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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 우군’ 확보…중남미에 14조원 지원 나선 중국
━ 최고조 치닫는 카리브해 군사긴장 미국과 글로벌 패권 다툼을 하고 있는 중국은 ‘일대일로(一带一路)’와 ‘글로벌 사우스(남반구 저개발국)’ 전략을 내세워 중남미 공략에 적극 나서고 있다. 중국의 의도는 단순한 경제 협력을 뛰어넘어 중남미에서의 정치·외교적 영향력 확대를 통해 미국에 맞설 토대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촉발한 관세전쟁을 틈타 중남미의 반미 국가들을 우군으로 확보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좌파 정권의 등장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브라질도 그중 하나다. 중국은 최근 브라질과의 경제 협력과 지원을 강화했다. 커피와 대두 수입을 늘렸고, 열대우림 보존을 위해 브라질이 추진하는 기금 조성에도 협력키로 했다. 중국은 페루에서도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미국을 견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중국 국유해운사인 중국원양해운(COSCO)이 지난해 건설한 창카이 항만을 남미 공략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계획이다. 현재 중국은 태평양 동부의 창카이항에서 출발해 브라질 상파울루를 해상과 육상으로 잇는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친미 정권이 집권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에서도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다. 지난해엔 조건 없이 아르헨티나가 요구한 179억 달러(약 26조원) 규모의 통화 스와프 연장을 허가했다. 관련기사 고립주의 트럼프, 뒷마당 중남미선 선택적 팽창주의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 1989년 파나마 전철 밟을까 시진핑 중국 주석도 중남미에서의 입지 강화를 위해 직접 나서고 있다. 시 주석은 지난 5월 베이징에서 ‘중국-라틴아메리카·카리브해 국가공동체(CELAC) 포럼’을 열고 중남미 국가들의 지도자들을 대거 초청했다. 룰라 브라질 대통령과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 등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이 행사에서 시 주석은 “관세전쟁과 무역전쟁에서 승리는 없다. 단결과 협력을 통해서만 발전과 번영을 이룰 수 있다”면서 트럼프 정부의 보호주의 정책을 비난했다. 그러면서 “중남미는 중국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오랫동안 우호적인 교류를 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운명공동체의 미래를 함께 열어가자”고 제안했다. 중국은 향후 중남미 지원을 위해 660억 위안(약 13조7500억원) 규모의 차관을 제공할 계획이다. 이같은 협력을 바탕으로 실제 중국과 중남미와의 교역량은 급격히 증가했다. 지난 2000년 124억 달러였던 무역액이 지난해에는 5184억 달러에 달했다. AP통신은 “중국이 중남미에서 미국의 헤게모니에 강하게 도전하고 있다”면서 “중남미를 지하자원과 농산물의 안정적 공급처로 확보하는 동시에,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에 대한 지지 세력도 키우겠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최익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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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주의 트럼프, 뒷마당 중남미선 선택적 팽창주의
━ 최고조 치닫는 카리브해 군사긴장 휴양지로 유명한 카리브해에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에 대한 군사작전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베네수엘라 앞바다에 핵 항모를 배치했으며, 미 해병대는 현재 상륙작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 작전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운 명분은 마약 카르텔 소탕이다. 하지만 외신들은 중국과 러시아에 밀착하고 있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축출이 미국의 속내라는 평가다. 미국은 지난 1989년에도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파나마에 대한 군사작전을 벌여 정권을 교체시킨 적이 있다. 명분은 민주주의 회복과 마약 문제였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실권자인 마누엘 노리에가를 축출하는 것이었다. 그가 파나마 운하 운영과 관련해 미국에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전문가들은 최근 트럼프가 펼치는 중남미 정책을 ‘돈로주의(Donroe Doctrine)’라고 부른다. 원래 트럼프 외교의 기조는 미국 우선주의와 고립주의다. 미국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다른 나라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과 중동에서와 달리 중남미 문제에 있어서는 선택적 팽창주의 정책을 쓰고 있다. 미국의 뒷마당 격인 중남미가 그만큼 미국의 안보 등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일 “먼로 독트린은 수 세기 동안 공산주의, 파시즘, 외국의 침략 등으로부터 미주 대륙을 지켜왔다”면서 “나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이 오래된 정책을 자랑스럽게 재확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두로, 튀르키예 망명할 것” 관측 나와 현재 베네수엘라 인근 카리브 해역의 긴장은 최고조로 치닫고 있다. 미 핵 항공모함인 제럴드 R 포드함을 비롯한 함정들과 F-35C 전투기 그리고 미 해병대원 1만2000명이 베네수엘라 본토 타격 태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초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마약 밀매 집단의 우두머리’이며, 우리는 해상뿐 아니라 지상에서도 군사작전을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미 미군은 앞선 해상작전에서 마약 운반선으로 추정되는 선박을 수차례 공격해 80여 명을 수장시켰다. 지난 11일에는 베네수엘라산 원유를 실은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유조선 한 척을 나포했다. 미국의 제재 대상인 이란혁명수비대와 불법 거래를 하는 것으로 알려진 선박이다. 백악관은 “제재 대상 선박들의 불법 거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추가 나포를 예고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이에 맞서 베네수엘라 정부는 예비군과 민병대 등 가용 병력에 대한 총동원령을 내렸지만, 군사적으로 절대적 열세다. 마두로 대통령은 “미국이 나를 내쫓고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차지하려 한다”고 미국을 맹비난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중국과 러시아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이 계획하고 있는 베네수엘라에 대한 군사작전의 강도를 가늠하긴 어렵다. 하지만 워싱턴 안팎에선 벌써부터 “마두로 대통령이 축출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럴 경우 튀르키예로 망명할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관련기사 고립주의 트럼프, 뒷마당 중남미선 선택적 팽창주의 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 1989년 파나마 전철 밟을까 이와 관련, 마두로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전화통화에서 “미국과의 대화를 중단하지 말고 대화 채널을 열어둬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펼치고 있는 중남미 정책은 ‘채찍과 당근’으로 요약될 수 있다. 반미 좌파 국가인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브라질 등에는 채찍을 휘두르는 반면, 친미 우파 정권이 들어선 아르헨티나, 엘살바도로, 에콰도르 등에겐 막대한 경제적 지원이 포함된 당근책을 쓰고 있다. 미국의 강한 압박을 받고 있는 중남미 국가들에겐 유사점이 있다. 일단 트럼프 대통령이 명분으로 내세운 마약의 대량 생산지이거나 유통 경로가 되고 있는 나라다. 여기에 좌파가 집권하고, 중국·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 트럼프 대통령의 확실한 타깃이 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베네수엘라 외에도 콜롬비아와 멕시코 본토를 공격할 수 있다”고 밝힌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좌파 휩쓸던 중남미 민심 우향우로 선회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9월 콜롬비아가 최근 마약 통제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며 대외원조법을 근거로 미국의 지원을 중단했다. 그러면서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은 불법 마약 지도자”라고 비난했다. 멕시코도 트럼프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다. 트럼프 행정부는 멕시코가 펜타닐과 불법 이민자들의 미국 유입을 막지 않는다면서 30%의 관세를 부과하기도 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대통령의 브라질도 한때 미국과 극한 대립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브라질에 기본 관세 10%에 추가 관세 40%를 얹어 50% 관세 부과하기도 했다. 지금은 추가 관세를 철회했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아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과 친분이 있는 우파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브라질 대통령이 쿠데타 모의 등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 정치적 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0월 실시된 아르헨티나 중간선거에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여당의 압승 소식을 듣고 환호하고 있다. 당초 참패가 예상됐으나 미국의 지원으로 대반전을 이끌어냈다. [EPA=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친미 국가들에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남미의 트럼프’로 불리는 친미파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경우 내정 간섭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지난 10월 중간선거 때 집권 여당인 자유전진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선거 전 상원의 전체 72석 중 6석, 하원 257석 중 37석을 보유했던 자유전진당은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 의석수가 상원 20석, 하원 100석으로 크게 늘었다. 이런 대성공의 배경에는 미국의 지원이 있었다. 미국은 선거 직전 아르헨티나의 200억 달러(약 29조원) 규모의 통화스와프 요청을 받아들였고, 자유전진당이 승리하면 400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또 페소화 가치와 주가 급락으로 밀레이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21억 달러를 들여 페소화 매입에 나서기도 했다. 당초 이번 선거에서 참패가 예상됐던 자유전진당은 미국의 지원으로 대반전을 이끌어냈다. 트럼프 행정부는 보수파인 다니엘 노보아 대통령이 이끄는 에콰도르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노보아 대통령이 마약 밀매 조직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단속에 나서자, 2000만 달러 규모의 범죄 퇴치자금을 내놓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역시 우파인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 엘살바도로에도 600만 달러를 건넸다. 미국 내 교도소에 수감 중인 마약 카르텔 갱단원 260여 명을 엘살바도르로 이감시킨 대가다. 외신들은 한때 좌파가 휩쓸었던 중남미에서 민심이 우향우로 바뀌는 조짐을 보이자 트럼프 대통령이 이 틈새를 파고들고 있다는 분석도 내놓았다. 실제 2010년대 후반부터 중남미를 휩쓸었던 ‘2차 핑크 타이드(좌파 집권 물결)’의 기세가 꺾이고 있다. 지난 8월 볼리비아에서는 20년 만에 좌파 정권이 몰락했고, 에콰도르와 아르헨티나에서는 이미 지난해 정권이 교체돼 현재 우파 지도자가 통치하고 있다. 칠레의 경우 오는 14일 대선 결선투표를 통해 최종적으로 좌파 정권의 존속 여부가 결정된다. 로이터통신은 “중남미에서 좌파의 아성이 흔들리는 이유는 과도한 재정 지출과 반시장 정책으로 인해 발생한 경제난 때문”이라며 “좌파 정권의 부정부패도 민심이 떠나는 이유 중 하나”라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중남미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이유를 희토류와 석유 등 자원에서 찾고 있다. 전 세계 희토류의 90%를 생산하고 있는 중국과 경쟁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면 중남미의 희토류 개발과 확보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최익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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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마두로 정권, 1989년 파나마 전철 밟을까
━ 최고조 치닫는 카리브해 군사긴장 최근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외신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중남미 외교정책을 ‘돈로주의(Donroe Doctrine)’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서 ‘돈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름 ‘도널드’와 미국의 제5대 대통령 ‘먼로’의 이름을 합성한 것이다.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1823년 미국 의회에서 구대륙인 유럽을 향해 관계 단절에 가까운 입장을 밝히면서, 신대륙인 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우세적 지위를 인정하라고 강조했던 지도자다. 트럼프의 돈로주의는 미주 대륙에 국한했던 과거의 먼로주의와 달리, 인도태평양 지역까지 범위를 넓힌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다. 따라서 트럼프의 중남미 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큰 그림에서 현 상황을 바라보는 것도 필요하다. 특히 중남미에 공을 들이면서 미국과 경쟁하고 있는 중국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또 돈로주의가 태평양 끝자락에 위치한 한반도에 미칠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서도 큰 그림이 요구된다. 마침 지난 5일 미국이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은 돈로주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보고서는 다양한 지역과 주제에 걸쳐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 전략을 밝히고 있는데 하나의 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핵심적인 포인트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글로벌리즘과 자유무역이 안고 있는 부정적인 측면의 과도한 부각 ▶동맹국들을 향한 방위 부담 강조 및 미국의 불필요한 연루에 대한 확실한 거부감 ▶무엇보다도 유럽 국가들에 대한 실망과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안보의 무질서 ▶첨단 산업과 국방력을 통해 누구도 넘보지 못할 역량 확보 등 결과적으로 미국의 국익 중심이라는 원칙을 중심으로 모든 대내 정책의 실행을 연동시키는 내용 등을 포함하고 있다. 관련기사 고립주의 트럼프, 뒷마당 중남미선 선택적 팽창주의 ‘반미 우군’ 확보…중남미에 14조원 지원 나선 중국 한반도적 차원에서 부연하자면, 태평양과 대만에 대한 확실한 안보 유지를 강조함으로써, 트럼피즘이 한국 및 일본과 같은 동맹을 중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은 제거되었다. 