주년이 된다. 10주년을 맞이하는 허윤형 관장의 계획을 들어본다. “상설전시실은 더욱 안전하고 흥미로운 구성으로 올가을 개편합니다. 기획전시 ‘아이돌’에 이은 상설전시실을 새롭게 단장해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더욱 풍성하고 흥미로운 콘텐츠를 제공할 것입니다.” 다채로운 전시, 차별화된 교육, 전문성 강화, 지역사회와 적극 교류해 ‘모두를 위한 박물관’으로 성장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라는 관계자의 각오가 든든하다. “숲과 어우러진 박물관에서 느끼고 체험한 문화예술 경험을 통해 가족들이 자연을 몸과 마음으로 이해하고 영감을 줄 수 있기 바랍니다.” 경기북부어린이박물관을 찾는 모두에게 깊이 스며드는 문화 거점으로 발돋움하기를 희망하는 바람이 꼭 이뤄지길 응원한다. 어린이박물관을 품고 있는 소요산은 단풍 명소로도 유명하다. 박물관 관람과 산행을 함께하기 좋은 계절이 찾아왔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3.안산 경기도미술관

연탄재 더미에 맑은 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놀랍게도 연탄재에 파란 이끼가 살고 있다. 2025 동시대 미술의 현장 기후 위기 특별전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의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는 이지연 작가의 설치작품 ‘잿소리’다. 안산시 단원구 동산로 268의 경기도미술관(관장 전승보)은 찾을 때마다 새로운 즐거움을 선사하는 미술관이다. ■ 미술의 경계를 넘어서는 현대미술관 거대한 반투명 유리벽과 경사진 지붕을 떠받치는 철파이프가 마치 배의 돛대처럼 보인다. “미술관은 수평성을 강조하면서도 수직적 요소를 더해 돛단배 이미지로 반투명의 유리판을 외벽에 사용했지요. 자연 채광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8.5m 높이의 천창 시스템은 전시 환경의 유연성을 높여주는 장치입니다.” 전승보 관장의 설명처럼 경기도미술관은 물과 빛, 자연과 예술이 공존하는 열린 문화 공간이다. 독특한 건물 모양만큼이나 전시에 최적화된 첨단 시설이 돋보인다. 2006년 10월 개관한 경기도미술관은 현재까지 164건의 전시를 개최했다. 한 해 평균 8건 이상의 전시를 열었을 정도로 풍성하다는 뜻이다. 개관전 ‘호안 미로’전을 비롯해 ‘1970-80년대 한국의 역사적 개념미술: 팔방미인’(2010년), 예술가와 장애인이 함께하는 공연 및 아카이브 전시 ‘총체적_난_극’(2013년), ‘경기 팔경과 구곡–산·강·사람’(2015년), 이건희 컬렉션특별전 ‘사계’(2023년)는 관객들의 사랑과 주목을 듬뿍 받은 전시였다. “특히 올봄의 목판화 전시는 미술관 개관 이후 최대 관람객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전문가들에게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공백을 메웠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2025년에는 어떤 전시와 사업을 펼치고 있을까. 경기아트프로젝트 ‘한국현대목판화 70년’과 동시대 미술의 현장 ‘기후위기와 RE100’은 공공미술관의 역할과 사명에 충실한 전시라 할 수 있다. 화제를 모은 소장품 상설 기획전 ‘비(飛)물질’과 경기작가 집중 조명전 ‘김나영&그레고리 마스·박혜수·최수앙’, 그리고 신진작가 옴니버스 ‘박예나, 김민수, 강나영’까지 5개의 전시가 진행된다. 굵직한 전시가 미술관의 오른쪽 날개라면 촘촘하게 연결되는 ‘맞춤형 교육프로그램’과 ‘무장애 경기도미술관 전시안내 앱’, ‘체험형 미술자료실’ 및 ‘문화 자원봉사 양성교육’ 운영은 왼쪽 날개라 할 수 있다. 경기도미술관호를 지휘하는 전승보 관장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 “경기도미술관은 경기도와 세계를 연결하며 일상생활의 삶에 접근하는 미술관, 미술의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관점을 통해 복잡하고 다양해지는 현대 사회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현대미술관으로 자리 잡고자 합니다.” ■ 동시대 미술의 현장전 한국현대목판화 70년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특별한 전시가 3월부터 6월까지 열렸다. 유채린 학예사의 도움말을 들어본다. “1950년대부터 활발하게 진행된 현대목판화의 흐름과 주요 작가의 작품을 전시해 ‘목판미술’의 당대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묻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1950년대부터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목판화는 전통성과 향토성을 기반으로 작품이 제작됐는데 1960, 70, 80, 90년대까지 시대별로 목판화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흐름을 충실히 담아내고 있지요.” 한국 현대목판화를 전체적으로 조명하며 지나간 흐름과 사건을 예술적인 관점에서 고민해 보는 이 기획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10월까지 이어지는 기후위기와 RE100를 주제로 한 ‘동시대 미술의 현장전’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할까. 이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김현정 학예연구사의 해설에 귀를 기울인다. “기후위기와 자연생태 환경, 재생에너지 사용에 관한 고민을 담았습니다. 불안한 일상을 예술적 은유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통해 현재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가늠해 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는 기획전시실 1과 2에서 영상과 회화, 조각, 설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가 맞닥뜨린 현실의 위기를 예술적 언어로 발언한다. “순환하는 자연에 비해 인간은 아주 작은 존재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기획됐지요. 참여 작가들은 기후위기 시대에 재생에너지와 관련된 주제를 은유적인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전문가의 친절한 해설을 들었기 때문일까. 어렵게 보이던 작품이 가깝게 느껴진다. 지금은 자연의 위기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통찰을 담은 작품과 마주해야 할 성찰의 시간이다. ■ 가까이, 더 가까이 경기도 서해안을 비롯해 생태와 갯벌을 주제로 작업해 온 작가들을 초대해 동시대 미술이 인식하는 생태적 삶의 방식을 새롭게 조명한 기획력이 돋보인다. 묵직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작품을 배치한 공간이 시원시원해 답답하지 않은 것도 좋다. 환경의 고전으로 평가되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과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지구’라는 부제가 붙은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그리고 기후학자 조천호의 ‘파란하늘 빨간지구’와 데이비드 웰즈의 ‘2050 거주불능 지구’ 같은 환경 관련 도서를 미술관에서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다. 상설전 ‘비물질: 표현과 생각 사이의 틈’은 어떤 내용일까. “2019년 퍼포먼스를 처음 소장한 국내 첫 미술관으로 현대미술 환경의 변화와 흐름에 더욱 섬세하면서도 활발한 활동이 이뤄져야 한다는 필요성에 공감해 이뤘졌습니다.” 경기도미술관은 그동안 청년을 주목해 역량 있는 청년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청년 작가들의 실험적인 작품을 감상하며 미술의 미래를 상상해 보는 일은 즐겁고 보람된 일이다. 경기도미술관은 교육체험전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미술관을 가까이하는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현대미술을 쉽고 재밌게 즐길 수 있도록 봄가을 단체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실도 고마운 일이다. 지역 기관들과 협력해 현대미술을 접할 기회가 적은 소외계층을 초청해 예술 경험을 제공하는 일에도 열심이다. 