물론 태평양과 대만 보호는 한국과 일본의 역할에 대한 복잡한 고민을 초래할 것이고, 동시에 중국을 트럼프 방식으로 봉쇄하겠다는 일관된 의지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인태전략의 기반이 다소 약화되는가 싶었지만, 이번 NSS를 통해 인태전략이 확실한 입지를 다진 셈이다. 재집권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남미 국가들에 대한 아메리카 퍼스트 관점의 관여와 캐나다에 대한 51번째 주(州) 편입 발언은 ‘먼로주의’의 계승이고, 태평양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은 ‘아메리카 퍼스트’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최신 미국 국가전략보고서를 통해서 돈로주의는 이렇게 먼로주의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미국의 대외전략을 지켜보는 미국 국민들의 시선은 어떠할까? 흥미롭게도 과거 첫 번째 집권 시절 보였던 집권 첫해 40% 초반 수준의 지지도가 현재에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 다만, 공화당 지지층 사이에서의 대통령 국정 수행 평가는 항목에 따라 70%를 넘는 부분도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여론에 대한 자기중심적 해석이 강한 트럼프 대통령은 돈로주의가 결과적으로 미국 국민의 삶을 개선시키고 미국의 위대한 미래를 보장한다고 더욱 굳게 믿게 될 것이다. 현시점에서 돈로주의와 관련해 두 개의 큰 변수가 눈에 띤다. 하나는 지난달 7일 다카이치 일본 총리의 발언인 ‘대만 유사시 자위권 발동’과 관련된 부분인데, 다카이치 총리의 정치 성향을 고려하면, 이런 류의 설화(舌禍)가 터진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 이후 백악관의 반응을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이 비공개적으로 대만 문제에 대한 일본의 발언이 신중해야 한다고 언급한 점이 알려지면서 아메리카 퍼스트가 태평양에 고스란히 투영된 돈로주의 차원에서는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백악관의 입장이 이러하다면, 핵심 동맹 국가들에게 중국과 대만 문제에 적극 동참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미국의 대인도 정책이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트럼프 대통령의 브로맨스는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심지어 트럼프 행정부 2.0의 등장과 함께 과거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중국을 끌어들여 소련을 제압했듯이, 트럼프 대통령이 인도를 끌어들여 대중국 정책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것이라는 분석까지 등장한 바 있다. 그런데 지난 6월 모디 총리와의 통화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인도-파키스탄 간 분쟁을 거론하며 “내가 3차 세계대전을 막았다”고 한 발언이 알려졌고, 9월 초 중국 주최의 상하이협력기구(SCO)에서 시진핑 중국 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모디 총리가 나란히 회동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공개되면서, 인태 전략의 핵심축인 인도를 미국이 왜 더 적극적으로 관리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정확한 진단은 어렵지만, 인도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동맹 파트너이기는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대부분의 동맹 국가들에 강요하는 이익 추구 방식이 인도에는 통하지 않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바야흐로 국제사회는 다극질서를 향해 치닫는 양상이다. 앞으로 전개될 다극화 현상을 놓고 여러 전망이 있지만, 대체로 ‘미국 플러스 중·러·일·유럽연합(EU)와 같은 주요 강국의 지분’이란 견해가 지배적인 가운데, 돈로주의는 다극화 현상의 결과물일 수도 있고, 동시에 다극화의 원인일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훗날 트럼피즘이 사라져도 트럼피즘의 유산은 남을 것이고, 만약 후자라면 한국과 같은 동맹 파트너는 계속해서 미국 NSS 보고서를 한줄 한줄 꼼꼼히 읽어야 하는 입장이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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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주하는 입법부, 신뢰 잃은 사법부…계엄 이후 삼권분립 훼손 더 심해져
계엄 1년, 우리는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못했나 첫째, 계엄은 한밤중의 도둑처럼 시민들의 삶에 들이닥쳤다. 바라지도 예기치도 않은 일이었다. 미국의 정치학자 필립 슈미터는 정치에서의 지나친 ‘불확실성(uncertainty)’이 민주주의의 제도적 안정성을 해치고 정치 불신을 키운다고 했는데, 민주화 이후 40년 가까운 시점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많은 이들을 당황하게 했다. 둘째, 계엄의 시도는 한국 민주주의의 비극성을 상징했고, 계엄의 조기 종결은 한국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실증했다. 계엄이 성공했다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우리를 후진국으로 이끌었을지 모른다. 실패했지만 그로 인한 상처와 후유증은 남았다. 정상적인 정치가 아닌 방법으로 상황을 뒤엎으려 했던 것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은 크고 강력했는데, 이를 이어받아 변화와 개선을 이끌어야 할 여야의 정치적 실력은 실망스러웠다. 관련기사 여당 폭주, 야당 헛발질, 계엄 건너도 민주주의 불안…타협의 정치 복원해야 셋째, 계엄은 한 불완전한 인간에게 정치체제의 운명을 맡기는 대통령제의 한계를 더 깊이 생각하게 했다. 240여 년 전 대통령제를 처음 고안한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이 고심했던 것처럼, 권력은 갖게 하되 견제와 균형이 가능한 입헌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하는 큰 숙제를 우리에게 남겼다. 그런데 지난 1년을 돌아보니 이번에는 입법부의 지나친 독주가 새로운 문제로 등장했다. 계엄 이후 3권 분립은 더 나빠졌다. 그 일차적 책임은 국회와 다수당에 있다. 넷째, 입법부의 지나침과 독주도 문제이지만, 사법부는 신뢰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법은 강자 앞에서도 당당해야 하고 만인에게 평등해야 한다. 그런 법이 없다면 혹은 그런 법에 대한 존중이 없다면 그 어떤 공동체도 안녕을 유지할 수 없다. ‘정치의 사법화’도 문제였지만 ‘사법의 정치화’는 더 큰 문제였다. 법은 공정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사법부 역시 불신의 대상이 된 것은 뼈아픈 일이다. 법관들 스스로 변화의 의지를 보여야 한다. 국회를 탓한다고 사법부의 권위나 위신이 올라가지 않는다. 다섯째, 민주주의란 실패한 정부가 선거로 교체되는 체제다. 조기 대선에서 유권자 시민은 잘못된 계엄에 대한 책임을 ‘페이퍼 스톤(투표지)’으로 응징했다. 하지만 대통령직에 걸맞은 후보들의 경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깊은 회의감을 남겼다. 선거는 한 가지 과업밖에는 할 수 없는 ‘조야한 책임 추궁 수단’이다. 현직자를 군말 없이 내보내는 일은 잘하지만, 최선의 통치자를 만드는 일은 잘하지 못한다. 유권자 시민은 정당이 내놓은 대안 가운데서만 선택할 수 있다. 정당이 나쁘면 선거를 반복해도 시민의 권능은 커지지 않는다. 지금의 두 거대 정당은 좋은 정치가를 양성하는 일에 늘 소홀했다. 무책임하게 외부 영입을 반복하다 보니 정치를 해서는 안 되는 정치인들이 너무 많아졌다. 지금 양당 어느 쪽도 의석의 30% 이상을 가질 실력은 없다. 정당의 수가 늘어야 한다. 그래야 양당 독과점 구조에 변화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다당제로 가야 한다. 여섯째, 실패한 대통령의 긴 목록을 가진 정치사는 불행하다. 정치를 잘해 온 것의 결과로 대통령이 되는 게 아니라, 전임자가 잘못해서 후임 대통령이 되는 일이 한국 정치의 반복되는 패턴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악순환이 끝난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같은 대통령을 두고 한쪽의 시민이 환호하고 다른 쪽의 시민이 저주하는 현상은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태롭게 한다. 게다가 대통령 개인으로 사인화(私人化)된 정부 운영 방식에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대통령이 오케스트라 지휘자 같은 역할을 하길 바라지, 단원들의 연주가 마음에 안 든다고 화를 내거나 직접 악기를 손에 쥐는 대통령을 원하지 않는다. 대통령 혼자만 자유로운 정부는 좋은 정부가 아니다. 거대 기구와 인원, 체계가 각자의 장점을 발휘할 때 비로소 한국 민주주의의 오랜 목표인 ‘유능한 책임 정부’의 모습을 구현할 수 있다. 일곱째, ‘정치의 복원’이 절실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오히려 줄었다. 양당의 극단적 갈등이 한국 사회를 더욱 어둡고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지만, 정치가 제 역할을 하면 불필요한 갈등을 절약하고 협동의 기회가 많아지는 사회로 한 발 나아갈 수는 있다. 인간 사회에서 선(善)은 귀하다. 정치가들이 용기를 내면 폭력이나 강제가 아니고도 악을 제어하고 선을 북돋게 할 수 있다. 최소한 벌써 10년째 계속되는 증오와 적대의 주말 거리 시위는 멈추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일에 소명감을 갖는 정치가가 없다. 여덟째, 공존과 타협은 자유를 위해 치러야 하는 정치의 비용이다. 비용을 치르지 않고도 좋아질 수 있다고 말하는 정치가는 우리를 기만하는 자다. 변화를 위해서는 우리 역시 감수할 일이 있음을 신중하게 말해 주는 이가 정치를 해야 한다. 지난 1년간 여야 모두 정치인들의 언어가 너무 나빠진 것에 대해 우리가 나서서 강력하게 규탄해야 한다. 말의 수준으로는 윤석열 못지않은 정치인들이 너무 많다. 정치는 말로 하는 인간 활동이고 그 말 덕분에 정치는 사회를 통합하고 공동체를 평화롭게 한다.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말했듯 “인간은 풍부한 언어를 가지고 있으므로 보통의 상태보다 더 현명해지기도 하고 혹은 미치광이 같은 상태가 되기도 한다.” 말이 “현자의 계산기”가 될지 “어리석은 자들의 화폐”가 될지, 다른 누구보다 여야 정치가들이 돌아봐야 한다. 아홉째, 우리 모두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무례한 정치인을 ‘사이다 정치인’으로 만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 적대적 언어와 야유조 말투를 앞세운 양극화된 정치 싸움은 야심가들을 양산한다. 그들이 시민의 열정을 악용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윤석열 같은 인물은 또 나온다. 예의 있는 사람 그래서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정치의 소명이 깃들 수 있다. 대통령만이 아니라 정치를 망치는 의원들도 쫓아내야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나쁜 정치인의 퇴출은 시민들도 나서서 도와야 할 역할이다. 윤석열로 끝내지 말고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자. 그래야 우리 민주주의가 건강해질 수 있다. 박상훈 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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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폭주, 야당 헛발질, 계엄 건너도 민주주의 불안…타협의 정치 복원해야
━ 정치학자 3인이 본 계엄 그후 1년 그날 이후, 1년이 지났다. 지난해 이 무렵 중앙SUNDAY는 정치학자 4인을 만나 갑작스러운 한파처럼 닥친 계엄 사태를 어떻게 회복해 나가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렇다면 계엄 후 1년간 우리 정치는 어떻게 회복되고 발전했을까. 잠시 멈췄던 정치의 시계는 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을까. 중앙SUNDAY는 1년 만에 다시 강원택(서울대)·서현진(성신여대)·이재묵(한국외대)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들은 “계엄은 극복했지만 민주주의는 여전히 불안하다”(강 교수), “폭주하는 여당과 갈길 못 찾는 야당”(서 교수)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삼권분립의 위기는 예상 밖 전개”(이 교수)라고 말했다. 이재묵 한국외대 교수, 강원택 서울대 교수, 서현진 성신여대 교수(왼쪽부터)가 지난 2일 서울 안국동 안국빌딩 회의실에서 12·3 비상계엄 사태 1년을 평가하고 있다. 최영재 기자 1년이 지났다. 계엄 이후 1년간 예상과 달랐던 것은 뭔가. 강원택(이하 강)=“계엄 사태는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큰 희생 없이 마무리돼서 다행이다. 하지만 지난 1년간 ‘한국 정치는 달라졌을까’ 또는 ‘좀 더 나아졌을까’를 돌아본다면 큰 진전은 없었다. 이재명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을 비롯해 여러 국제무대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돌아왔다’고 강조했지만 아직은 불완전한 상태가 지속하고 있다.” 서현진(이하 서)=“다소 천천히 회복되고 있지만 방향은 옳게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민주당이 너무 빨리 돌진하고 있다는 점과 국민의힘이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안 요소다.” 강=“지난해 이 자리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이) 탄핵이 될 거라고 했었다. 정권 교체도 어느 정도 예상은 됐다. 비상계엄 사태 관련 책임자 처벌도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렇게 확대되거나 장기간 이어질 줄은 몰랐다. 태스크포스(TF)까지 만들어 일반 공무원까지 걸러내겠다는 거 아닌가. 지나친 상황이고 기한이 계속 연장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또 예상하지 못했던 건 민주당이 제왕적이라는 대통령의 권력과 압도적 의석의 입법 권력을 차지한 상황에서 여전히 사법부를 공격한다는 거다.” 관련기사 독주하는 입법부, 신뢰 잃은 사법부…계엄 이후 삼권분립 훼손 더 심해져 서=“다들 ‘오답 노트’를 잘못 작성한 게 아닐까 싶다. 민주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태에서 학습을 제대로 못 한 것 아닌가 우려된다. 문재인 정부 때 2020년 총선에서 압승해 압도적 다수당이 되자 5년 안에 적폐 청산과 부동산을 잡겠다고 했다가 5년 만에 정권을 내줬다. 이번에는 좀 빨리 마무리하고 민생 쪽으로 돌아설 줄 알았다. 이번에도 내란 정국에 몰입하다가 환율·부동산 등 민생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국민의힘은 이전보다 못한 상황이다. 그땐 어쨌든 바른정당이란 신당을 차려 박근혜 국정농단 세력과 절연했는데, 지금은 대안 세력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이재묵(이하 이)=“상식에 반했던 계엄이 가능했던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정치적으로 학습되지 못한 윤 전 대통령 개인의 일탈이다. 또 하나는 한국의 권력 구조다. 대통령 한 명이 잘못 마음을 먹으면 민주주의가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1년 동안 특검 등을 통해 윤 전 대통령의 일탈과 주변인에 대한 청산은 많이 진행됐다. 이제는 왜 그러한 일탈이 가능했는가에 대해 제도나 권력 구조에 대해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상당히 미진했다.” 계엄이라는 극단적 상황을 촉발했던 정치 양극화는 여전하다. 이=“계엄이 갖고 온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우리 사회의 음모론을 확대한 것이다. 계엄이 가능하겠냐 그랬는데 정말로 해버렸다. 음모론 같은 것이 현실화되는 거를 경험했기 때문에 음모론이 굉장히 확대됐고 또 윤 전 대통령 시기에 두 정파를 중심으로 정치 양극화가 굉장히 강화됐다. 음모론과 양극화가 만나면 결국 강경파들이 득세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강=“민주당은 집권당에 걸맞은 국정 역량과 정치력을 보이기보다는 강경 지지자들에 의해서 휘둘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내란 세력과 경쟁 정당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물론 국민의힘이 계엄 문제에 대처하지 못한 측면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국회에서 법안을 만들거나 정책을 결정할 때 파트너에 대한 최소한의 인정은 필요하다. 악수를 못 하겠다든지 해산시키겠다든지 하는 건 정치 다양성과 정당 정치에 대한 부정이고 집권당의 책임 있는 모습도 아니다.” 지난 3일 서울 용산구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개막한 ‘빛의 연대기전’. 