매월 마지막 주 문화가 있는 주간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대중 프로그램도 적극 운영하고 있다. 무장애 관람을 위한 ‘경기도미술관 전시안내’ 앱은 획기적이다. 관람자의 위치를 자동으로 파악해 경기도미술관 실내외에 상설 전시되고 있는 35점 작품의 정보를 음성해설, 화면해설, 수어해설 3종으로 제공한다니 얼마나 고마운가. 미술관의 기본정보는 물론이고 진행 중인 전시에 대한 콘텐츠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제작됐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경기도미술관의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를 접할 수 있게 한 이 애플리케이션의 운영을 통해 무장애 관람 서비스를 크게 개선한 것이다. ■ 설레는 마음으로 찾는 미술관 경기도미술관은 문화자원봉사자를 양성하고 지원하는 사업에도 정성을 쏟고 있다. “봉사활동을 희망하는 만 20세 이상의 교육수료자 중에서 경기도미술관 자원봉사자를 선발해 전시실의 질서 유지와 전시해설, 교육프로그램 업무지원 활동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40명의 봉사자가 총 1천267회 활동했을 정도로 미술관과 관람객에게 힘이 됐다. 내년이면 20세 청년이 되는 경기도미술관의 바람은 무엇일까. “누구나 언제든 설레는 마음으로 찾는 ‘모두를 위한 미술관’이 되기 위해 미술관 식구들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년 개관 20주년을 맞아 노후한 시설 개선과 특별전시회에 주력하면서 공공미술관의 품격과 가치를 한 단계 더 높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빛을 닮은 화랑호수와 너른 조각공원이 펼쳐져 있는 경기도미술관은 어느 계절에 누구와 찾아도 좋다. 저녁 바람이 부드러워지고 있다. 주말 가까운 미술관을 방문해 마음에 드는 작품에게 말을 걸어보는 용기를 내보자. 밋밋한 일상이 구월의 능금처럼 향기롭게 변할 것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2. 화성 노작홍사용문학관

시대를 고민한 시인의 시와 육신이 묻힌 무덤과 그가 봤던 책과 원고, 시인이 펴낸 유명 잡지와 그를 기리는 시비는 물론이고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만날 수 있는 행복한 문학관이 있다. 경기 화성시 노작로 206의 노작홍사용문학관은 이 모두를 갖추고 있다. 2010년 3월 개관한 노작홍사용문학관은 작지만 충실하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의 시인 홍사용을 만나러 화성 동탄으로 향한다. ■ 이슬에 젖은 참새가 민족의 아침을 노래하다 노작홍사용문학관 로비에서 1922년 1월 9일 창간된 문예종합지 ‘백조(白潮)’ 창간호 복원품을 만난다. 조선백자에 한 여인이 서 있는 표지 그림이 인상적인 백조 창간호는 홍사용의 문학적 열망과 지향점을 보여준다. 재종형 홍사중과 김덕기의 후원을 받아 순수문학 동인지 백조를 창간한 홍사용은 자신이 편집을 맡지만 3호까지의 발행인은 모두 외국인들에게 맡긴다. 1호는 배재학당의 교장 아펜젤러, 2호는 보이스 여사, 3호는 러시아에서 망명한 훼루훼로를 내세운 까닭은 일제의 검열과 간섭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백조 3호에 홍사용의 대표작 ‘나는 왕이로소이다’가 실려 있다. 홍사용은 왜 자신의 호를 ‘이슬(露) 참새(雀)’로 지었을까. 소아(笑啞), 백우(白牛) 같은 호도 있지만 노작을 즐겨 사용했다. ‘돌부처’와 ‘대리석’, ‘고양이’와 ‘열두박사’ 같은 그의 별명도 재미있다. 1920년대 초 홍사용은 춘원 이광수를 찾아가 인연을 맺는다. 이광수는 1921년 자신의 집을 찾아온 청년 홍사용의 모습을 이렇게 추억한다. “옥색 옥양목 두루막을 입은 표표한 선비가 찾아왔다. 그것이 노작 그대였다. ‘이슬에 젖은 참새’ 하고 우리 웃지 아니하였나. 백조를 낼 무렵은 그대의 득의한 때였다.” 노작이란 호를 사용한 것은 아침을 여는 참새의 귀엽고 맑은 노랫소리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홍사용의 삶’을 보여주는 연보를 홍사용의 글씨로 꾸며 정겹다. ‘청산백운(靑山白雲)’이라 쓴 붓글씨가 눈길을 끈다. 현대의 캘리그래피처럼 푸른 산과 흰 구름을 표현한 홍사용의 예술적 감각이 느껴지는 멋진 글씨다. 무인이었던 부친에게 한문을 배우고 글씨를 배운 덕에 붓글씨가 단정하다. 원고지에 적은 홍사용의 글도 몇 구절 읽어본다. 휘문의숙에 재학할 때 공부를 잘했던 모양이다. ‘남양 홍사용 1등’이라 적힌 시험지에서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홍사용이 보던 책도 전시돼 있다. 1916년 출판된 ‘현토 고문진보’와 너무 낡아 글씨도 희미한 ‘맹자’다. 한국의 연극사를 증언하는 귀한 유물도 있다. 문학은 물론이고 연극에도 심취했던 홍사용이 극단 토월회를 이끌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사진이다. 정장 차림의 홍사용이 동료 연극인들과 어울린 모습이 정겹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성들과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이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은 무엇일까. 1940년 있었던 장남의 결혼사진에서 주례를 선 춘원 이광수의 얼굴을 발견한다. 이 잔치에 초대된 문인과 예술인들은 어떤 사람인지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 근대시의 우뚝한 봉우리 전시실을 둘러보며 우리가 홍사용을 너무나 모른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생전에 한 권의 시집도 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것도 몹시 안타깝다. 노작문학상 운영위원장을 지낸 시인 홍신선이 정리한 ‘홍사용의 정신’이 강렬하다. “이민족의 강점기인 20세기 초중엽 노작 홍사용 선생은 친일의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으셨다. 올곧은 문사적 기개가 어둡고 추웠던 저 궁핍의 시대에도 그렇게 선생으로 하여금 외홀로 형형한 호롱불을 켜 드시게 한 것이었다. 또 우리 신시와 신극 운동의 선구자로서 척박한 겨레 마음에 근대문화의 씨앗을 묻고 크게 싹 틔웠으니 가히 선생은 겨레의 지남(指南)이시자 우리 근대시의 우뚝한 한 봉우리이셨도다.” 유물이 지닌 사연에 빠지면 관람 시간이 길어지기 마련이다. 30세 무렵부터 5년간 홍사용은 미투리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전국을 방랑한다. 1932년 희곡 ‘벙어리굿’을 발표했던 그는 1935년 무렵부터 세검정 근처에 자리 잡고 한의를 공부해 한동안 한의사로 생계를 꾸린다. 1939년 희곡 ‘김옥균전’을 쓰다가 일제의 검열로 붓을 꺾어버린 홍사용은 1947년 마흔일곱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문인과 예술인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추모한 글들이 한결같이 절절하다. 청마 유치환은 홍사용을 ‘가장 어진 조선의 심장’이며 이 땅 청년들의 길을 밝힌 ‘호롱’으로 표현한다. 청록파 조지훈 시인이 쓴 추도사는 노작이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다. “눈감으면 몇십 년을 하루같이 흰 모자에서부터 흰 신까지 신고 다니던 그 깨끗한 모습, 술은 마실수록 더욱 조용해지고 날 샐 무렵까지 앉은 자리에서 벽에 한 번 기대지도 않던 그 단정한 모습이며 불기(不羈)의 민족 감정 때문에 글 쓸 자리를 고르다 못해 남 먼저 붓을 꺾고 만 그 정신이 역력히 살아온다.” 휘문고보 1년 후배였던 소설가 월탄 박종화의 ‘홍노작 영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선생이 사랑하던 우리 향토에 조국의 봄이 와서 노랑 저고리 개나리와 분홍치마 진달래꽃이 필 때와 조선의 가을이 와서 단둘이 조국의 붉은 마음 토할 때에 아, 선생의 추억을 어떻게 견딜 수 있으며 이 강산의 바람, 이 향토의 흙내, 이 백성의 노래 앞에 선생이 없이 우리들만 혼자 이 향토의 사랑 어찌 받을 수 있으리오. …아, 우리는 선생을 자연에 장사치 않고 우리의 가슴속에 길이길이 묻어두나이다.” 홍사용의 다정다감하고 고고한 모습을 알려주는 문인들의 추모사를 직접 볼 수 있어 감사하다. ■ 노작 홍사용을 기리는 화성인들의 열정 2층은 제2전시실을 비롯해 강의실과 작가의 방, 아동·청소년 자료실, 기획전시실, 북카페가 있다. 화성시는 홍사용을 기리는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노작홍사용문학관은 매년 ‘노작문학제’을 열고 ‘노작문학상’을 시상한다. 홍사용의 문학정신을 기리고자 2001년 제정한 노작문학상은 그해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 활동을 펼친 시인에게 수여했고 2018년부터는 한 해 동안 출간된 시집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시집에 수여하고 있다. 한편 ‘노작홍사용창작단막극제’는 근대문학과 신극운동을 이끈 홍사용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고 일제의 억압으로 중단됐던 홍사용의 작품 활동이 후속 세대를 통해 다시 이어나가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시작됐다. 홍사용이 활동한 ‘산유화회’에서 이름을 빌린 시민극단 ‘산유화’는 시민이 주체가 되는 연극동아리로서 노작홍사용문학관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연극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극 연출가, 배우 등을 초빙해 연극 이론과 실제에 대해 배우고 배우와 스태프로 참여해 연극을 만드는 시민 동아리이다. ‘우리동네 작은 영화관’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독립영화 및 예술영화를 상영해 시민들에게 다양한 문화예술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시인과 함께 걷는 시 숲길’은 문학관 뒤편 에코벨트에서 자연의 정취를 느끼며 시민의 건강과 문화 향유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작가의 작품과 함께 강연, 대담회 등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시민 참여형이다. 작가와 음악가를 초빙해 작품과 음악을 같이 감상할 수 있는 ‘문학이 함께하는 음악회’도 시민들의 반응이 좋다. 기획전시도 연 2회 꾸준하게 열린다. 9월2일부터 11월2일까지 하반기 기획전시 ‘남궁산 장서표전(展)-별 하나, 책 하나’도 볼거리가 풍성하다. 노작홍사용문학관은 작지만 내실 있는 콘텐츠와 공간 구성이 특징이다. 지역민과 작가 지망생들이 문학적 감수성과 교양을 쌓고 창작 역량을 높이는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는 멋진 문학관이다.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1. 안성 박두진문학관

초가을과 어울리는 멋진 노래가 있다.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멀리서 온다’로 시작하는 ‘하늘’이란 노래다. 가곡 ‘꽃구름 속에’도 산책하며 흥얼거리기에 좋다. 1980년 대학생들이 ‘해야 솟아라’는 가사만큼이나 씩씩하게 노래해큰 인기를 얻었던 ‘해’라는 노래도 있다. 이 노래들은 모두 박두진의 시에서 비롯됐다. 박두진 시인의 고향은 경기 안성이다. 안성시 보개면 남사당로 198-11에 ‘해’의 시인이자 ‘청록파’ 시인 혜산 박두진을 기리는 박두진문학관이 있다. 2018년 11월 개관한 박두진문학관은 시인의 문학작품과 서예작품, 수석 등 시인의 숨결과 손때 묻은 유품을 만날 수 있는 행복한 공간이다. 문학관 벽에 새긴 해가 관람객을 반기는 듯하다. ■ 어둠을 몰아낸 시인의 뜨거운 숨결을 만나다 ‘해’의 시인 박두진은 1천여편의 시와 400편이 넘는 산문을 발표했다. 아호를 혜산(兮山)이라 했던 박두진은 1916년 안성에서 태어나 ‘고장치기’로 불리던 안성 보개면 동신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고 1934년 안성을 떠날 때까지 20여년을 살았다. 안성의 자연은 박두진 문학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박두진문학관 상설전시실은 세 부분으로 구분돼 있다. 1부 ‘박두진의 시를 읽다’는 박두진의 문학적 노정과 시인이 펴낸 시집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즐거운 공간이다. 2부 ‘박두진의 일상을 보다’는 박두진의 일상생활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서재를 재현해 놓은 정겨운 공간이다. 3부 ‘박두진의 예술세계와 만나다’는 시인이 강을 뒤져 찾아낸 수석과 예술성이 짙은 붓글씨와 그림, 글씨가 새겨진 도자기 등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활동한 박두진의 작품과 시인의 마음을 탐구할 수 있는 재미난 공간이다. 문학잡지 ‘문장’은 박두진을 세상에 알린 것이기에 더욱 눈길이 간다.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던 1930년대 말, 박두진은 어둠을 물리치는 아침 햇살처럼 조선 문단에 등장한다. 1939년 6월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문장에 ‘향현’과 ‘묘지송’을 발표하고 같은 해 9월 ‘낙엽송’, 이듬해 1월에 ‘의(義)’, ‘들국화’까지 총 3회의 정지용 추천을 받으며 시인으로 등단한다. 당대 최고의 시인 정지용이 박두진의 문학적 재능을 발견한 사실이 주목된다. 문장은 암울한 식민지 상황에서도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자연’을 통해 희망을 노래한 박두진의 숨결이 스며 있다. 1941년 4월 일제가 문장을 강제로 폐간한 이후에도 박두진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숨어 한글로 시작(詩作)을 이어간다. 1945년 8월 광복으로 박두진의 문학은 찬란한 꽃을 피운다. 두 권의 시집을 함께 살펴본다. 빛깔은 누렇게 바랬지만 싱싱한 생명력이 가득한 ‘청록집’과 ‘해’다. 청록집은 1946년 6월 문장을 통해 등단한 문우 조지훈·박목월과 함께 자신이 일하던 출판사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시집이다. 표지에 붉은 글씨로 해라고 제목을 단 시집 ‘해’는 1946년 발표했던 ‘해’를 표제작으로 삼아 1949년 5월 펴낸 첫 개인 시집이다. 김용준이 표지 디자인을 맡았던 사실도 흥미롭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현실을 해를 통해 극복하려는 시적 의지가 돋보이는 이 시집은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저항정신과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는 ‘거미와 성좌’(1961년), ‘인간밀림’(1963년), ‘하얀 날개’(1967년 같은 시집도 주목되는 시집이다. ‘수석열전’(1973년)과 ‘속·수석열전’(1976년)도 마찬가지다. 예술화된 자연물인 수석을 중심으로 신앙 세계의 묘사로 이어가던 박두진은 ‘사도행전’(1973년)과 ‘고산식물’(1973년) 같은 시집을 연달아 펴내며 기독교 신앙인의 색채를 드러낸다. 총 42편 2천862행의 대작인 ‘포옹무한’(1981년)을 살펴본다. 1998년 9월16일.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박두진은 자연과 역사를 거쳐 신성을 탐구하면서 60여년간 문학에 매진해 20여권의 시집과 1천여편의 시, 400편이 넘는 산문을 남겼다. ■ 글씨와 항아리에 담긴 시인의 마음을 엿보다 시인의 마음을 닮은 것처럼 보이는 백자 앞에 선다. 독특한 서체로 항아리에 쓴 글씨를 살펴본다. 술병도 있고, 목이 좁은 매병도 보인다. 박두진의 독특한 글씨가 쓰여 있어 전혀 새로운 느낌이다. 단체로 찍은 흑백사진을 살펴본다. 1949년 6월16일 찍은 박두진의 첫 번째 개인 시집 ‘해’ 출판기념 사진이다. 꽃을 들고 가운데 서 있는 박두진을 비롯해 조지훈, 박목월, 최정희, 조연현, 황순원, 구상, 김동리 같은 문인의 얼굴이 보인다. 소설가 김동리는 “문학적인 양심과 긍지로서 나는 박두진씨의 제1시집 ‘해’를 우리 문학의 고전이라고 말해 두고자 한다”며 극찬했다. 문학평론가 조연현은 “박두진은 이 한 편으로써 유언 없이 죽을 수 있는 인간이 돼 버렸는지도 모른다”는 말로 시인으로서 최고의 극점에 올라선 박두진의 문학적 성취를 축하한다. 시인 정지용은 박두진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박두진이 쓴 ‘지용의 인상’ 자필 원고는 이런 궁금증을 풀어준다. 맑고 고운 시로 사랑을 받는 이해인 수녀의 편지가 보인다. 이해인 시인은 박두진을 무척 존경했다. 이해인의 시집 ‘민들레 영토’의 표지 글씨를 써 준 이가 바로 박두진 시인이다. 시인을 책상 앞에 앉게 했을 ‘원고청탁서’와 먹향이 배었을 연적도 사랑스럽다. 박두진 시인이 가장 오래 근무한 학교가 연세대였다. 연세대 1회 졸업기념 사진첩은 시인의 이력을 보여준다. 책꽂이와 책상이 놓여 있다. 글 쓰는 일에 맞춰져 있었던 박두진의 일상을 보여주는 공간이 반갑다. 