한국 민주화운동의 여정을 담은 이번 전시회엔 계엄 당시 장갑차를 막아선 시민을 그린 작품도 전시됐다. [뉴스1] 이들은 계엄 이후 새 질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양당 모두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민주당에 대해선 ‘사법부 공격’을, 국민의힘에 대해선 ‘대안 인식 부재’를 꼽았다. 강=“여야 합의나 사법부 동의 없이 대법관 수를 늘리겠다든지 기존 재판부를 우회한 내란특별재판부를 만들겠다든지 하는 것은 사실상 자신들이 원하는 판결이 나오는 사법부를 만들겠다는 식으로 보인다. 기존 사법부가 갖던 권한을 뺏어서 다른 곳으로 돌리는 방식인데, 정치학에서 ‘코트 커빙(court curbing·사법통제)’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의 퇴행을 겪은 ‘데모크라틱 백슬라이딩(democratic backsliding)’을 겪었던 나라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정파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기본 시스템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처리되면 민주주의에 상당히 위협이 될 수 있다.” 이=“지난 대선 결과를 보면 탄핵 이후인데도 거의 50대 50의 분열된 상황을 보여줬다. 국민의힘을 해산한들 이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이 사라지나. 내란 청산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여권이 보다 통합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계엄이 잘못됐다는 건 인정하는 국민의힘 지지자들도 현재 청산 과정이 선을 넘을까 불안을 느낀다. 한편으론 내란 청산과 야당 탄압의 경계점이 모호한 만큼 국민의힘도 계엄이 잘못됐다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내주는 게 좋다. 그래야 여권이 국민의힘을 압박하기 어렵다. 견제 권력이 굉장히 중요한 시점인데 국민의힘이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서=“대장동 항소 포기나 공무원 핸드폰 조사는 중도가 보기에는 굉장히 심각할 수 있다. 국민의힘이 만약 대안 세력으로서 소구력이 있다면, 여론이 여권에 굉장히 불리했을 거다. 즉, 메신저의 문제다. 국민의힘이 아무리 비난해도 ‘내란 세력’ 프레임에서 나오지 못하면 대여 투쟁도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강=“국민의힘이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게 윤 전 대통령의 대선 승리는 문재인 정부 막판 부동산에 대한 불만 덕분에 0.73%포인트 차이로 간신히 이긴 거다. 2016년 총선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로 거의 모든 선거에서 졌고, 특히 인구의 50% 이상이 모인 승부처 수도권에선 경쟁력을 잃은 상태다. 그런데도 내세우는 게 이승만·박정희 레거시다. 그게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무슨 의미가 있나. 어려운 현실과 여러 가지 난제에 대해서 보수가 줄 수 있는 답을 내놓고, 보수의 가치와 인물을 내세워야 하는데 알량한 몇 안 되는 소수의 강경 지지층에 발목 잡혀서 더 나아가질 못한다. 이러면 앞으로도 지방선거에서나 일부 지역만 확보할 수 있을 거다.” 이=“한 때 국민의힘 지지율이 반등하고, 대선 경선 과정에서 내홍을 겪으면서도 김문수 후보가 40% 이상 득표했다. 이것이 국민의힘에 ‘우리도 집토끼를 결집하면 된다’는 잘못된 시그널을 준 것 같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다르다. 민주당은 86세대를 중심으로 인구가 두터운 2차 베이비부머(1964~74년생)에서 70%가량이 지지한다. 그 외 세대에서도 40% 안팎의 지지가 안정되게 나온다. 반면, 국민의힘 지지율은 탄력성이 높다. 시국에 따라 각 세대에서 20~40%포인트를 왔다 갔다 한다. 게다가 반민주당 성격이 강한 20·30 남성은 이준석 의원이 점유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과 정당 성격도, 역사적 발전 경로도 다르기 때문에 외연을 확장할 때 이길 수 있다.” 강=“새로운 중도 보수 형태로 확장할 수 있고 미래 지향적인 보수의 가치를 내세울 수 있는 세력이 나올 때가 아닌가 싶다. 지금 양극화됐다고는 하지만 강경 세력의 목소리가 과다 대표되는 것이지, 막상 조사를 해보면 유권자 스펙트럼에서 다수는 여전히 중도다. 기업도 경쟁력 없으면 도태되듯이 정치에서도 새로운 경쟁 세력이 들어와야 건강해진다.” 서=“과거 바른정당이 ‘박근혜 절연’을 선언하고 나갔다가 춥고 배고프니 되돌아온 적이 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바보 노무현’이라며 얼마나 욕을 먹었나. 그래도 그런 시간을 버텨오면서 서사를 이뤄낸 거다. 반면 보수엔 이런 서사가 없다. 견디면서 제대로 재건하겠다는 세력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다시 손을 내밀지 않겠나.” 중앙SUNDAY 2024년 12월 7일자 8~9면 지면. 이들은 계엄과 탄핵이라는 악순환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정치 복구’와 ‘권한 분산’을 추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강=“계엄은 대통령이 혼자서 뭐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거에서 출발한 거다. 하지만, 이렇게 양극화된 상황에서 이원(집정부)제나 대통령 중임제 등을 논의하긴 어려우니, 일단은 여야 입장 차이가 비교적 작은 지방분권 강화부터 해나가면 좋을 것 같다. 제한적이라도 일단 개헌을 한 번 성사시키는 게 중요하다. 제왕적 대통령 권력을 그대로 두고 선출 방식만 바꾼 87년 체제는 이제 유효하지 않다.” 이=“정당의 주된 기능은 좋은 인재를 발굴하고, 가치에 부합하는 사람을 키워서 선거에 내고 이기는 것인데 이것이 실종됐다. 윤 전 대통령의 실패가 보여줬듯 이제는 정치적 아웃사이더를 대중 인기에 기반해서 아웃소싱하는 구조는 지양해야 한다. 양쪽 모두 실패의 원인이 비슷하다. 야당을 정치의 파트너로 보지 않고, 의회나 절차를 패싱하다가 무리수를 두고 무너졌다는 거다. 정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굉장히 전문적인 영역이다. 국민들도 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강=“양당제를 강화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반드시 없애고, 다당제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제도 개혁도 필요하다. 한 정당이 과반을 획득할 수 있는 구조에선 여소야대도, 여대야소도 파국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한 정당이 과반을 차지할 수 없다면 타협이 강제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정치가 작동할 것 같다.” 유성운·신수민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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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 면제보다 쉬운 예타 면제”…선심성 사업 브레이크가 없다
━ ‘표퓰리즘’ 신공항을 가다 신공항 사업비 감소라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날짜는 2023년 12월 15일, 장소는 서산신공항. 물론 서산신공항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서산신공항은 기존 해미비행장(공군 제20전투비행단) 활주로를 활용해 2028년 민간공항으로 거듭나게 하겠다는 내용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이 2022년 대선 당시 공약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기획재정부의 예비타당성조사(예타)에서 비용 대비 편익(B/C)이 0.81에 그쳐 탈락했다. 이후 국토교통부와 충남도는 기존 사업비 532억원을 484억원으로 대폭 낮췄다. “토목공사량 변경, 주기장과 터미널 규모 축소로 가능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일종의 ‘사업비 다이어트’를 시도한 셈. 결국 서산신공항은 국가재정법상 총사업비 500억원 이하 공공사업에 해당돼 예타 면제 대상이 됐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예타는 1999년 김대중 정부 때 도입했다. 외환위기로 재정과 공공부문 효율성·투명성 제고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다. 총사업비가 500억원 이상이고 국가 재정 지원 규모가 300억원 이상인 사업을 대상으로 한다. 예타 대상이어도 특별법으로 면제할 수 있다. 가덕도신공항과 새만금신공항이 그랬다. 대구경북(TK)신공항도 마찬가지다. TK신공항은 현재 공군과 민간 겸용인 대구공항을 경북 군위군 소보면과 의성군 비안면 일원으로 옮겨 2030년 개항할 계획이다. 사업비 2조5768억원에 군 공항 이전비 11조5000억원까지 합치면 총 14조원이 넘게 든다. 5년 뒤 개항이 목표지만 사업비가 발목을 잡는다는 평이다. 전문가들은 예타 면제가 사업 졸속 추진을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손종필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정치권에서 지역 균형발전이란 명분으로 특별법을 통해 예타 면제를 남발하면서 예타의 본래 취지가 무력화되고 있다”며 “2019년 예타 제도를 손질하면서 기존의 경제적 평가뿐 아니라 지역 낙후도, 지역경제 파급효과, 고용 유발 효과 등까지 감안하게 됐는데 또다시 지역 균형발전이란 명분으로 정략적인 면제를 요구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고 사업 부실만 초래할 뿐”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선거 때마다 울궈 먹을라꼬” “개발 묶여 생계 막막”…신공항 부지 주민들 뒤숭숭 나라살림연구소에 따르면 2019~2023년 5년간 예타 대상 사업은 총 108건. 이 중 97건(89.8%)이 통과됐다. 그런데 이 기간 예타 면제 사업은 163건으로 대상 사업 건수를 웃돈다. 이 때문에 건설업계에선 “예타 면제나 통과가 병역 면제(2023년 0.3%)보다 쉽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온다. 면제 163건 중 가장 규모가 큰 사업은 가덕도신공항(13조7000억원). TK신공항도 톱10에 들었다. 손 위원은 “90%에 육박하는 예타 통과 사업은 현재 예타 제도가 얼마나 느슨한지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정부는 예타 대상을 ‘사업비 500억원 이상’에서 ‘1000억원 이상’으로 완화하려는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립대의 한 교수는 “명분상으론 꼭 필요한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의 추진 속도를 높이려는 것이지만 정치권에선 이를 계기로 지역 표심을 얻기 위한 선심성 사업을 더 적극적으로 펼치게 될 거고 이는 곧 재정 악화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고 비판했다. 김주영 한국교통대 교통공학과 교수는 “공항은 철도·도로와 달리 민간 항공사가 수익성을 가늠하고 취항해야 운영되는데, 기존 15개 공항의 수요가 고정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신공항 추진은 무리수”라면서 “제대로 된 예타 없이 특별법으로 면제하고, 비용도 지방비가 아니라 중앙정부가 국비로 부담하기 때문에 지자체들이 너도나도 과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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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때마다 울궈 먹을라꼬" "개발 묶여 생계 막막"…신공항 부지 주민들 뒤숭숭
━ ‘표퓰리즘’ 신공항을 가다 전북 군산공항 1.3㎞ 서쪽에 건설 계획이 잡혀 있는 새만금신공항 부지. 신공항이 들어서면 철새들이 쉬고 있는 수라갯벌은 사라진다. 김홍준 기자 목포에서 흑산도로 향하는 쾌속선. 타본 사람은 곧 느낀다. 비금도와 도초도·우이도 등 신안 앞바다의 군도를 벗어나자마자 만나게 되는 격랑을. 이어 극심한 뱃멀미까지도. 흑산도에 공항이 생기면 이런 고통은 사라지고 관광객도 현격히 늘면서 지역이 활기를 띠게 될 것이란 게 현지의 기대다. 부산 가덕도로 향하는 길. 김해공항에서 40분, 직선거리로 20㎞ 남짓. 여야 불문하고 수많은 정치인이 이 길을 통해 가덕도를 찾았다.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거리. 하지만 이들은 공항 부지 부근에 위치한 대항전망대에서 가덕도신공항이 나라와 지역을 살린다고 외친 뒤 되돌아가곤 했다. ‘흑산도’처럼 신공항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주장과 ‘가덕도’에서 벌어지는 정치인들의 행보가 또다시 시작될 조짐이다. 내년 6·3 지방선거가 6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다. 슬금슬금, 우연인지 필연인지 분위기도 조성됐다. 관련기사 “병역 면제보다 쉬운 예타 면제”…선심성 사업 브레이크가 없다 지난 9월 새만금신공항은 기본계획 취소 소송 1심에서 제동이 걸렸다. 그 직후 감사원은 흑산신공항과 울릉신공항의 예상 여객 수요가 각각 6배와 2배가량 과다 산정됐다는 감사 결과를 내놨다. 국토교통부도 지난 21일 가덕도신공항 공사 기간을 84개월에서 106개월로 늘린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내년 지방선거를 의식한 전국 지자체들의 ‘신공항 포퓰리즘’이 나올 때임을 보여주는 징표들”이라고 평했다. “선거 때마다 가덕도 울궈 먹을라꼬 안 옵니껴.” 가덕도 주민들은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흑산도 주민들은 “또? 지긋지긋하구먼”이라며 되레 무감각으로 버티고 있었다. 중앙SUNDAY가 찾아간 신공항 현장 곳곳에선 불만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이번엔 꼭” 혹은 “반드시 관철”이라는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현재 우리나라 공항은 15곳. 새로 추진하기에 ‘신공항’이란 명칭이 붙은 공항도 8곳이나 된다. 가덕도·새만금·대구경북(TK)·백령·서산·울릉·제주2·흑산 등이다. 경기국제공항은 논의 단계다. 여기에 지난달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이후 국제선 신설 요구가 거세진 포항경주공항도 가세하는 모양새다. 지난해 기존 공항 중 인천·김포·김해·제주를 제외하고는 11곳이 적자를 기록했다. 그나마 청주국제공항 실적은 개선되는 추세지만 다른 지방공항의 경영 부진은 고질적이다. 양양공항과 울산공항은 지난해 영업이익률이 각각 -2800%과 -1144%에 달한다. 포항경주공항은 지난 10년간 -1000%보다 더 나아진 적이 없다. 심지어 2015년엔 -4750%까지 떨어졌다. 무안국제공항은 국제공항이란 타이틀이 무색하게 하루 평균 이용객이 570명에 그친다. 이들 공항의 적자는 고스란히 국민 세금으로 메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신공항 건설 이슈는 선거 때마다 되풀이돼 왔다. 8곳 건설비만 24조원에 이른다. 확정치 아닌 ‘예정치’라 고무줄처럼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 ‘고무줄’은 특이하게도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탄력성이 매우 약하다. 정치인들은 구호를 외치지만, 해당 지역 주민들은 그 등쌀에 생계가 막막할 따름이다. 일부 주민은 찬반으로 나뉘어 대립하기도 한다. 환경론자와 개발론자가 충돌하고 소송전에 진이 빠진다. 이주보상비에 우는 이가 있고 웃은 이도 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다. ━ 대통령 6명 거친 가덕도 지난 11일 가덕도신공항 부지 내 외양포 마을에서 이주 보상을 위한 현장 실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김홍준 기자 “김해에서 왔어요. 가까워요.” 지난 11일 부산 가덕도 연대봉(459m). 등산객 오모(53)씨가 ‘가깝다’는 곳에 김해공항이 있는데 이곳 가덕도에도 신공항이 들어설 계획이다. 연대봉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대항·새바지·외양포 세 개 마을이 사라지고 봉우리 두 곳도 깎여 나간다. 연대봉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향하면 대항전망대가 있다. 정치인들이 ‘가덕도신공항 세일즈’를 위한 무대처럼 찾는 곳이다. “정치인들은 거기까지만 오고 휙 가버려요. 이 안은 들여다보지도 않고요.” 신공항 부지 내 외양포 마을 이미순(69)씨의 지적이다. 부산 가덕도 연대봉에서 바라본 신공항 부지. 대항과 새바지·외양포 등 3개 미을과 국수봉·남산 등 2개의 봉우리가 사라진다. 대항마을의 일제 포진지 동굴도 묻힌다. 김홍준 기자 가덕도신공항 조감도. 육지와 바다를 연결해 부동침하 우려도 제기된다. [사진 부산시] 가덕도신공항 이슈는 노무현 전 대통령 때부터 ‘동남권신공항’이란 이름으로 무려 6명의 대통령을 거쳐 왔지만 여전히 첫 삽도 뜨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기업이 동남권신공항을 ‘김해공항 확장’으로 결론 냈지만 문재인 전 대통령은 부산시장 선거용 카드로 가덕도를 꺼냈다. 국민의힘도 이를 받아 ‘가덕도신공항특별법’으로 예비타당성조사를 ‘패스’했다. 13조7000억원이 드는 대역사지만 부산 엑스포 유치를 염두에 두고 공사 기간을 2029년 12월까지로 5년이나 앞당겼다. 그러자 시공사인 현대건설은 “공사 기간이 무리”라며 지난 5월 컨소시엄에서 탈퇴했다. 결국 정부는 지난 21일 공사 기간을 84개월에서 106개월로 늘렸다. 개항 시기는 2035년으로 복귀했다. 현대건설 측은 “추후 입찰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힌 상태다. 이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이주 보상을 위한 현장 실사단을 만나고 있었다. 그는 “평생 삶의 터전인데 1억원을 받으란다”며 “그 돈으로 뭘 먹고 살란 말이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외양포 마을의 땅은 국가 소유라 건물값과 이주비만 받게 된다는 얘기다. 며칠 뒤 이주비 현실화를 위한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주민들은 “현실이 얼마나 반영될지 미지수”라며 고개를 저었다. 김현욱 가덕도신공항반대시민행동 집행위원은 “특별법은 시작부터가 선거용 포퓰리즘”이라며 “부동침하 우려로 안정성이 의심받고 비용 대비 편익(B/C) 비율은 적정치인 1.0의 절반에도 못 미쳐 경제성도 문제가 있는데 정치권이 선거 때마다 무리하게 목소리만 높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산 가덕도 외양포에서 수퍼를 운영하는 이미순(69)씨가 평생 일궈온 가게를 내놓고 받을 이주비가 고작 1억원이라며 시름에 잠겨 있다. 김홍준 기자 외양포의 이성태(71)씨는 “국가사업이라 터전을 내놔야 한다는데, 먹고살게만 해준다면 반대는 안 한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 ‘먹고살 만한’ 사람들은 이미 이주비를 챙기고 떠났다. ‘외지인’이라고 불리는, 대형 카페와 숙박업소를 차렸던 이들이다. “80억 투자해 카페를 만들더니 4년 만에 120억 받고 바로 떠나버리더라”는 말도 나온다. 도로엔 ‘누구는 (평당) 1500(만원)이고 나는 왜 700인가요?’ 등 감정평가를 지적하는 현수막도 곳곳에 걸려 있었다. 이 와중에 대항마을 주민들은 이주보상비를 받는 방법을 놓고 갈라졌다. 한쪽에선 “우리가 직접 협상하자”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선 “법무사를 통하자”고 맞선다. “자리 보전과 경제적 이익을 위한 꼼수”라고 서로를 비난하는 가운데 명예훼손 소송까지 벌어지고 있다. ━ 군산공항 1.3㎞ 코앞에 둔 새만금 지난 4일 낮 12시10분. 80여 명의 탑승객이 제주행 진에어에 몸을 싣자 군산공항엔 6명만 남았다. 한국공항공사 직원들과 진에어 탑승 수속 직원, 입점 카페 사장 등이었다. 이들은 이후 제주발 진에어가 도착하기 전 2시간20분 동안 썰렁한 공항을 지켰다. 전북 군산공항과 수라갯벌 사이에 건설 계획이 잡힌 새만금신공항. 하루 네 차례 오가는 진에어가 군산공항에서 제주공항으로 이륙하자 철새가 그 밑으로 날고 있다. 김홍준 기자 새만금국제공항 조감도. 오른쪽의 남북도로와 군산공항 사이에 들어설 계획이다. 그러면 수라갯벌은 사라진다. [중앙 포토] 군산공항의 지난해 이용객은 32만5000여 명. 그나마 최근 숫자가 늘었지만 15개 공항 중 꼴찌에서 5번째다. 군산공항은 적자 덩어리다. 2023년엔 영업이익률 -850%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공항에서 불과 1.3㎞ 떨어진 곳에 8077억원을 투입해 새만금신공항을 지을 계획이다. 문재인 정부 때 예비타당성조사를 면제받았다. 군산공항에 남은 6인 중 한 명인 미화원 박송금(61)씨는 “전북에서 올림픽을 유치하려는데 큰 국제공항이 생겨야 일자리도 생기고 지역도 살아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반면 개인택시를 운행하는 조수남(55)씨는 “공항이 생기면 벌이는 늘겠지만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만들 필요도 없다”고 했다. 새만금이 위치한 군산에서도 이렇게 의견이 갈리고 있다. 저비용항공사(LCC)인 진에어가 지방자치단체 보조금을 받아 하루 두 번, 그것도 오후에만 군산~제주 노선을 운항 중이다. 전북 지역 항공사인 이스타항공은 이미 철수했다. ‘장사’가 안 되기 때문이다. 새만금신공항 조감도. 기존 군산공항과 1.3km 떨어진 곳에 수라갯벌을 메워 조성한다. 국제공항인데 항공기를 두는 주기장이 5개에 불과하다. [중앙포토] 새만금신공항도 군산공항처럼 만년 적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2019년 국토교통부 보고서에 따르면 비용 대비 편익(B/C)은 0.479에 그쳤다. 그런데 국토부는 이 보고서에서 2058년 기준 연간 이용객을 85만 명으로 전망했다가 이후 105만 명으로 늘려 잡았다. 이에 대해 감사원은 지난 9월 “군산공항에서의 단순 이전 수요가 가능할 뿐 수요 창출과는 거리가 멀다”며 “예비타당성조사 절차를 면제받아 경제성보다 정치적 필요성이 크게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국토부는 한국공항공사로부터 ‘2058년까지 3553억원 손실, 매년 200억원 적자’라는 전망 보고서를 받고도 사업을 강행하기도 했다. 앞서 서울행정법원은 조류 충돌 위험 축소와 수라갯벌 등 환경영향평가 미흡을 지적하며 기본계획 취소 판결을 내렸다. 2029년 개항 목표에 제동이 걸린 셈이다. 김지은 새만금신공항백지화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은 “신공항이 들어서면 철새와 비행기 충돌이 연간 최대 45.9회로 조사돼 지난해 대형 인명사고가 난 무안공항(0.07회)과 비교하면 656배에 달하는 위험이 도사리게 된다”며 “경제성도 떨어져 양양국제공항처럼 ‘유령 공항’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건설업계 등 찬성 측에서는 “2006년 김제공항 백지화의 아픔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며 “국가 균형발전을 위한 인프라가 절실하다”고 맞서고 있다. 제주공항을 출발한 진에어기 군산공항에 도착한 지난 4일 오후 2시 50분쯤 수라갯벌에서 고라니 한 마리가 뛰놀고 있다. 김홍준 기자 국토부는 기본계획 취소 판결에 항소했다. 공동행동 측이 신청한 신공항 집행정지 가처분 결과도 조만간 나올 전망이다. 오후 3시30분. 이날 마지막 비행기가 남쪽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밑으로 철새가 떼 지어 날았다. 수라갯벌에선 고라니가 첨벙첨벙 뛰놀고 있었다. ━ ‘쌍둥이공항’ 흑산·울릉 석채언(65)씨는 흑산신공항 부지에 땅을 갖고 있다. 그가 전한 사연은 이렇다. 신안군수가 공항을 만들 거라며 도와달라고 해서 30만㎡(약 9만 평) 규모의 땅을 샀다. 당시엔 군수의 지방선거 구호로만 알았는데 2011년 덜컥 국토부에서 흑산신공항을 만든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15년째 신공항은 여전히 표류 중이다. 전남 신안군 흑산도 상라산에서 중계탑이 세워진 대봉산이 보인다. 대봉산에 흑산신공항을 만들 계획이다. 김홍준 기자 흑산신공항 조감도. 타당성 재조사가 진행 중이다. [사진 경북도] 흑산신공항 표류의 첫 길목은 흑산도가 다도해국립공원이란 점이었다. 국립공원 지역은 개발이 제한된다. 환경부 산하 국립공원위원회는 2023년 흑산신공항 부지인 예리 일대를 국립공원에서 제외하는 대신 근처 비금도의 명사십리 해수욕장을 끼워 넣었다. 또 당초 50인승 항공기를 기준으로 활주로를 설계했는데, 단종 추세라 80인승 항공기 기준 활주로로 변경하면서 사업비가 1833억원에서 6411억원으로 3배 이상 훌쩍 뛰었다. 흑산도 주민 김선복(50)씨는 “보다시피 음식점도, 숙박업소도 제대로 된 게 없어서 신공항이 생겨도 현재처럼 관광객이 흑산도는 패스하고 홍도로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며 “여기 주민 대부분이 사실은 목포가 생활권이라 차라리 그 돈으로 흑산도를 대폭 리모델링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했다. 사업비가 급증하면서 기획재정부가 타당성 재조사에 들어갔다. 다시 표류다. 2013년 예비타당성조사 당시 비용 대비 편익(B/C) 4.38로 사업성 기준 1.0을 월등히 넘겼지만 재조사에서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미지수다. 흑산도 근처 풍랑은 지독하다. 목포를 왕래하는 쾌속선 결항이 잦다. 섬 주민들은 연평균 50여 일, 많게는 110일가량 육지와 끊긴 채 살아간다. 울릉도 또한 마찬가지로 기상이 악화되면 순식간에 고도(孤島)로 변한다. 울릉신공항은 현재 70%의 공정률로 건설이 진행 중이다. [사진 국토교통부] 기상 여건은 물론 50인승에서 80인승으로 변경된 항공기 운항, 활주로 길이(1200m)도 똑같다는 점에서 흑산신공항과 울릉신공항은 ‘쌍둥이공항’으로 불린다. 울릉도·독도 해설사인 최희돈(61)씨는 “무안공항 사고 이후 울릉신공항 활주로를 연장해 안전성을 높여야 한다는 현지 주민의 목소리가 커졌다”고 전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신공항이 완성되더라도 울릉도나 흑산도 모두 서울 왕복 항공료가 50만원가량 들 텐데, 그 정도면 부담이 되지 않겠느냐”며 이용객 수를 걱정했다. 실제로 감사원은 지난 9월 울릉신공항 수요는 1.96배, 흑산신공항 수요는 5.93배 과다 예측됐다고 지적했다. 국토부는 2050년 연간 이용객이 울릉신공항은 107만8000명, 흑산신공항은 108만 명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감사원과 한국교통연구원이 계산해 보니 각각 55만 명과 18만2000명에 불과했다. ‘쌍둥이’의 공정률을 보면 울릉신공항은 70%, 흑산신공항은 아직 0%. 전남도는 흑산신공항 타당성 재조사가 이달 중 마무리되면 연내 착공이 가능해 ‘0%’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란 입장이다. 석씨는 “지긋지긋하다. 50대 초반에 사놓은 땅인데 지금 당장 착공해도 내 나이 70세를 훌쩍 넘어 개항할 것 같다. 땅을 팔든, 기부하든 이젠 미련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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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값 떨어지면 내집 마련도 멀어진다…원자재 가격 고공행진
━ 글로벌 최약체 통화 전락한 원화 고환율 장기화가 건설업계 전반에 경고등을 켜고 있다. 건설사 핵심 자재와 원재료의 상당 부분을 해외에서 조달하는 만큼, 환율이 오르면 원가가 즉각적으로 불어난다. 누적된 원가 압박은 공사비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분양가 상승 우려로 번지며 주택 공급 시장에 부담을 키우고 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KICT)이 최근 발표한 ‘2025년 11월 월간 건설시장동향’에 따르면 지난 9월 수입 중간재 물가 지수는 121.8로 전년 동기(117.1) 대비 4.0% 상승했다. 같은 기간 수입 생산재 물가지수 역시 121.8을 기록했다. 고환율 장기화 속에 자재비 전반이 오르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 원·달러 월평균 환율은 지난해 9월 1332.76원에서 올해 9월 1392.38원으로 약 4.5% 상승했다. 여기에 이달 들어 환율이 1450원대 안팎에서 좀처럼 안정되지 않으면서, 자재 가격에 대한 상방 압력도 한층 커지고 있다. 자잿값 상승 등은 국내 건설 공사비를 사상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공사비원가관리센터에 따르면 지난 9월 건설공사비지수는 전월보다 0.57% 오른 131.66을 기록해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전선·케이블(2.36%), 냉간압연강재(1.3%), 피용자보수(인건비·1.14%), 산업용 가스(1.09%), 콘크리트 제품(1.04%) 등 주요 원자재와 인건비가 일제히 상승한 영향이다. 관련기사 녹아내리는 원화값…바트·링깃에도 밀렸다 외환·금융위기 데자뷔? 그때와는 달라 이 같은 자재비 상승은 분양가에도 상향 압력을 가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 서울의 공동주택 3.3㎡당 평균 분양가는 2022년 2983만원에서 올해 4829만원으로 62% 증가했다. 경기도는 같은 기간 38% 상승했다. 업계에서는 환율 상승세가 지속될 경우, 내년 하반기 공사 물량이 늘어나는 시점에 수입 자재 수급이 어긋나면서 가격이 추가로 뛸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여기에 대출금리까지 오르면서 주거 부담은 더 커지고 있다. 5대 은행의 주택담보대출(주담대) 5년 고정금리 상단은 지난 14일 기준 6.04%로 집계됐다. 주담대 고정금리가 6%를 넘어선 것은 2023년 12월 이후 약 2년 만이다. 최근 환율과 집값의 동반 불안으로 한국은행의 연내 기준금리 추가 인하 기대가 낮아지면서 시장금리가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면서다. 최지욱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환율과 서울 부동산 가격 상승 등 금융안정 리스크는 올해 마지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기준금리 동결(2.5%)이 예상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말했다. 고환율·고공사비·고금리가 맞물린 ‘3고(高) 부담’ 속에 내 집 마련 여건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국토교통부의 ‘2024년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자가 가구의 연 소득 대비 주택가격 배수(PIR·Price Income Ratio)는 중간값 기준 13.9배로 나타났다. 이는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을 경우 서울에서 집을 장만하는 데 약 14년이 걸린다는 의미다. 서울 PIR은 2022년 15.2배에서 2023년 13배로 낮아졌다가 지난해 다시 확대됐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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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금융위기 데자뷔? 그때와는 달라
━ 글로벌 최약체 통화 전락한 원화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1400원 중반대를 넘나들며 시장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환율은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과 구조를 비추는 거울이다. 일부에서는 1500원 돌파를 점치거나 외환위기 당시의 불안한 기억을 떠올리지만, 이번 환율 상승(원화 가치 하락)을 위기의 전조로 보기는 어렵다.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환율이 급등한 것은 당시 한국경제가 단기 외채에 과도하게 의존한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데 기인한다. 해외 시장에서 달러화 부족 사태가 발생하자 외국인 자금이 갑자기 빠져나가고 단기 외화자금의 만기 연장이 막히면서 국내 외화 유동성이 고갈된 것이 근본 원인이었다. 즉, 위기가 ‘높은 환율’이 아닌 ‘달러 부족’에서 발생한 것이다. 오히려 크게 오른 환율은 수출 증가, 외국인 자금 복귀 등으로 우리 경제가 위기를 빠르게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됐다. 지금의 고환율은 달러 부족이나 금융 불안의 결과가 아니라, 지난 10여년간 축적된 구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환율은 경제의 종합 성적표이자 신호이기 때문에, 단기적 움직임보다는 그 이면의 구조적 변화를 읽을 필요가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달러화가 과거보다 크게 비싸졌다. 이는 미국 경제의 구조적 우위에서 비롯된다. 2010년 이후 미국은 기술혁신과 생산성 향상을 바탕으로 글로벌 경제성장을 견인했다. 정보기술(IT), 인공지능(AI) 등 첨단 산업에서 미국 기업들은 글로벌 경제를 선도했고, 자본시장은 풍부한 유동성과 혁신적 금융 인프라를 통해 투자자금을 끌어들였다. 미국 증시는 지난 10여년간 연평균 두 자릿수 수익률을 기록하며 세계 자금을 끌어들였다. 반면 유럽, 일본, 중국 등 여타국은 낮은 성장과 인구 고령화, 구조개혁 지연으로 생산성이 정체됐다. 그 결과 글로벌 주식시장에서 미국의 비중은 2010년 40%대에서 최근 약 65%로 상승했다. 이러한 미국의 장기 호황은 달러화의 구조적 강세를 이끄는 가장 기본적인 배경이다. 국제 환경도 달러 강세를 뒷받침하고 있다. 유럽은 정치적 불안과 경기침체 우려로 유로화 약세가 지속하고, 일본은 새 내각 출범 이후에도 완화적 통화정책을 유지하며 엔화도 약세 흐름을 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인플레이션 반등 위험으로 금리 인하를 늦추며 통화완화 기조로의 전환을 주저하고 있다. 관련기사 녹아내리는 원화값…바트·링깃에도 밀렸다 원화값 떨어지면 내집 마련도 멀어진다…원자재 가격 고공행진 한국은 생산성 둔화와 투자수익률 하락에 직면해 있다.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2000년대 중반 5% 수준에서 2010년대에는 2%대로, 최근에는 1%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제조업 중심의 성장모델이 한계에 이르고, 서비스업은 생산성 제고에 실패했다. 기업의 수익성은 둔화했고, 저축은 늘었지만 국내 투자로 이어지지 못했다. 2010년 이후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맞물려 연금·보험 중심의 장기저축이 많이 증가했는데, 이 자금이 더 높은 수익률을 찾아 해외로 이동하고 있다.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비중은 2005년 10%대에서 올해에는 57.1%(5월 기준)에 이르고, 보험사와 개인 투자자의 해외투자 규모도 사상 최대 수준이다. 이렇게 형성된 ‘저축의 해외 유출 구조’는 원화 가치를 끌어내린 근본적인 요인이다. 이러한 변화는 한·미 간 금리 차 역전으로도 나타난다. 2022년 이후 미국이 인플레이션에 대응해 공격적인 금리 인상을 단행하면서 기준금리는 한국보다 1.5%포인트 이상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의 기준금리는 현재 4%에 이르지만, 한국은 2.5%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 금리 차는 외국인 자금의 국내 유입을 제한하고, 오히려 달러 자산으로의 이동을 촉진한다. 