강의가 없는 날은 아침부터 책을 읽거나 청탁받은 원고를 썼고 글을 쓰다가 시상이 떠오르지 않거나 마음이 답답해지면 남한강으로 수석 채집을 다녔다. 대나무로 만든 단소를 보며 시인은 무슨 노래를 즐겨 불렀을까 상상해 본다. 고가구들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수집한 것이라고 한다. 도자기를 사랑한 시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림처럼 보이는 독특한 시인의 글씨를 살펴본다. 박두진 시인은 캘리그래피가 유행할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이 아닐까. 시인이 직접 붓글씨를 쓰며 마음을 가다듬었던 도자기에 눈길을 멈춘다. 친필 합죽선(合竹扇)이나 출판계약서도 시인의 체취가 가득한 유물이다. 흘러가는 물처럼 쓴 ‘상선여수(上善如水)’란 글씨에서 검은 뿔테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박두진 시인의 맑은 눈빛을 떠올린다. ■ 가을에 떠나는 시인의 마을 2층 기획전시실에서는 특별기획전 ‘편지가게 혜산-두진에게 보낸 편지’가 열리고 있다. 박두진 시인이 지인들에게 받은 편지에는 무슨 사연이 들어 있을까. 스승의 안부를 붇는 제자의 편지, 문학을 공부하는 후학의 문학적 고민, 시인을 초청하는 기업 및 국가의 문서에 이르기까지 시인 박두진을 향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시인 박두진의 인품과 시인을 사랑하는 가족과 제자, 지인의 마음을 통해 시인의 모습을 그려보는 시간이 즐겁다. 박두진 시인을 기리는 문학 명소가 여러 곳에 있다. 금광호수 둘레에 만들어진 ‘박두진문학길’은 가장 멋진 곳이다. 대학에서 은퇴한 박두진 시인이 금광호수와 푸른 들판과 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집필실을 마련하고 예술활동을 펼친 현장이다. 고요한 호수의 숲길을 걸으며 곳곳에 설치한 박두진의 시를 음미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박두진의 문학적 상상력을 길러줬던 비봉산 자락에 시인의 묘지가 있으니 찾아보면 좋겠다. 박두진문학관이 비봉산과 마주 보고 있는 까닭이다. 안성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안성박물관과 맞춤박물관을 비롯해 안성3·1운동기념관도 둘러볼 만하다. 박두진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는 안성맞춤랜드는 잔디광장, 수변공원을 갖추고 있어 사계절 어느 때 찾아도 좋은 곳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20.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

한강과 서해가 만나는 김포시는 독특한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일찍부터 주목받은 지역이다. ‘해동의 제갈량’으로 불리며 조선 초기에 경세가로 이름을 떨친 눌재 양성지, 한국의 차(茶)문화를 꽃피운 한재 이목,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중봉 조헌 같은 분은 김포가 배출한 빼어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말살하려는 총독부의 정책에 맞서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데 헌신한 권덕규 선생(1891~1950)과 2·8독립선언을 주도하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돼 옥고를 치른 김도연 선생(1894~1967) 등 독립투사들이 활약한 역사의 고장이다. 특히 김포는 3·1운동을 치열하게 벌인 지역으로 이름이 높다. 이런 빛나는 역사를 가진 김포시는 2013년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관장 최규창)을 개관해 청소년 및 지역주민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고 있다. ■ 8일간 이어진 항쟁의 역사 “김포는 1919년 3월 양촌면(현 양촌읍) 오라니장과 월곶면 군하리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조직적으로 치열하게 벌였습니다. 김포지역에서 벌어진 3·1운동을 재조명하고 애국지사의 투철한 애국정신을 영원히 기리는 한편 김포지역의 항일독립운동사에 대한 바른 이해와 독립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2013년 3월1일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을 개관했습니다.” 권민지 학예사의 안내로 독립운동기념관을 둘러본다. 독립기념관이 들어선 곳은 3·1운동을 벌였던 역사의 현장이어서 더욱 소중한 공간이다. 기념관 입구에서 만난 무궁화꽃동산이 김포 독립운동의 성지임을 말없이 알려준다. 전시관에서 김포의 옛모습을 담은 흑백사진을 통해 개항기 김포의 치열한 역사를 더듬어본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났을 때부터 김포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는 항쟁의 터전으로 인식됐다.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이 지도상에서 사라진 이후 일제는 칼을 찬 헌병과 총을 든 군대를 동원해 한국인을 감시하고 억압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았다. 1919년 3월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학생 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시작된 만세운동의 거센 불길은 김포로 이어진다. 1919년 3월22일 오후 2시, 김포 월곶면 군하리장터에서 400여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른다. 월곶면의 박용희, 성대영과 군하리의 배일환과 이살눔, 이병린 등이 주도해 시작된 만세운동의 불길은 김포 전 지역으로 번져 나간다. 하루가 지난 23일에는 양촌면 오라니장터에서 오후 2시와 4시 2천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인다. 같은 날 임동면 가양리에서 150명의 주민이 한밤중에 횃불 시위를 벌인다. 횃불 시위는 이웃으로 빠르게 번져 간다. 25일 고촌면에서, 26일 군내면에서, 27일 양촌면에서, 28일에는 월곶면 함반산에서 횃불 시위를 벌여 일제를 놀라게 한다. 29일에도 월곶면 군하리장터와 갈산리에서 각각 400여명이 시위를 벌인다. 경기도지에 따르면 김포에서 벌어진 집회 횟수는 12회에 달하며 연인원 1만5천명에 이르는 시위에서 부상자가 120명, 체포된 사람이 200명이나 됐다. 당시 미주지역에서 발행된 ‘신한민보’는 3월23일 김포지역의 만세 시위운동에 대해 ‘1만여명의 대관중’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8일간 이어진 만세운동은 김포 사람들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잘 보여줍니다. 닷새 동안 이어진 횃불 시위도 김포지역의 독립운동 열기가 얼마나 뜨겁게 타올랐는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 독립투사를 기억하다 지난해 새롭게 단장한 상설전시관은 제1상설전시실, 김포 독립운동가 추모의 공간, 제2상설전시실 등 세 구역으로 구분돼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흑백사진이다. 1916년 일본인이 찍은 일제강점기 김포의 풍경을 보여준다. 한국인을 감시하고 억압했던 김포경찰서와 순사 주재소의 건물이 위압적이다. 악독한 식민지 통치 기관이기에 광복 80년을 맞은 지금 봐도 마음이 불편하다. 사진과 설명을 보면서 일제가 얼마나 한국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관리했는지를 거듭 확인한다. 김포에서 일찍부터 청년교육에 정성을 쏟았던 사실도 흥미롭다. 금릉학교를 비롯해 광진학교, 분양학교, 분남학교, 분남보성학교, 신명의숙, 광희학교, 노동학교 등 공사립학교가 이런 역할을 담당한다. 분남학교가 참여하면서 지역에 알려진 국채보상운동에 김포의 여성들이 적극 참여한 사실이 주목된다. 김포에서 벌어진 3·1운동에도 여성들이 적극 참여한다. 안경을 쓴 여성은 누구일까. “3·1운동 당시 33세의 이살눔(본명 이경덕·1886~1948)은 김포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분으로 ‘김포의 잔다르크’ 또는 ‘김포의 유관순’으로 불렸습니다.” 설명을 들으며 이살눔의 형확정통지서(1920년)와 사면통지서(1927년)를 다시 살펴본다. 