금리 역전이 장기화하면서 원화는 자연스러운 약세 압력을 받게 되었고, 기업과 개인 투자자들은 원화 자산보다 달러 자산을 더 선호한다. 이에 더해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고립주의 강화, 보호무역 조치,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요구는 기업들에 달러화 확보 부담을 주고 있다. 그 결과 달러당 원화값은 1450원선을 넘어선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은 위기 상황은 아니지만, 구조적 불균형 위에 시장의 불안 심리가 더해진 결과다. 고환율이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수출기업에는 채산성 개선과 가격 경쟁력 향상의 효과가 있고 경기 회복에도 도움이 된다. 지난 외환위기 이후 그랬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국내 산업의 경쟁력이 약화하고 생산성이 낮은 상태에서 고환율이 장기화하면, 이는 구조적 문제를 심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저축이 국내 투자로 연결되지 못하고 해외로 빠져나가는 구조가 굳어지면, 장기적으로 성장잠재력이 떨어지고 일본식 저성장의 악순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단기적으로는 지나친 불안 심리에 의한 쏠림 현상이 발생할 경우 시장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원화 약세를 만들어 내는 구조를 바꾸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외환시장 구조를 선진화해 기업과 금융기관이 스스로 위험을 관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필요가 있다.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으로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불필요하게 변동성이 확대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업 역시 고환율을 이익 기회로만 보지 말고 체질 개선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원화 약세로 인한 추가 수익을 구조조정과 기술혁신 투자에 활용해야 한다. 과거 2000년대 초 일부 기업이 고환율을 이용해 무리한 사업 확장을 추진했다가 이후 환율 급락으로 큰 손실을 본 사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 이익을 연구개발과 신사업 투자, 재무구조 개선 등 미래 경쟁력 강화에 활용해야 한다. 정부는 이런 기업의 노력이 결실을 볼 수 있도록 세제 혜택, 정책금융 지원, 자본시장 개혁 등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원화 약세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비추는 거울이다. 과거 위기의 트라우마에 갇히어 환율 상승을 두려워하고 이에 단기 대응하기보다는, 생산성과 투자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경제 체질을 바꾸는 근본적 해법에 집중해야 한다. 달러 강세와 글로벌 자본 이동이라는 외부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체력을 다지는 일, 그것이 진정한 환율 안정의 길이다. 이승헌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전 한국은행 부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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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아내리는 원화값…바트·링깃에도 밀렸다
━ 글로벌 최약체 통화 전락한 원화 # 자녀 두 명과 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심지혜(45)씨는 요즘 매일 아침 태국 환율을 확인한다. 지난해 가을까지만 해도 태국 화폐 1바트당 37원이었던 원화 가치가 비상계엄 사태를 겪으면서 1바트당 42원까지 하락(환율은 상승)하더니 최근에는 45원까지 떨어졌다. 지난해 초 자녀당 2000만원 정도였던 학비가 원화 가치 하락만으로 올해에는 2250만원이 됐다. 심씨는 “올해 학비만 연간 500만원이 추가로 든 데다 생활비도 만만찮다”며 “최근에는 태국의 정치·경제 상황이 더 좋지 않은 데도 원화 가치가 오를 기미가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 내년 초 유럽 여행을 준비 중이던 대학생 김소연(23)씨는 최근 항공권 결제를 앞두고 여행지를 바꿔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유로당 원화 환율이 1700원을 뚫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1유로가 1450원 수준이었지만, 최근엔 1700원대를 넘나들며 원화값이 16년 만의 최저치를 찍었다. 김씨는 “유럽 물가도 비싼데 환율까지 이렇게 오르니, 감당할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원화가 녹아내리고 있다. 달러 대비 약세가 지속하는 가운데 다른 나라 통화에 대해서도 원화 약세가 두드러지는 ‘고환율’이 고착화하는 흐름이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21일 달러당 원화값이 1475원대까지 떨어지며 약 7개월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미국의 관세전쟁이 본격화했던 지난 4월 9일(1472원)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월간 종가 기준 달러당 원화값의 연평균치는 1414.08원으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1394.97원)보다도 낮아 역대 최저치로 떨어졌다. 특히 이달 들어 원화는 주요국 통화 중 가장 큰 약세를 나타냈다. 21일 종가 기준 원화 가치는 달러 대비 3.29% 떨어져(환율 상승) 새 정부의 확장재정 기대감으로 약세를 보인 일본 엔화(-2.11%)보다 낙폭이 훨씬 컸다. 같은 기간 유로(0.1%), 파운드(0.54%)는 달러 대비 강세였다. ━ 개인·기업 ‘달러 사냥’에 환율판 코리아 디스카운트…경상흑자도 안먹힌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동남아 신흥국 통화인 말레이시아 링깃(0.75%) 역시 달러에 대해 강세를 보였고, 태국 바트(-0.11%)·필리핀 페소(-0.44%)는 약세였지만 원화보다 낙폭이 훨씬 작았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정치적 불확실성이 줄고 경상수지가 흑자를 이어가는 상황에서도 원화가 글로벌 ‘최약체’ 통화로 전락하면서, 시장에서는 ‘환율판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태국 유학 자녀 학비, 1년새 13% 더 들어 달러당 원화값이 1450원 아래로 무너진 경우는 올해를 제외하면 1998년 IMF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4년 비상계엄 사태까지 단 세 차례뿐이었다. ‘고환율=위기’의 신호였다. IMF 당시 원화는 800원대에서 1900원대로 폭락했고, 금융위기 때도 900원대에서 1500원대까지 급락하며 코스피가 반 토막 났다. 외환당국이 1400원을 ‘마지노선’으로 여겼던 것도 환율 급등이 곧 디폴트 위험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원화가 급락하면 외화부채 상환 부담이 커졌고, 이는 국가 신용도 하락과 외국인 자금 이탈로 직결됐다. 관련기사 원화값 떨어지면 내집 마련도 멀어진다…원자재 가격 고공행진 외환·금융위기 데자뷔? 그때와는 달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수출이 호조를 이어가고 올해 경상수지는 사상 두 번째로 큰 흑자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3분기까지 경상수지 누적 흑자는 827억70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3% 늘었다. 국가 신용 위험도 안정적이다. 21일 기준 5년물 국채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23.55bp로 탄핵 정국 당시 45bp대에서 크게 낮아졌고, 한국의 순대외금융자산도 2014년 127억 달러에서 올해 2분기 1조304억 달러로 80배 넘게 확대됐다. 주식 시장은 새 정부 출범 후 불과 보름 만에 3000선을 회복했고, 10월 이후로는 4000선 안팎에서 등락을 이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원화 가치는 오르지 않고 있다. 6개 주요 통화국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DXY)는 20일(현지시간 종가기준) 100.16을 기록했다. 지난 9월 저점(96.63)에서 최근 100을 돌파하며 상승세로 돌아섰다.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 종료 기대와 12월 미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이 작아지면서 달러가 다시 강세 흐름을 보이고 있다. 달러가 강세를 보이면 원화가 상대적으로 약세를 나타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문제는 이번 원화 약세가 이보다 훨씬 깊고 넓다는 점이다. 왜 유독 원화는 주요 통화국은 물론 바트·링깃·페소 같은 신흥국 통화 대비에서도 더 가파른 낙폭을 보일까. 전문가는 공통으로 “원화 약세는 달러 강세 요인도 있지만, 국내적 요인이 더 크기 때문에 한국 고유의 위험 프리미엄이 붙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요즘 시장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원인 중 하나는 개인·기업·연기금으로 이어지는 ‘달러 사냥’이다. 한국 경제에서 빠져나가는 달러 유출 규모와 속도가 주요 국가 대비 압도적으로 빠르고 심각하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올해 해외 투자 등 금융계정을 통한 달러 유출은 9월까지 809억9000만 달러에 달해 같은 기간 경상수지 누적 흑자 규모와 맞먹는다.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가 다시 해외투자로 빠져나가는 구조가 고착되며 환율의 결정 요인이 ‘자본 이동’으로 옮겨갔다는 진단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최근 환율 움직임은 대부분 국내 거주자의 해외 투자에 좌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대로 가면 달러당 1500원선 배제 못해 이러한 자본의 ‘탈(脫)한국’ 밑바탕에는 정치·정책의 불확실성이 깔려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경제 불확실성을 낮추려면 정책 일관성이 핵심”이라며 “정책이 자주 바뀌거나 갑작스럽게 부동산 거래를 중단하는 식의 조치는 불확실성을 키우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인식이 커지면 국내 자금은 해외로 유출될 가능성도 커진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는 최근 부동산·노동·투자 분야에서 법과 제도가 수시로 바뀌며 정책 변동성이 높아진 상태다. 이런 잦은 정책 변경과 경제의 정치화는 불확실성을 키워 자본 이탈과 환율 상승 압력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 내수 취약성과 편중된 산업 구조도 원화 약세를 부추기는 국내 요인이다. 허재환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한국은 민간 소비와 서비스수지가 부진해 외부 충격에 더 취약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태국·말레이시아·필리핀은 관광·송금·젊은 인구 등 내수 버팀목이 강해 충격을 흡수하지만, 한국은 고령화·가계부채·서비스수지 적자가 겹쳐 환율 변화가 곧바로 내수에 전가되는 구조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한국의 가계부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91.7%로, 말레이시아(69.3%), 베트남(24.9%), 필리핀(11.6%)보다 높다. 또한 한국은 고령층 비중 확대로 소비 탄력성이 낮은 반면, 필리핀(25세)·말레이시아(30세)는 인구 구조상 내수 확장 여력이 크다는 평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편중’ 역시 양날의 칼이다. 서정훈 하나은행 수석연구위원은 “TSMC의 대만을 제외하면 한국의 AI·반도체 산업 비중이 아시아에서 가장 높다”며 “인공지능(AI) 리스크가 부각될 때 글로벌 자금이 가장 먼저 빠져나오는 시장이 한국”이라고 설명했다. 호황기엔 성장 동력이지만, AI 고평가 논란이나 반도체 규제 가능성이 제기될 때는 곧바로 원화 약세로 이어지는 구조적 취약성이 된다. 한국은 AI·반도체 업종 쏠림이 유독 큰 데다, 대중(對中) 교역 의존도 역시 높아 중국 경기 변동에도 환율이 민감하게 흔들린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지금의 원화는 외환시장에서 상대적 최약체 통화로 평가받고 있다”며 “한국은 수출·수입 모두에서 중국 비중이 높아 중국 경기 둔화나 미·중 리스크가 커질 때 환율이 더 크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여기에 국내 정치 불안정,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이 겹치며 원화 약세 압력이 복합적으로 누적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이제 시장의 시선은 달러당 원화값이 ‘1차 저항선’인 1480원을 깰지에 집중되고 있다. 올해 원화 가치의 저점은 지난 4월 9일 기록한 1484.1원이다. 문다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미 달러 강세 대비 원화 낙폭이 상당해 하단으로 갈수록 부담이 커진다”며 “1480원대에서는 국민연금의 전략적 환헤지나 당국의 미세조정이 나올 수 있어 급격한 추가 하락은 제한적”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달러당 원화값이 연저점인 1480원을 넘어 1500원대에 진입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환율 변동성이 커질 경우 수입물가 상승을 통해 인플레이션 압력을 자극하고 내수 경기를 둔화시키며, 환차손을 우려한 외국인 자금이 주식시장에서 이탈할 가능성도 커진다. 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는 “과거엔 원화 가치가 급락하면 해외로 나가는 자금이 즉시 위축됐지만, 지금은 환율이 오르든 말든 달러 유출이 멈추지 않는 구조가 됐다”며 “이 흐름이 계속되는 한 시장이 말하는 1500원 같은 저점 예측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김정식 교수는 “1500원은 심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경계선이어서 단기적으로는 외환당국이 이를 넘지 않도록 방어할 가능성이 크다”면서도 “다만 급격한 외환보유액 소진으로 개입 여력이 약해지면 1500원선 터치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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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 360배 성장 경험한 86세대, 내리막길 청년층 공포 이해못해”
━ 대한민국은 2차 베이비부머 월드 장덕진 “86세대는 다른 세대의 공포와 상실감을 이해하지 못한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86세대 독식에 대해 “유감스럽지만, 생물학적 퇴장 전에는 86세대의 주도권은 꽤 오래 유지될 것”이라며 13일 이렇게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86세대와 2030의 불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 “내가 86세대다. 한국 1인당 GDP가 100달러였을 때 태어났는데, 지난해 3만6000달러였다. 거칠게 말해 360배 성장을 경험한 세대다. 인구·경제·문화 모든 것이 성장하는 시대에 살았다. 그러니, 모든 것이 내리막인 2030세대의 공포나 상실감을 이해하지 못한다. 좋은 시기에 부동산을 취득한 뒤 정의를 추구한다며 본인들 집권 시기에 2배, 4배씩 올려놨다. 그 결과 지금 젊은 세대는 다 경기도 외곽으로 쫓겨난 거 아닌가. 하지만, 이에 대한 자책이나 반성이 없지 않나.” 그런데도 패권이 오래 유지되는 배경은. “86세대 세계관이 한국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잡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반대하면, ‘생각이 없다’거나 ‘극우’로 몰리기도 한다.” 86세대가 과잉대표 됐다는 지적도 있다. 관련기사 대항마 없는 주류, 시대를 주무르다 ‘표’ 많은 세대만 챙기나…2030 박탈감 “동의한다. 20년 전 우리나라 엘리트 1만2000명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한 적이 있다. 그때 깜짝 놀랐던 것이 86세대에서 학생운동 경력이 있는 경우엔 비슷한 조건의 다른 엘리트에 비해 국회의원이 될 확률이 100배가량 높았다. 다른 세대뿐 아니라 같은 세대에서도 그랬다. 다시 말해 대학 때 나름의 희생과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100배가량 보상을 받은 셈이다. 정치뿐이 아니다. 아파트 같은 부동산을 포함한 한국 사회의 자산도 사실상 독차지한 세대다. 또한, 현재 일자리로 대표되는 노동시장도 마찬가지다. 민주노총이나 제조업 쪽 강성노조를 움직이는 것도 다 86세대다. 다른 세대에게 주어진 게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일각에선 연령 효과라고도 한다. “두 가지 경우다. 연령 효과는 나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코호트 효과는 이 집단만이 갖는 특수한 케이스로 보는 거다. 그런데, 86세대의 기득권이 과연 연령 효과일까? 앞서 산업화세대나 이후 밀레니얼 세대가 86세대가 누렸던 것처럼 교육·취업·자산형성·정치권 입성의 기회를 가졌냐고 본다면 나는 회의적이다. 연령 효과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86세대는 코호트 효과가 훨씬 크게 나타난다.” 86세대가 좀 양보해야 한다고도 하는데. “본인들도 그랬듯이 후배 세대들이 주류로 진입할 수 있게 길을 터줘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 내놓을 일은 없을 거라고 본다. 독일에서도 비슷한 세대가 있는데 독일 전문가들은 ‘그들이 사망해야 끝난다’고 설명하더라. 처음엔 운동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비즈니스가 됐다. 쫓겨나지 않는 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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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많은 세대만 챙기나…2030 박탈감