누렇게 색이 바랜 종이가 우리 독립투사들의 굳건한 독립 의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수의를 입고 찍은 어수갑 선생의 표정이 단단하다. 1919년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한 그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가 체포돼 징역을 살고 1926년 순종황제의 인산일인 6월10일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전단 5만장을 인쇄한 사실이 발각돼 다시 감옥에 수감된 불굴의 독립투사다. ‘김포독립운동가 추모의 공간’에서 박충서를 비롯한 김포의 독립투사를 만나며 생각에 잠긴다. 대부분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분들이지만 이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건설하고 후손들에게 광복을 선물한 영웅이기 때문이다. ■ 엽서로 만나는 식민지 조선의 풍경 100년 전의 시장과 탑골공원을 보여주는 풍경 사진을 엽서에 들어 있다. 독립기념관 별관 기획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식민지 조선의 풍경을 보다’는 매우 흥미로운 기획이다. 내년 6월30일까지 진행되는 특별기획전은 엽서를 통해 우리의 과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간편한 우편 수단으로 시작된 사진엽서는 점차 다양한 이미지가 등장하면서 근대 사회·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시각 매체로 부상합니다. 더구나 서구에서는 사진과 인류학,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이 만나 오리엔탈리즘 성격을 띤 사진엽서 이미지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특별전을 기획한 학예사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엽서가 등장한 것은 대한제국을 방문한 서양인과 일본인 사진관, 인쇄소를 통해서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일제는 우편사업을 통감부에서 관리하며 조선의 풍경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 “눈여겨볼 점은 일본이 사진엽서 같은 다양한 시각 매체를 활용해 서구와 같은 시각으로 조선을 타자화했고 식민 지배 이데올로기와 정당성을 선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인에게 인기가 많았던 금강산 등 조선 명소를 소개하는 엽서와 한국의 풍속을 소개하는 엽서를 통해 일제의 시선이 담긴 식민지 조선의 풍경은 어둡고 쓸쓸하다. ■ 김포,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땅 김포시는 3·1운동을 비롯해 독립운동의 역사를 보여주는 김포시독립운동기념관을 설립해 자긍심을 청소년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지만 김포시처럼 독립운동기념관을 세운 지자체는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김포시의 결정은 지역의 모범이 되고 있다. 김포시에는 이 밖에도 덕포진교육박물관, 보름산미술관, 김포 외할머니 부엌, 김포다도박물관 등 김포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특별한 박물관과 미술관이 즐비한 역사와 문화의 도시다. 올해 맞이한 광복 80주년은 분단 80년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역사의 고장 김포에서 희망의 기운이 솟구치기를 기원한다. 김포가 지금까지 분단의 아픔을 보여주는 고난의 땅이었으나 가까운 장래에 김포시가 분단의 아픔을 딛고 협력과 상생의 땅, 희망의 도시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9.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음을 세계인들에게 보여준 ‘빛의 혁명’은 1919년 3·1운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3·1운동은 우리 역사를 바꾼 위대한 사건이다. 최근 3·1운동을 ‘3·1혁명’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화성시독립기념관(관장 한동민)은 3·1운동의 위대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3·1운동이 시작된 지 한 달이 지난 1919년 4월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됩니다. 우리 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이라 선언하고 있지요. 이처럼 3·1운동은 대한제국의 회복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대한민국을 건설한 혁명입니다.”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은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3·1운동을 가장 뜨겁게 증언하는 공간이다. “3·1운동에 관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탑골공원과 아우내장터, 제암리 학살 사건이 실려 있습니다.” ■ 두렁바위에 흐르는 피의 역사 3·1운동 당시 화성은 안성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만세운동을 벌인 곳으로 꼽힌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99호’로 지정된 제암리 학살 현장은 그날의 참혹한 사건을 증언하고 있다. 화성시는 2001년 개관한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을 통해 기념과 추모 사업을 활발하게 벌였다. ‘4·15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 105주년을 맞은 2024년 4월15일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너른 대지(2만1천322㎡)에 세워진 독립운동기념관은 화성의 3·1운동과 일제의 만행, 독립을 향한 선조들의 활동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의병 활동과 계몽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진 화성에서 1919년 봄 만세운동도 격렬하게 전개한다. 성난 주민들이 일제의 행정기관인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불태우고 총칼로 주민을 위협하던 순사 두 명을 처단한다. 화성 사람들의 격렬한 저항에 충격을 받은 일제는 잔혹한 보복을 계획한다. 4월15일, 육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가 군인 11명을 데리고 제암리로 들어와 15세 이상 남자들을 교회에 밀어넣은 후 문을 잠그고 총을 난사하고 불을 지른다. 다시 옆 마을 고주리로 건너간 일본군은 만세를 불렀던 김흥렬 일가 6명을 모두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지른다. ‘제암·고주리 학살사건’은 일제가 3·1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한 사건이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1889~1970)는 제암리 학살 소식을 듣고 화성을 찾는다. 수원역에서 자전거를 타고 일경의 눈을 피해 제암리에 도착한 그는 불에 탄 교회와 마을을 카메라에 담아 일제의 만행과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린다. 스코필드 박사가 찍은 흑백사진은 그날의 참혹한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가족을 잃고 넋이 빠진 두 여인의 주저앉은 모습이 슬프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고통은 평생 이어졌다. ■ 3·1운동은 평범한 민중이 자유를 향해 펼친 위대한 몸짓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은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어린이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좁고 긴 통로는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우리 선조들이 보내야 했던 어두운 세월이 길었음을 상징하는 듯하다. 