━ 대한민국은 2차 베이비부머 월드 지난 몇 년간 정치 지형 변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30대에서 늘어나는 반(反)민주당 정서다. 이들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40대 못지않게 민주당의 주력 지지층이었다. 30대의 변심은 세대 간 자원 재배분의 불균형이 심해지는 데다, 장·노년에 집중된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저성장·고령화 속에서 자산 격차는 심해지고, 연금·건강보험 등 공공서비스의 세대 간 비용 분담 문제가 불거졌다. 번듯한 일자리는 줄고, 일하게 되더라도 노쇠화하는 조직에서 승진 기회를 잡기 어렵다. 그런데 정치권은 장노년의 입맛에 맞는 정책만 내놓는다. 밀레니얼 세대의 불만이 세대 간 갈등으로 폭발해 정치권을 휩쓸 가능성은 여기에 있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의 전국지표조사(NBS)는 1년에 두 차례 정당별 호감도를 조사한다. 2020년 8월 민주당에 호감을 가진 30대는 52%로 40대(59%) 다음이었다. 비호감은 42%였다. 5년 2개월 뒤인 지난달 조사에서는 비호감(48%)이 호감(44%)을 앞질렀다. 40대(호감 68%, 비호감 29%)와 대비도 컸다. 30대의 민주·진보 계열 정당 지지율은 2020년 8월 54%(민주당 44%, 열린민주당 4%, 정의당 6%)에서 지난달 36%(민주당 34%, 조국혁신당 2%, 진보당 0%)로 쪼그라들었다. 30대는 지난 10년간 벌어진 자산 격차의 피해자다. 30대 가구(가구주 연령 기준·가계금융복지조사)의 순자산은 2015년 1억9200만원에서 지난해 2억5400만원으로 32.3% 늘었다. 평균 증가율(57.9%)에 한참 못 미친다. 반면 2000년대 초중반 일자리를 잡아, 몇 년 전 ‘갭투자’ 등에 적극적이었던 40대의 순자산은 2억6500만원에서 4억5000만원으로 70.2% 늘었다. 60대도 65.6%(3억1300만원→5억1000만원) 증가했다. 30대는 ‘주거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하는 시기다. 집값 폭등은 그들에게 자산 격차뿐만 아니라 삶의 질을 개선할 기회 또한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관련기사 대항마 없는 주류, 시대를 주무르다 “GDP 360배 성장 경험한 86세대, 내리막길 청년층 공포 이해못해” 공적 서비스의 세대 간 비용 분담 문제도 첨예해졌다. 기초연금·문재인 케어·지방자치단체의 복지 확충 등으로 고령자가 받는 공적 서비스가 집중적으로 늘면서, 젊은 세대의 ‘노인 봉양’ 부담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고령화는 젊은 세대가 더 많은 노인을 감당해야 하는데, 성장률은 도리어 낮추는 이중의 효과를 가져온다. 65세 이상이 받는 공적이전 규모는 2013년 1인당 571만원에서 2023년 1236만원(국민이전계정공공연령재배분)으로 2.2배 늘었다. 연평균 7.3%씩 늘어난 셈이다. 같은 기간 30~59세가 조세·연금·건강보험 등을 부담하는 금액은 1.6배(567만원→923만원) 늘었다. 1인당 명목 국민소득 증가폭도 1.5배(3115만원→4658만원)에 불과했다. 조직의 고령화도 밀레니얼세대를 압박한다. 금융인력 기초 통계에 따르면 금융회사 임직원 중 39세 이하 비중은 2016년 54.7%에서 지난해 43.0%로 감소했다. 거꾸로 50세 이상은 13.3%에서 22.2%로 증가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주요 기업의 직원 근속 연수도 가파르게 늘고 있다. 연공서열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조직에서 중장년들은 예전 같다면 30대에게 돌아갔을 몫을 고스란히 차지하게 됐다. 이 모든 문제는 정책과 직결된다. 장노년 유권자 비중이 늘어나자 정치권은 이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연금·건강보험 개혁은 지지부진하고, 되더라도 중장년 가입자의 이익이 지켜지는 방향이다. 국민의힘은 물론 민주당도 고령 자산가에게 유리한 종합부동산세 폐지, 상속·증여세 인하를 논의한다. 정년 연장을 비롯해 은퇴를 몇 년 앞둔 이들에게 정책만 속도감 있게 추진된다. 결국 세대 간의 경제적 이해관계 차이가 정치적 갈등으로 발화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대선 개혁신당과 민주노동당 후보가 20~30대에서 집중적인 득표를 한 것은 세대 간 균열의 전초전에 가깝다. 영국의 젊은 세대가 기성 정당인 보수당·노동당을 모두 외면하고 녹색당·영국개혁당(Reform UK)을 지지하는 행태가 한국에서도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조귀동 정치컨설팅 민 전략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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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마 없는 주류, 시대를 주무르다
━ 대한민국은 2차 베이비부머 월드 이재명·김민석·정청래·장동혁·임종석(이상 정치인)·김범수·김택진(기업인)·김명환(노동운동가)·봉준호·유재석·강호동·박진영·방시혁(문화예술인)….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제2차 베이비부머라는 점이다. 1964년부터 1974년까지, 대학으로는 83학번부터 93학번까지, 86세대(80년대 학번, 60년대생)와 X세대(70년대생)에 걸쳐있는 이들 세대는 정치인부터 자수성가 기업인, 노동운동가 그리고 문화 예술인까지 현재 대한민국의 주류를 두텁게 형성하고 있다. 10여 년에 속하는 단일 세대가 정치부터 문화예술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코어·주류를 형성한 유일한 연령 집단(코호트)이다. 그동안은 부각되어온 86세대나 X세대도 따지고 보면 제2차 베이비부머의 하위 집단 성격이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베이비부머’란 표현에서 드러나듯, 일단 숫자가 많다. 연간 80만~90만 명가량 출생했다. 945만 명에 달하는 이들은 유권자(4440만 명)의 21%가량을 차지한다. 22대 국회에는 157명(52.3%) 의원이 이 세대에 속한다. 유독 어떤 이들에겐 모든 것이 때 맞춰 일어난다. 제2차 베이비부머들이 그랬다. 대학에 갈 때는 졸업정원제 등의 여파로 입학 정원이 크게 늘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대학생이 되었다. 어수선한 시국 탓에 강의실 대신 거리에 설 때가 많았지만, ‘3저(低) 호황’ 덕분에 자격증 하나 없이도 어렵지 않게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었다. 취업 후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윗세대가 대거 퇴장해 일찍 길이 열렸고, 제1기 신도시 개발로 ‘내 집 마련’이 부모 도움 없이 가능했다. 집을 사고 나니 부동산은 폭등했고, 큰 노력 없이 ‘자산가’가 됐다. 자녀를 키울 때는 초·중학생 전면 무상급식이 실시됐고, 중장년에 접어들자 ‘문재인 케어’로 부모님 부양 부담이 줄었다. 은퇴가 가시화되자 20년 가까이 멈춰있던 국민연금 개혁이 ‘더 내지만, 더 받는’ 방식으로 처리됐다. 대한민국의 국력 상승기의 절정에서 혜택을 누렸던 이들은 이제 정년 연장(60세→65세)을 눈앞에 두고 있다. 2000년 민주화운동 사면·복권으로 정치계 입성이 가능해졌던 이들이 지난해 발의한 ‘민주유공자 예우법’도 추진 중이다. 본인뿐 아니라 배우자와 자녀에게도 혜택이 주어지는 법안이다. 어느 시점에선가 최대 ‘표심 집단’이 되면서 이들에 유리한 제도들이 속속 도입되는 모양새다. 박동원 폴리컴 대표는 “민주화운동이라는 공통된 기억과 연대의식으로 단단한 결속력을 갖고 있고, 숫자도 많기 때문에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법안과 제도를 밀어붙일 수 있다”고 봤다. ━ 청년 때 학생운동·3저호황·벤처붐 경험…기득권 된 뒤 입학사정관제·정년연장 과실 제2차 베이비부머들은 시대의 운(運)을 쥐고 출발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자격증’인 대학이 그랬다. 1980년 신군부가 과열된 과외 해소와 교육 정상화를 내걸고 내놓은 7·30 조치는 대학 입시의 관문을 넓혀줬다. 대학 입학정원제를 졸업정원제로 바꾸면서 대학들은 졸업정원의 130~150%까지 신입생을 더 뽑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시행한 1981학년도는 전년도보다 10만1045명이 늘어난 30만6880명이 대학으로 들어갔다. 대학 취학률이 11.4%(1980년 기준)에 불과했던 시대였다. 졸업을 어렵게 한다고는 했지만, 대학 ‘간판’이 중요했던 한국 사회에서는 큰 혜택이 됐다. 문을 넓힌 대학에서 이들은 ‘세력’을 확보했다. “세대형성 시기에 민주화를 실현하려는 학생운동을 경험하고 그 가치를 내면화”(오세제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하면서 활동영역을 넘어 연결되는 세대가 됐다. 또한 공장에 취업(‘학출’)하거나 도시빈민과의 연대를 통해 이후 노동계 및 시민사회와의 연대도 가능해졌다. 관련기사 “GDP 360배 성장 경험한 86세대, 내리막길 청년층 공포 이해못해” ‘표’ 많은 세대만 챙기나…2030 박탈감 문화계도 마찬가지. 공연·영화계에선 ‘1987’ ‘택시운전사’ ‘광화문연가’ 등 80년대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이 계속 다뤄지고 있다. 60~70년대는 소외되고, 90년대 역시 tvN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외엔 두드러진 작품이 나오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이 시대가 ‘과잉대표 됐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이재명 정부 대통령실 문화체육비서관이 된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2020년 ‘86세대의 문화권력과 그 양가성에 대하여’를 통해 “80년대 대학 총학생회 살림살이와 문화제를 담당했던 사회부장과 문화부장 출신들이 현재 문화예술 분야에서 파워 엘리트 그룹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며 “통상적으로 한 세대가 기성세대, 기득권 세대로 진입하면 그들 청년문화 시절의 상징권력이 약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86세대의 문화적 상징권력은 여전히 강하게 드러난다”고 썼다. 제2차 베이비부머의 첫 주자였던 83학번들이 대학 4학년이었던 1986년부터는 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 호황이 시작됐다. 1986~1989년 3년간 실질 성장률은 평균 12%에 달했고, 1980년 5%였던 실업률은 1988~1997년 10년간 2%대를 유지했다. 대기업들의 상·하반기 대규모 정기공채가 제도화되면서 대입이 그랬듯 취업의 문턱이 낮아졌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자산 마련에서도 비슷했다. 오제세 교수는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벤처 붐과 함께 ‘바이 코리아’라 불리는 주식시장의 대세 상승기가 있었고, 90년대 신도시 건설이라는 부동산 활황기도 있었다. 이때 386세대의 일부는 집을 장만하여 중산층으로 편입되거나 극히 일부는 신자산계층으로 도약하는 기회를 갖기도 한다”(‘386세대 세대효과의 특징 연구-세대효과의 조건적 표출을 중심으로’)고 설명했다. 민주화운동 복권으로 대거 정계 입성 IT와 벤처 붐을 통해 김범수·김택진 등 자수성가형 기업인이, 영상미디어의 발달은 박진영·방시혁 등의 거대 레이블을 일군 문화예술인이 탄생했다. 이후 세대에선 드물게 발견되는 유형이다. 이후 90년대 학번들은 정치권에 활발한 진출은 적었지만, 86세대의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실제로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코어 세력은 86세대와 90년대 초반 학번이 꼽힌다. 이들의 결합에 대해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은 “통상 학생운동을 80년대로만 연결짓는데, 학생운동의 동원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대는 90년대 초중반”이라고 말했다. 최 소장은 “80년대는 학생운동이 개화했지만, 여전히 대학생 숫자가 적었다. 반면 90년대부터는 대학 진학률이 50%를 넘어서면서 시위 참여자가 커졌고 과거처럼 과도한 탄압이 없었기에 마치 MT 가듯 학생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90년대 학번 중후반까지도 이런 자기장에 속한 세대”라고 말했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들을 ‘후기 386세대 네트워크’라고 명명한다. 시대적 흐름을 탄 덕분에 ‘자산가’로 올라선 이들이 이제는 사회·경제적 기득권을 통해 동맹을 맺었다는 것이다.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의 중도 사퇴를 불러왔던 초·중 무상급식은 제2차 베이비부머들이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에 걸쳐 있을 때였다. 대입에서 기존보다 ‘공부 외 요소’를 대폭 수용하게 된 입학사정관제는 노무현 정부 때 기획돼 이후 정부를 거치며 완전히 정착됐다. 성적 외에 인성·리더십 등 ‘전인적 요소’를 함께 본다는 취지로 도입했으나, 2019년 조국 사태에서 확인됐듯 실제로는 부모의 사회적 영향력이 자녀를 명문대-전문직으로 끌어줄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준 결과가 된 측면이 있다. 강정석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 사무국장은 “조민은 ‘무시험 전형’을 통해 입학한 케이스인데 고려대 입학, 부산대 의전원 입학은 논문 참여 및 제1저자 등재 등 보통 입시생이라면 갖지 못할 ‘스펙’”이라며 “소위 ‘86세대’가 자신들이 획득한 경제적·사회적 자원을 아래 자녀세대에 안정적으로 ‘세습’해주는 계급 유지 전략으로 이를 활용하고 있다”(‘계급 유지 전략으로서의 교육의 문제:불평등의 구조화와 86세대’)라고 지적했다. 2017년엔 이른바 ‘문재인 케어’가 도입됐다. MRI·초음파 급여화와 중증·고액질환 위주 보장성 강화가 골자였는데, 소득 하위층과 65세 이상 노년층이 최대 수혜자로 꼽힌다. 50대에 접어든 제2차 베이비부머가 노년기에 접어든 부모 부양 부담이 대폭 절감됐다는 분석도 나왔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이들이 51~61세에 걸쳐진 올해 3월엔 20년 가까이 논의가 멈춰있던 국민연금 개혁이 추진됐다. 보험료율을 9%에서 13%로 단계적으로 올리되, 소득대체율도 40%에서 43%로 인상했다. ‘더 내지만, 더 받는’ 방식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전국 만 20세 이상 100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5 국민연금 현안 대국민 인식조사’에서 20대의 83.0%, 30대의 82.8%가 보험료율 인상에 ‘부정적’이라고 응답하는 등 20·30대는 “젊은 세대에게 부담을 떠넘겼다”며 반발했지만, 되돌리진 못했다. 1기 신도시, IT 붐, 바이 코리아 등 ‘수혜’ 여권이 추진하는 정년 5년 연장을 바라보는 시선도 비슷하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지난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정년 연장 시 5년 후 60~64세 고령 근로자 고용을 위한 비용은 30조2000억원으로 추산됐다. 25~29세 청년층 90만 명을 고용할 수 있는 수준이다.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은 “정년 연장 논의는 필요하지만, 가장 많이 피해를 볼 청년층들의 의견이 철저히 배제된 채 정년 연장이 제도적으로 가닥을 잡는 것을 보자니, 국민연금 개악에 정치권이 한 마음으로 야합했던 악몽이 재현되는 것 같다”며 “양대 노총이 원하는 정년 연장의 혜택은 극히 일부만 누리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임명묵 작가는 “제2차 베이비부머는 사회 주류이자, 기득권인데 인정하지 않는다. 사회를 명(明)과 암(暗)으로 나누는 세계관에 갇힌 채, 산업화 세대가 물려준 유산의 수혜자라는 점도 부정하고, 한편으론 자신의 기득권은 악착같이 지키려 한다”며 “자신들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청년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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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둘 둔 어른? 아이돌에 빠진 청춘!
━ 영포티 둘러싼 세대 논쟁 “제가 좋아하는 아이돌의 팬으로 활동하는 게 뭐가 문제라는 건가요?” 서울 동작구에 사는 43세 미혼 직장인 이선영씨는 요즘 아이돌 그룹 노래에 푹 빠져 지낸다. 그의 주말 계획도 자전거 타고 한강 달리기, 좋아하는 아이돌 유튜브 동영상 찾아보기, 저녁엔 이태원 등 힙하다는 식당 찾아다니며 친구와 와인 한잔하기로 채워져 있다. 최근 핫이슈 중 하나인 ‘영포티’ 논란에 대해서도 그는 당당했다. “이 나이에 좋아하는 걸 마음껏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죠. 몸도 마음도 저는 여전히 청춘입니다.” 이씨의 삶은 20년 전 40대였던 김정희(65)씨의 중년과는 사뭇 대비된다. 김씨는 2000년대 초반 두 아이 양육과 시부모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다. 밀린 집안일을 마치면 저녁 10시가 돼서야 겨우 숨을 돌리곤 했다. “그땐 ‘내 인생’이란 말 자체가 사치였어요. 젊음을 만끽한다는 건 꿈도 못 꿨고요. 나이 마흔이면 이미 어른 중의 어른이란 게 당시 사회 통념이었죠.” 관련기사 “나더러 영포티 같다네 ㅎㅎ” “그거 칭찬 아니라던데 ㅋㅋ” AI와 SNS로 무장한 2030…위계적 직장문화·꼰대상사 비꼬며 밈 놀이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 맞벌이 가구 비율은 40% 안팎에 그쳤다. 평균 출산 연령도 28세로 40대 대부분은 자녀가 중·고등학생이었다. 반면 지금은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60%에 근접했고 40대 미혼자 비율도 6배가량 급증했다. 그러면서 40대를 규정하는 정체성도 ‘가정’을 돌보는 부모에서 ‘나’를 맘껏 향유하는 개인으로 바뀌어갔다. 40대의 자기 인식 또한 ‘아이 둘’ 키우는 ‘어른’에서 ‘아이돌’ 좋아하는 ‘청년’으로 변화하면서 “중년이란 개념을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금의 40대는 결혼 유무나 나이와 상관없이 각자의 인생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간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도 이젠 ‘영포티’ 세대 갈등을 넘어 ‘중년의 재정의’를 고민할 시점이 됐다”고 진단했다. ━ “40대는 청춘 연장선…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삶은 내가 개척하며 살아가야죠.” 2025년 11월. 이선영씨는 오전 9시 출근해 오후 6시 퇴근한 뒤 자기 계발 강의를 듣고 있다. 귀갓길엔 감성 편집숍에 들러 새로 나온 향수를 맡아보기도 한다. 이씨는 “회사 일이나 연애 말고도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다”며 “30대 때는 40대가 되면 ‘나만의 인생’이란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지금도 ‘청춘의 연장선’이란 느낌”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새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과 맞벌이 가구 비중은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창업·이직 등 ‘인생 2막’에 도전하는 40대도 크게 늘었다. 김석호 교수는 “지금의 40대는 라이프 스타일이 획일적이지 않으면서 SNS 등을 통해 다른 세대의 삶도 훨씬 쉽게 공유하는 세대”라며 “최근의 ‘영포티’ 논란도 ‘중년답게’라는 기존 한국 사회의 고정관념과 40대의 실제 삶의 형태가 일치하지 않는 괴리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 말대로 2000년대 초반 40대 기대수명은 78세, 건강수명은 66세 수준이었다. 그런데 2023년엔 83.5세와 72.5세로 크게 늘었다. 박현아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의료 기술과 정보 접근성 향상 덕분에 ‘늙어서도 오래오래 사는 시대’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확산됐다”며 “지금의 40대도 건강 관리에 보다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면서 예전보다 심신이 훨씬 젊은 상태로 40대를 보내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건강함의 연장은 곧 시간의 확장을 의미한다. 40대는 더 이상 ‘노년을 준비하는 나이’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나이’로 바뀌었다. 서울 서초구에서 14년째 스포츠센터를 운영하는 김선영(59)씨는 “요즘 헬스장과 요가 스튜디오, 사이클링 클래스 수강생의 절반이 40대”라며 “내가 40대 때만 해도 여가 활동은커녕 주말에도 밀린 집안일 하느라 쉴 틈이 없었는데 지금의 40대는 그 어느 세대보다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퇴근 후 취미생활을 즐기는 40대가 늘면서 경제적 소비 패턴도 크게 달라졌다. 2000년대의 40대는 ‘빚의 세대’였다. 외환위기 이후 실직·부채의 충격이 가장 크게 몰아닥친 연령층이기도 했다. 반면 지금의 40대는 ‘지출의 주체’로 떠올랐다. 롯데·신세계 등 유통 대기업들에 따르면 최근 3년간 40대의 온라인 패션 상품 구매 증가율은 20대를 능가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트렌드는 20대가 이끌지만 정작 실제 소비는 40대가 주도하는 양상”이라며 “40대는 충분한 구매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업계에서도 특히 신경 쓰는 연령대”라고 업계 분위기를 전했다. 이런 변화는 정책에도 반영되고 있다. 저출생·고령화 현상의 심화로 청년층이 갈수록 줄어들자 지방자치단체들이 청년 상한 연령을 올리고 나선 게 대표적이다. 실제로 강원도와 전라남도는 청년을 45세까지로, 다른 광역자치단체들도 대부분 40세 안팎으로 상한선을 높였다. 40대 중반도 ‘청년’으로 공식 인정받는 시대가 이미 현실로 다가온 셈이다. 조영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한국 사회의 중위연령이 계속 높아지면서 정년 연장 논의도 더욱 활발해질 전망”이라며 “앞으로는 한 조직 안에서 청년·중년·노년 세대가 함께 일하는 구조가 보편화될 것인 만큼 일하는 방식과 문화도 그에 맞게 바꿔나가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전문가들은 ‘중년의 재정의’와 이를 둘러싼 논란을 해소하려면 나이에 따른 ‘역할 규범’을 강요하기보다는 각자의 생애 단계와 선택을 인정하는 사회적 관용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 김 교수는 “지금의 40대는 디지털과 게임 문화를 접한 첫 세대로, 젊게 살려는 40대의 욕구는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의 산물”이라며 “이런 다양성을 너그러이 수용하는 게 세대 갈등의 해법이 될 수 있으며, 이를 진영 대립이나 도덕적 잣대로 접근하면 본질을 놓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제도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조 교수는 “이젠 나이가 아니라 ‘역량’에 따라 일하고 평가받는 조직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며 “정부도 정년·연령 규범을 재설계해 20대와 40대가 공존하며 함께 성장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할 때”라고 주문했다.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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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SNS로 무장한 2030…위계적 직장문화·꼰대상사 비꼬며 밈 놀이
━ 영포티 둘러싼 세대 논쟁 “영포티 조롱이 확산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인공지능(AI)의 발달로 크게 달라진 업무 방식을 기존의 조직 문화가 따라잡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문화평론가·사진)는 최근 AI와 SNS의 대중적 확산으로 MZ세대가 문화의 전면에 서는 구조가 강화되면서 40대가 ‘기득권의 얼굴과 젊은 감성’을 동시에 지닌 세대로 비판의 표적이 됐다고 진단했다. AI로 개인 역량이 과거보다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기존의 위계적 업무 관행에 대한 청년 세대의 불만이 커졌고, 그 균열이 ‘영포티’ ‘젊은 꼰대’ 류의 밈 확산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에서 2030세대가 문화를 이끄는 경향이 유독 강한 이유는. “외국은 중장년층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문화를 주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데 비해 한국은 SNS의 비교·경쟁 문화가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남과 다른 소비’를 보여주려는 욕망이 뚜렷하고, 그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이 온라인 공간을 통해 일상적으로 표출된다. 한때 유행했던 오마카세, 명품 뽐내기, 카푸어 등의 키워드도 같은 맥락이다. 그 결과 온라인 매체를 보다 수월하게 이용하는 2030세대가 트렌드를 선도하고 중장년층은 그 흐름을 따라가는 구조가 굳어졌다.” 영포티에 대한 조롱이 점점 확산된다. “처음에는 20대 여성에게 찝쩍대는 40대를 풍자했던 밈이었지만 이렇게까지 확산된 데는 회사 조직 내부의 권위적인 구조에 대한 반감도 한 축을 담당했다고 본다. 최근 SNL의 ‘직장인들’ 코너가 2030세대의 큰 공감을 얻는 것도 같은 이유다. 2030이 막상 입사하면 직속 상사 대부분이 40대인데, 겉은 개방적이지만 실제 의사 결정은 위계적으로 이뤄지는 현실에 부딪히게 된다. AI 시대에 자신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사의 능력에 대한 의심도 커진다. 이런 불일치가 불편함으로 이어지고 밈과 풍자라는 디지털 언어로 끊임없이 재가공돼 확산되는 것이다.” 관련기사 아이 둘 둔 어른? 아이돌에 빠진 청춘! “나더러 영포티 같다네 ㅎㅎ” “그거 칭찬 아니라던데 ㅋㅋ” AI가 세대 갈등에 미친 영향은. “AI와 디지털 도구가 개개인의 작업 반경을 폭발적으로 키웠다. 특히 단순 서류 작업이나 자료 취합 업무가 그렇다. 과거엔 전형적인 팀플레이 구조 속에서 하향식으로 배분됐지만 이제 그런 업무는 AI가 너끈히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 세대는 ‘왜 이런 일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나’ ‘업무 방식이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되고, 반대로 기존의 업무 관행에 익숙한 40대는 20대의 이런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괴리가 영포티 논란의 구조적 배경이다. 결국 영포티는 AI 기술 발달로 해체 위기에 처한 권위적·위계적 구조 속에서 길을 잃은 세대가 된 셈이다.” 영포티는 주로 남성으로 표상되고 있다. “구조적인 이유다. 한국에선 여성이 40대까지 조직에 남아 리더가 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성공한 40대 여성이 사회적으로 드러날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부장님’ 하면 자연스레 남성이 떠오르는 거다. 이는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오랫동안 존재했던 성별 격차가 만든 문화적 결과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세대 갈등은 언제나 있었지만 한국은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 그 충돌이 더욱 도드라지는 상황이다. 그래서 더더욱 급격한 변화보다는 단계적 전환, 즉 연착륙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만 이런 현상을 이해하고 해소하는 책임은 기본적으로 어른, 즉 영포티 세대에 있다고 본다. AI로 바뀐 생산 방식을 받아들이고 연공서열이 아닌 역량 중심으로 조직 문화를 재설정하며 젊은 세대의 신뢰를 회복해 나가야 할 때다.”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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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더러 영포티 같다네 ㅎㅎ” “그거 칭찬 아니라던데 ㅋㅋ”