상설전시실은 국권을 빼앗긴 나라의 현실을 상징하듯 어둡다. 미래의 주역이 될 아이들의 교육에 희망을 걸었던 화성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보흥학교, 전곡사숙, 제하여학교 사진은 뜨거운 교육열을 보여주는 소중한 증거물이다. 향남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가을운동회도 튼튼한 몸으로 실력을 길러 나라를 되찾으려는 화성인들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다. 남양지방금융조합의 이사 이로카와가 1908년 여름에 특별한 기록을 남긴다. 그는 남양 보흥학교는 아동에게 배일사상을 주입하는 ‘폭도 양성소’이며 남양군은 배일사상이 가장 격렬한 곳이라는 기록이다. 이처럼 화성 사람들의 항일정신은 그 뿌리가 깊다. 일제는 한국인의 저항을 막기 위해 총칼을 찬 헌병을 앞세워 무단통치를 시행한다. 그러나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으로 일제의 총칼에 맞선다. 3월21일 동탄에서 시작된 화성의 3·1운동은 송산, 서신, 우정, 장안, 향남, 팔탄 등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간다. 많은 사람이 다치고 목숨을 잃는다. 상소문처럼 길게 펼쳐진 문서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을까. “순사부장을 때려죽인 주모자로 몰려 감옥에 투옥된 문상익, 홍준옥을 구출하기 위해 송산면민이 연명한 탄원서입니다.” 송산면장 홍달후와 면민 33인이 서명하고 인장을 찍은 탄원서는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연상케 하는 진귀한 유물이다. “홍면옥 선생은 송산면에서 사흘 동안 전개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죄목으로 체포돼 무려 15년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에게 일제가 내린 최고형이 3년이니 홍 선생이 받은 15년은 가장 긴 형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진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한 날을 기념해 찍은 홍 선생의 사진이 볼 수 있는 것은 뜻밖의 행운이다. 두 개의 기왓장과 글자가 새겨진 은주전자와 은술잔은 어떤 사연을 품고 있을까. “이 유물의 주인공은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꽃을 든 홍헌 선생입니다. 홍 선생은 일제의 방화로 졸지에 집을 잃은 이웃들에 자신의 산을 개방해 목재를 나눠줘 집을 짓도록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은으로 제작한 주전자와 술잔은 홍헌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마을 사람들이 고마운 마음을 담아 제작해 전달한 물품이다. 은주전자에 새겨진 글자 ‘홍헌군정’은 ‘홍헌 선생께 드립니다’라는 뜻이다. 1919년 4월15일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일제가 벌인 만행을 영상물로 체험한다. 봄꽃이 활짝 핀 봄날의 평화로운 마을 풍경은 이내 바뀌어 꽃잎이 지고 어둠이 몰려온다. 천둥과 벼락이 치는데 건물의 사방을 벽으로 막고 문이 닫힌다. 총성이 울리며 벽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불길이 번져 모두를 태워 버린다. 그날 쓰러져 간 순결한 넋들은 하늘로 올라가 어둠을 비추는 별이 된다. 기념관에서 마주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던 평범한 사람들이다. 3·1운동 피살자명부, 아리타 판결문을 자세히 살펴본다. 주민 29명의 살해를 지휘하고 마을을 불 지른 일본군 장교 아리타의 무죄를 선언한 ‘아리타 판결문’은 이제까지 공식적으로 한 번도 사과하지 않은 일본 정부의 민낯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낡은 유리병은 학살지에서 발굴된 것으로 그날의 참상을 증언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화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홍헌, 왕광연, 홍면옥 선생의 출옥 기념사진은 감동적이다. ■ 세계를 향한 3·1운동의 성지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은 시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활동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7월 초에 시작된 2025년 자원봉사자(도슨트) 양성과정 교육프로그램은 이런 기념관의 방향성을 잘 보여준다. ‘화성지역의 근대적 변화와 자강운동’(한동민)을 시작으로 ‘칼을 든 민중: 의병 이야기’(김상기), ‘3·1운동, 전국에서 울려 퍼진 독립의 외침’(박찬승), ‘1919년 화성지역 3·1운동의 특징’(박환), ‘제암리·고주리 학살 사건의 재인식’(성주현),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용기’(김승태)로 이어지는 대중 강좌를 통해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역사를 널리 알릴 계획이다. 상설전시 안내문에서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의 설립 목적과 지향을 확인한다. “우리의 독립은 몇 사람의 영웅들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두려움과 고난을 무릅쓰고 일어섰던 바로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3·1운동을 온전히 기념하는 국립기념관의 필요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여러 조건을 두루 갖춘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이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인들에게 3·1운동의 위대성을 온전히 보여주는 국립기관으로 거듭나기를 빌어 본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8. 용인 경기도어린이박물관

건물 벽이 예쁘다. 색깔이 다른 네모난 타일에 적힌 글자를 연결해 소리내어 읽어본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같은 친숙한 노랫말을 새긴 경기도어린이박물관 마당에 어린 손님들이 가득하다. 하늘색과 노란색 옷을 입은 아이들이 친구의 손을 잡고 선생님을 따라 박물관으로 들어가고 있다. ■ 인공지능으로 만나는 자연과 생태 경기도어린이박물관 안은 바닷속 풍경이다. 천장에는 파도처럼 보이는 은빛 조각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고 파란 돌고래가 두 마리가 매달려 있다. 휴대전화를 꺼내 안내문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자 돌고래가 바닷속을 헤엄치듯 부드럽게 움직인다. 1층부터 3층까지 계단으로 이어진 박물관 곳곳은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시물로 가득하다. 김지애 학예사의 안내를 받아 3층부터 어린이박물관 관람을 시작한다. 계단과 복도로 이어지는 전시장의 독특한 배치가 상상력을 자극한다. 14년 만에 새롭게 단장했다는 3층 전시장은 최첨단 과학기술로 꾸몄다. 천혜인 학예사는 왜 이 전시장에 ‘두근두근 연결된 우리’란 제목을 달았는지 그 까닭을 들려준다. “이 공간은 인간이 아닌 다양한 종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미지의 생명과 어울리도록 꾸민 공간이지요.” 첨단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공들여 꾸민 공간답게 유치원생은 물론이고 초등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단다. 아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아바타가 여럿이다. 마음에 드는 아바타를 선택해 모니터에 부착된 버튼을 누르면 순간 커다란 화면 속 ‘공생의 숲’ 친구들 사이에 아바타가 ‘짠’ 하고 나타난다. “아이들은 가상의 생명체나 지구의 한 식구인 동물들을 만나며 지구 생태계의 구성원으로서 연결과 공생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연두색 유령이 물에서 나타날 때 화면 아래에 글자가 뜬다. “바로 그때, 호수에 작은 기억 한 방울이 톡, 떨어졌어요. 거기서 특별한 친구, ‘공생이’가 태어났답니다.” 숲속의 요정처럼 귀엽게 생긴 ‘공생이’를 따라 숲을 탐험하다 보면 모든 생명체는 서로를 도우며 함께 사는 존재임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아이들도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기 마련이다. “나는 어떤 친구와 도움을 주고받을까.” 자신이 선택한 아바타와 찍은 사진을 출력할 수 있는 기능도 갖추고 있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땅에서 보내는 초대’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생명체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미생물의 존재를 애니메이션으로 알려준다. ■ 넌 이름이 뭐야 엄마와 함께 전시실을 찾은 대여섯 살 먹은 아이가 바다거북에게 말을 건다. “넌 이름이 뭐야.” 거북이가 눈을 껌벅이며 대답한다. “난 오로라라는 이쁜 이름이 있어.” 아이가 웃으며 다시 질문을 던진다. “질문을 하면 할수록 데이터가 축적돼 더 똑똑한 거북이가 됩니다.” 김지애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니 바다거북의 눈이 지혜롭게 반짝이는 듯하다. 그런데 바다거북의 주변에 그물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인간이 함부로 버린 쓰레기가 가득한 바다에 사는 거북을 보며 어른들도 자연환경을 돌보지 않았음을 반성한다. 커다란 손가락이 달린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사진을 찍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람의 신비로운 몸은 미래에 어떻게 바뀔까.’ 작가의 문제의식처럼 머지않은 미래에 인간의 신체 일부가 기계로 대체될 것 같아 두렵다. 태블릿 PC 앞에서 재미난 표정을 짓는 아이 곁에 다가간다. 모니터 속의 인물도 아이처럼 입을 크게 벌린다. “이 전시장에서 AI 콘텐츠 14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이미 우리 일상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지요.” 인공지능이 편리해도 손과 발로 직접 해야 하는 일은 여전히 남아 있다. 구름처럼 생긴 탁자들이 둥글게 놓여 있는 곳에서 몸으로 움직이는 행위가 중요함을 새삼 느낀다. 중앙에 놓인 탁자 위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음식물이 가득하다. “이것은 박물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이 손으로 만든 천연비누입니다.” 박물관 관계자는 ‘기이한 미래 식탁: 비누 음식 만들기’라는 프로그램이 현재 진행 중임을 알려준다. 토끼처럼 두 귀를 쫑긋 세운 모자를 쓴 쌍둥이 자매가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자매를 지켜보는 엄마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아이들이 재미있게 체험할 수 있는 전시와 프로그램을 풍성하게 마련한 것이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의 최대 강점이다. ■ 입장 바꿔 생각해 봐 전시실 한쪽에서 친숙한 동물 친구들과 만난다. 남극의 펭귄과 초원의 치타, 숲속의 원숭이와 앵무새가 주인공이다. ‘너의 시선, 나의 세상’에 등장하는 동물 친구들은 자유를 구속하는 우리 안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다. 우리를 벌려 안으로 들어가 본다. 관람객은 잠시 우리에 갇힌 동물의 처지가 된다. 우리 안에 갇힌 사람은 밖에 있는 사람 혹은 동물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우리 속 둥근 탁자 위에 놓인 나무 조각에 이런 질문이 적혀 있다. “나는 동물들에게 친절한 존재일까, 아니면 무서운 존재일까요.” 이런 질문도 있다. “자꾸 내 사진을 찍으면 괜찮을까요.” 아이들이 동물의 입장에 공감하고 모두가 존중받는 미래 공동체를 상상하도록 공간을 구성한 작가의 상상력이 참신하다. 어른은 물론이고 아이들도 삼각형 출입구로 들어갈 때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널따란 공간의 바닥이 나무와 버섯이 자라는 푸른 숲이다. 아이들이 움직일 때마다 숲의 풍경이 변한다. ‘수리솔 수중연구소’에서 만난 아이들의 표정도 밝다. 수중연구소 옆 넓은 공간은 무엇일까. “이곳 ‘데구르르 지구별마당’은 다목적 교육 공간이지요. 아이들이 놀고, 만들고, 의자에 앉아 쉬기도 하는 곳입니다.” 어른의 몸보다 훨씬 큰 입과 눈, 뼈가 보이는 손을 전시한 ‘우리 몸은 어떻게?’란 전시장으로 이동한다. 전시장 중앙에 나무처럼 서 있는 것이 온 몸에 피를 공급하는 심장이다. 이처럼 ‘우리 몸은 어떻게?’는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뛰어놀고, 잘 잘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아이들이 스스로 건강을 위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이다. 소중한 우리 몸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어른 관람객에게도 매우 유용한 공간이다. 푸른 빛이 가득한 방에서 아이와 어른들이 둘러서서 팔랑팔랑 공중에서 춤추고 있는 천 조각을 바라본다. ‘바람? 바람! 바람^’은 바다에서는 파도를 만들고, 하늘에서는 구름과 비를 만들고, 들판에서는 민들레 꽃씨를 멀리 날려 보내주는 바람의 역할을 체험하고 배우는 곳이다. 천장에 둥근 구슬들이 별처럼 구름처럼 매달려 있다. 조각가 박선기 작가의 작품 ‘바람’은 여러 가지를 상상하도록 자극하는 재미난 작품이다. ■ 아시아를 대표하는 어린이박물관 2층 전시장에서 하루 두 차례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이 펼쳐진다. “2025 여름방학 프로그램-예술로, 방학생활!” 구호처럼 여름방학에 박물관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예술을 중심에 내세웠다.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 ‘우리말로 우는 날’은 어떤 내용일까. 경기도어린이박물관과 용인대 산학협력단과 협력해 제작한 창작 어린이 연극이다. 김종석 연출가의 작품이다. “우리말로 우는 날은 1946년 어린이 잡지 ‘주간 소학생’에 실린 ‘해방된 짐승들’이란 짧은 희곡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한명희 학예사는 이 연극을 통해 ‘나는 누구일까’, ‘내 진짜 목소리는 무엇일까’, ‘우리말을 잃는다는 건 어떤 뜻일까’를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은 어린이들의 꿈과 호기심,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 설립된 체험식 박물관입니다. 국내 최초의 공립 어린이박물관으로 어린이들이 전시물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 배우며 알아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고안된 공간입니다.”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어린이박물관이다. 우리 아이들의 꿈을 키우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경기도어린이박물관은 행복한 놀이터다. 김준영(다사리행복평생교육학교)

[2025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7.포천 한탄강세계지질공원센터

푸른 하늘이 반갑다. 장맛비가 그친 주말이라 사람들이 붐빈다. 한탄강세계지질공원센터로 가는 길가에 백합을 비롯한 여름꽃이 화사하다. 주상절리를 본뜬 출입구의 높다란 건물벽은 한탄강 계곡으로 들어서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 한탄강의 지질과 역사, 생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2019년 4월에 개관한 한탄강세계지질공원센터는 우리나라 유일의 지질공원 전문 박물관으로 여름철이면 더욱 많은 관람객이 찾는다. 센터 안으로 들어서니 아이 손을 잡은 젊은 부부를 비롯한 관람객들로 분위기가 밝고 활기차다. 후텁지근한 바깥과 달리 센터 안은 시원하고 쾌적하다. 입장권을 사니 절반이 넘는 액수의 지역 상품권을 준다. 카페에서 음료를 사거나 포천의 특산물을 살 때 쓸 수 있다니 선물처럼 고맙다. 디지털 체험관 입구도 한탄강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폭포의 물줄기처럼 빛이 무지개처럼 펼쳐지는 방을 나와 맞은편 방에 들어서니 이번에는 시원한 폭포수가 눈앞에서 쏟아진다. 한탄강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라이브 한탄강’은 널찍하다. 벌써 제법 많은 관람객이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영상으로 한탄강의 역사를 익히고 풍경을 감상한다. 옛사람들도 한탄강의 아름다움에 빠졌던 사실을 겸재 정선의 멋진 산수화로 확인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수십만년 전 과거로 떠나는 여행을 시작한다. 화산이 폭발하자 강물처럼 붉은 용암이 흘러내린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한탄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한탄강의 명소인 화적연 물속으로 물고기들이 헤엄친다. 현무암, 화강암, 응회암 등 한탄강의 암석과 돌단풍, 병꽃나무, 산작약, 포천구절초 같은 아름다운 식물도 만난다. 실감 나게 제작한 디지털 영상은 잠시 동화의 나라에 빠져들게 한다. ■ 용암이 빚은 예술품, 한탄강 이영희 지질해설사를 따라 ‘지질관’에 들어선다. “한탄강은 국내 유일의 주상절리 협곡입니다. 군사지역인 까닭에 생태가 잘 보전돼 여러 종류의 천연기념물과 희귀 동식물이 살고 있습니다.” 한탄강 협곡처럼 구불구불 이어지고 높낮이에도 변화를 준 지질관과 지질문화관의 전시 방식이 관람의 재미를 더해준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돌이 보인다. 제주도의 현무암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배우는 시간도 재미있다. 둥근 버튼을 누르자 검붉은 용암이 강물처럼 흘러내린다. “마그마가 지표 부근에서 빠르게 식어 만들어진 암석은 구멍이 숭숭 뚫려 가볍고 어두운색의 화산암입니다. 반면 마그마가 지하 깊은 곳에서 천천히 식어 만들어진 심성암은 건축에 많이 사용하는 밝은 색깔의 화강암이지요.” 주상절리처럼 생긴 육각형 기둥이 눈길을 끈다. 안내에 따라 구멍 안을 들여다보니 마그마가 굳으면서 만들어진 암석의 구조가 생생하게 보인다. “잠시 시간을 내 이곳을 찾으시면 자연과 생물, 인간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질공원을 재미있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2015년 한탄강을 국가지질공원으로 인증받은 후 포천시가 세계지질공원 인증을 추진하며 벌인 사업 방식이 흥미롭다. “수도권 지구과학교사연합회와 포천시가 협력해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질 체험학습 교실을 운영했지요. 이런 노력이 모여 센터가 설립된 것입니다.” 드디어 ‘4D 라이딩 영상관’이다. 관람객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공간이라니 성인이지만 어린이처럼 마음이 살짝 설렌다. 도우미의 지시에 따라 의자에 앉아 안전띠를 착용하고 대형 화면을 응시한다. 한탄강의 시원한 풍경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구불구불한 계곡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세찬 물길을 따라 비행속도가 빨라진다. 의자가 비행 방향에 맞춰 좌우로 움직이고 아래위로 움직이며 덜컹거린다. 직접 전투기를 조종하는 것처럼 관람객의 긴장감을 전달해 몰입도를 높여준다. 드론 전문가가 공들여 촬영한 것이라 산책하면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멋진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최고의 강점이자 매력이다. 한탄강의 명소가 눈앞에서 생생히 펼쳐지던 그 순간의 감동은 잊을 수 없다. ■ 역사와 생명을 품은 깊은 강 2층 지질문화관은 다시 한탄강을 품은 포천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공간이다. 맷돌과 다듬잇돌, 빨래판, 절구와 벼루 등 한탄강에서 난 다양한 돌로 만든 전통시대의 생활용품을 만져보며 옛사람의 손길을 느껴본다. “기공이 없어도 현무암인가요.” 관람객들에게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며 한탄강이 간직한 여러 사연을 들려주는 방식도 재미있다. 발굴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모래내 유적 10호 주거지’ 같은 전시물은 한탄강을 배경으로 살았던 고대인의 생활 모습을 보여준다. 한탄강 물길을 따라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 고소성, 대전리산성 등 삼국시대에 쌓은 성이 즐비하다. 한탄강이 군사요충지였던 사실을 알려주는 유적들이다.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돼 고대사를 다시 쓰게 한 한탄강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됐습니다.” 지질센터와 이웃한 전곡선사박물관은 한탄강의 고대문화를 알려주는 곳이다. 미수 허목, 삼연 김창흡 같은 조선의 문인들도 한탄강을 사랑해 아름다운 풍광을 소개하는 여러 편의 글을 남겼다. 한탄강에는 대교천 현무암 협곡, 비둘기낭폭포, 아우라지 베개용암 등 3개의 천연기념물과 화적연, 멍우리 주상절리 협곡 등 2개의 명승지, 11곳의 지질 명소가 있다. 한탄강에는 희귀식물이 살아가고 있다. 약용식물인 삼지구엽초, 현무암 돌 틈에서 자라는 강인한 야생화 돌단풍과 병꽃나무, 포천구절초, 금마타리, 희귀 난초류인 백운란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인 수달과 황조롱이, 어름치, 두루미, 담비, 맹꽁이, 사향노루, 수원청개구리도 살고 있다. 겨울이면 찾아오는 두루미와 독수리, 큰기러기는 한탄강이 얼마나 생태의 보고인지를 잘 보여준다. ■ 지역주민들과 함께 가꾸는 공간 2025년 1월부터 시작된 주말 체험활동은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체험 방식으로 고정된 전시물이 아니라 디지털 영상과 실감나는 체험으로 지루할 틈이 없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새로운 전시 분위기에 공감하며 즐거워한다. 무지개 시트와 생크림으로 비둘기낭폭포를 재현한 ‘지질케이크 만들기’가 특히 눈길을 끈다. 지질센터의 캐릭터는 ‘탄이’, ‘진이’, ‘천이’ 셋이다. 세 친구는 어린이들의 손으로 창조된다. 지질쿠키 만들기 체험은 암석의 종류와 특징을 쉽고 재미있게 익힐 수 있게 해 준다. 화산 폭발 과정을 체험하며 한탄강 협곡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배운다. 이영희 지질해설사는 “오감을 만족시키는 체험 프로그램은 참가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사전 예약과 현장 예약 모두 가능하니 잊지 말고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세요.” 한탄강세계지질센터는 어린이들과 가깝다. 5월 어린이날에는 ‘지오키즈파티’를 열어 어린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문화 체험과 추억을 선사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국악 공연과 마술쇼, 지질 쿠키 만들기, 친환경 분필 그림그리기, 가족이 함께 관람하는 영화 상영이 이뤄졌다. 가을철에는 센터 야외에서 ‘달빛 고운’ 야간 특별공연을 열어 추억을 선물한다. 비둘기낭폭포와 지질공원센터를 배경으로 전통예술과 대중가요, 화려한 조명이 어우러진 공연으로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2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교동마을’과 ‘신교동마을’은 지역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되돌아보는 뜻깊은 공간이다. 홍수조절댐 건설로 이주한 마을과 주민들의 모습을 기록해 한탄강과 지역 사람들이 긴밀하게 연결된 모습을 보여준다. 포천시는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지역공동체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연거푸 열어 북한지역 확대 등 한탄강 지질공원의 장기적인 종합 발전 방향을 세웠다. 지질센터의 활발한 활동으로 한탄강은 생태와 역사가 숨 쉬는 풍요로운 강으로 거듭나고 있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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