━ 영포티 둘러싼 세대 논쟁 챗GPT 프로를 활용해 생성한 영포티 이미지. 지난 3일 오전 8시30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 검은색 맨투맨에 회색 조거팬츠, 뉴발란스 운동화를 신은 42세 회사원 김현수씨가 노트북을 켰다. 커피잔 옆엔 요즘 핫하다는 스탠리 텀블러가 놓여 있었다. “오늘은 일주일에 한 번 재택근무를 하는 날인데, 그냥 깔끔하게 입고 싶었어요. 그런데 요즘 이런 차림을 하면 ‘젊은 척하는 아재’라고 하더라고요.” 김씨는 일을 마치고 귀가한 뒤엔 와인 구독 서비스로 배달된 와인을 한 잔 따를 생각이라고 했다. “20대가 하면 감성소비라는데 40대가 하면 감성팔이래요. 꼰대 되기 싫어서 트렌드 좀 따라가는 것뿐인데….” 김씨는 씁쓸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권위적 환경서 자라 은연중에 ‘꼰대 기질’ 40대 래퍼 염따가 전형적인 ‘영포티’ 복장을 챙겨 입고 찍은 사진. [사진 염따 인스타그램] ‘영포티(Young+Forty)’는 원래 유통업계에서 젊은 감성과 문화를 기꺼이 소비하는 40대를 지칭하던 단어였다. 하지만 온라인에선 어느새 비아냥의 기표가 됐다. 특히 2020년대 초반 SNS에서 널리 퍼진 ‘스윗 영포티’라는 용어가 기폭제가 됐다. 표면상으론 ‘세련된 40대 남성’을 뜻했지만 실제론 20대 여성에게만 스윗한 태도, 20대 남직원에겐 엄격하면서 20대 여직원에게만 과잉 친절을 보이는 ‘치근덕거림’을 꼬집는 풍자였다. 관련기사 아이 둘 둔 어른? 아이돌에 빠진 청춘! AI와 SNS로 무장한 2030…위계적 직장문화·꼰대상사 비꼬며 밈 놀이 직장인 이지은(28·서울 송파구)씨는 “회의 때 20대 남직원에겐 칼같이 굴면서도 여직원에겐 사람 좋은 모습으로 웃으며 다가가 커피를 사주는 40대 상사들의 진짜 문제는 ‘젊은 척’이 아니라 ‘합리적인 척’”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겉으론 개방적이라면서 얘기하다 보면 속은 전형적인 기성세대 그 자체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결혼·육아 등에 대해서도 그저 공감하는 척만 할 뿐”이라고 꼬집었다. 31세 직장인 박민수씨도 같은 생각이었다. 박씨는 “정치 이슈에도 열려 있는 척하지만 실은 정답이 정해져 있다”며 “부동산 등에서 청년들의 사다리가 부러졌다는 얘길 해도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곧바로 자기 말만 하는 게 지금의 40대”라고 비판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영포티 논란을 두 층위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정치와 분리해도 읽히는 측면이 있고, 정치가 개입되면 더 복잡해지는 게 지금의 영포티 논란”이라면서다. 구 교수는 전자에 대해 “직장 내 40대가 젊은 세대를 이해하는 척하지만 실제 대화에선 공감력이 떨어져 ‘위선’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불만과 풍자가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치적 층위에 대해서는 “온라인 양극화가 세대·젠더·지역 갈등을 정치 이념과 결부시키며 문화·조직 차원의 문제를 정치적 프레임으로 환원하면서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다시 지난 4일 점심시간. 오랜만에 출근한 김씨가 후배들과 ‘힙한’ 샐러드 카페로 향했다. 커피를 마시며 “요즘은 갓생 살아야지” 같은 말을 조심스레 꺼냈지만 서로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는 후배들의 반응은 영 좋지 않다. 김씨는 “젊은이들이 자주 쓰는 말을 하면 ‘오글거린다’며 비꼬고, 우리 세대의 말을 꺼내면 ‘꼰대’라고 한다”며 “말 한마디 할 때마다 모든 문항이 오답인 객관식 시험을 푸는 기분”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이와 관련,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메타인지(자기 인식)’ 결핍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봤다. 곽 교수는 “나이나 직급이 높아질수록 사고의 틀이 굳는데도 스스로는 편견이 없다고 믿는 자기 인식의 착시가 적잖다”며 “멋지고 개방적인 이상적 자기(ideal self)와 현실의 자기(real self) 사이의 불일치가 클수록 불안·우울감이 커지고 그 틈을 대중적 풍자가 파고드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매 상황에서 제3자 시점으로 자신을 객관화하고, 20대를 마냥 따라가기보다 50~60대 롤모델을 찾아 경청과 배려 중심의 어른다움을 익힐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정치 커뮤니티에도 “영포티는 꼰대 진보의 마지막” “개혁을 말하지만 젠더나 기후 의제엔 보수적”이란 비난 글이 끊이질 않는다. 20대 나정연씨는 “모든 40대가 그렇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입으론 진보를 외치면서도 실제론 그 누구보다 보수적인 40대를 주위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며 “속 시원하게 ‘나는 꼰대야’라고 하면 차라리 덜 답답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장에서 40대는 가장 강력한 구매층이다. 패션과 F&B 분야도 구매를 선도하는 건 여전히 40대다. 그럼에도 ‘가성비 모르는 허세’라는 비판이 늘 따라붙는다. 이에 대해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40대 대부분은 ‘젊은 척’한다기보다 지금 시대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며 “지금은 세대가 아니라 취향으로 묶이는 시대로 바뀐 만큼 영포티를 세대 틀에 가두면 현실을 왜곡해서 바라보기 쉽다”고 경계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오르는 집값과 연금 개혁 등에서 느끼는 젊은 층의 박탈감이 상당하다”며 “돈과 권력을 모두 거머쥔 4050이 문화까지 가져가려 한다는 피해의식도 청년 세대의 반감을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결국 20대는 “이미 기득권층인 40대가 젊은층 고유의 문화까지 침범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40대는 “나이에 맞게 살라”는 20대의 규범 강요에 동의하지 못하면서 ‘영포티’ 논란은 시간이 갈수록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셈이다. 임 교수는 “4050세대는 민주화 성취의 자부심과 권위적 환경에서 자라온 흔적이 공존하다 보니 겉과 속의 불일치가 나타나기 쉽다”며 “2030은 선배 세대가 일군 기반을 인정하며 과도한 조롱을 자제하고, 4050은 과시를 줄이는 동시에 주거·고용 등 2030의 어려움에 미안함과 배려로 응답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영포티가 스스로를 ‘다리 세대’로 여기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40대 김진우씨는 “윗세대 언어도 알고 MZ세대 문화도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자부한다”며 “회사에서도 나름 중간 소통자 역할을 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40대가 회의에서 혼자만 길게 얘기하면서도 ‘나는 열려 있다’는 전제를 깔아버리는 순간 대화와 소통의 문은 닫히기 십상이다. 구 교수도 “젊은 세대가 원하는 ‘어른다움’은 화려한 어휘가 아니라 일관된 배려와 실질적 지원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짚었다. 영포티 논란에서도 드러나듯이 정치·경제·사회·문화 어느 분야에서든 지금의 40대는 ‘이중 프레임’ 속에 서 있다. 젊은 감성을 이해하려고 하면 ‘영꼰(어린 꼰대)’,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꼰대’로 취급받기 일쑤다. 진보면 ‘위선’, 보수면 ‘낡음’이란 선입견 또한 여전하다. 그 사이에서 김현수씨 같은 평범한 40대는 오늘도 끊임없는 자기 검열로 하루를 보낸다. “시대 흐름에 맞게 살아가려는 게 그렇게 엄청나게 잘못된 건가요. 치열한 생존 경쟁 사회에서 힘을 모아도 부족할 판에 20대와 40대가 꼭 이렇게 반목해야 하나요. 비아냥은 이제 그만. 서로가 조금만 더 너그러워졌으면 좋겠어요.” “20대 따라하기보다 경청하고 배려하길” 전문가들은 세대 갈등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라지만 최근의 갈등 양상이 이대로 방치하기엔 위험한 수준까지 다다른 만큼 사회 전체 차원에서 시급히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무엇보다 세대 전체를 일반화하는 오류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조언도 곁들여진다. 정 평론가는 “원래도 세대 구분은 정치나 마케팅의 편의적 구획에 기대온 측면이 크다”며 “지금은 세대보다는 취향과 가치 등 각자의 정체성에 따라 묶이는 시대인 만큼 해법도 세대 교육 강화가 아니라 취향 기반의 교류 기회 확대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요즘 어때?” 등 의례적인 대화보다 콘텐트와 경험을 함께 소비·교류하는 방식이 훨씬 실효성이 클 것이란 얘기다. 곽 교수는 “20대를 이기려 들기보다 ‘젊어본’ 경험이 있는 40대가 포용하며 톤을 낮추는 리더십이 중요하다”며 “매 순간 스스로 ‘내가 누군가의 말을 끊진 않았는지’ ‘혼자만 얘기하고 있진 않았는지’ 등 체크 리스트를 점검하는 것도 ‘영포티’ 논란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원동욱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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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수요 늘며 범용 D램 가격도 급등…“10년에 한 번 오는 수퍼사이클”
━ 반도체 착시에 갇힌 한국 경제 반도체가 본격적인 ‘질주 모드’에 들어섰다.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 투자가 폭발적으로 늘며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뚜렷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업계에서는 “10년에 한 번 오는 수퍼사이클(Super Cycle)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SK하이닉스는 3분기 매출 24조4489억원으로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처음으로 11조원을 넘으며 ‘10조 클럽’에 진입했다. D램·낸드 가격 상승과 AI 서버용 고성능 제품 출하 급증 덕분이다. 삼성전자도 매출 86조원, 영업이익 12조1661억원으로 시장 예상치를 크게 웃돌았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달 27일(현지시간) 기준 범용 D램인 ‘DDR4 1G×8 3200MT/s’의 현물 평균가격은 8.616달러로, 연초 대비 20% 이상 올랐다. 4분기 고정거래가격 상승률 전망도 기존 5%에서 최대 17%로 상향됐다. 관련기사 수출·증시·성장률만 보면 ‘회복세’ 맞는데…반도체만 훨훨, 체감경기는 싸늘 돈 빼가는 미국, 점유율 빼가는 중국…포항·군산 등 제조업 심장 ‘허혈증세’ 반도체 리서치·분석기관인 테크인사이트는 “시장에 막대한 자금이 유입되며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며 “D램 평균 재고 기간이 3분기 8주로, 지난해 10주·2023년 초 31주에서 크게 줄었다”고 밝혔다. 특히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주요 3사의 D램 평균 재고는 약 3.3주로 2018년 이후 최저 수준이다. JP모건은 “이번 사이클은 재고 조정이 아닌 AI 수요 기반의 장기 성장 국면”이라며 “수퍼사이클이 2027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메모리 산업은 통상 2~3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해왔지만, 이번에는 초장기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시각도 짙다. HBM(고대역폭 메모리) 중심의 AI 투자가 범용 D램 시장까지 불을 지피며, 메모리 산업 전체가 고성능·고수익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D램뿐 아니라 낸드 시장에서도 공급 조정이 이어지며 장기 상승세가 예상된다. 대만 파이슨일렉트로닉스의 푸아케인승 최고경영자(CEO)는 “낸드 플래시 공급 부족 등이 최대 10년간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업계 일각에서는 “10년에 한 번 오는 수퍼사이클”이라는 표현은 과장됐다는 신중론도 있다. 비트밀도(단위 면적당 저장 용량) 증가 둔화, 공정 전환 리스크, DDR4 생산라인 축소로 인한 수요 한계가 주요 변수로 꼽힌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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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빼가는 미국, 점유율 빼가는 중국…포항·군산 등 제조업 심장 ‘허혈증세’
━ 반도체 착시에 갇힌 한국 경제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에 따르면 광주광역시 평동산단로62번길 11 일대 공장이 공매 절차를 밟고 있다. 이곳은 삼성전자의 가전 부문 협력사인 성일이노텍의 광주 공장이었다. 성일이노텍은 삼성전자·대유위니아 등에 가전제품 부품을 납품하던 제조업체로, 2015년 ‘1000만불 수출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매출 감소 등으로 지난해 10월부터 생산라인 일부를 멈추는 등 어려움을 겪다 최근 폐업했다. 중국이 스마트폰용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시장에서 5개월 연속 한국을 추월했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 조사에 따르면 8월 기준 스마트폰용 OLED 패널 월간 출하량은 중국 3930만 대, 한국 3850만 대다. 이로써 중국은 4월부터 5개월 연속 한국을 앞서게 됐다. 그간 국내 기업이 지켜온 ‘OLED 강국’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의 기술 확산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 대형 OLED 시장에서도 한국의 주도권이 흔들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반도체·조선 등 일부 업종을 제외하면 한국 경제의 주축인 제조업은 악화일로다. 중국의 제조업 굴기, 미국의 관세 정책, 원자재 가격 상승, 고금리 장기화, 노란봉투법·상법 개정안 등 안팎으로 악재가 쏟아지면서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제조기업 2275곳을 대상으로 올해 경영 실적 전망을 조사한 결과, 75%가 연초 설정한 목표에 미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코로나19 때는 2020년 74%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실적이 목표에 부합할 것으로 응답한 기업은 20.4%였고, 초과 달성할 것으로 답한 기업은 4.6%에 불과했다. 지난해 흑자였던 기업이 올해 적자로 전환될 것으로 본 비중은 7.1%로,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선다는 기업(3.1%)의 두 배를 넘었다. 유동성 위기를 견디지 못한 업체의 공장은 법원경매시장으로 직행하고 있다. 중앙SUNDAY가 법원경매 정보업체인 지지옥션에 의뢰해 공장 등 제조업 시설 경매 물건을 조사한 결과 올해 3분기에만 1135건이 새로 경매에 나왔다. 관련기사 수출·증시·성장률만 보면 ‘회복세’ 맞는데…반도체만 훨훨, 체감경기는 싸늘 AI 수요 늘며 범용 D램 가격도 급등…“10년에 한 번 오는 수퍼사이클” 지난해 3분기 829건보다 37%가량 급증한 수치다. 특히 지난해 4분기 971건 이후 3분기까지 4개 분기 연속 900건 이상이 경매 시장에 새로 나오고 있다. 반면 응찰자 수는 계속 줄고 있다. 지난해 3분기 2.39명이던 응찰자는 올해 3분기 2.3명으로 줄었다. 경매 물건이 실제 팔리는 매각률도 지난해 3분기 30.9%에서 올해 3분기 28.4%로 쪼그라들었다. 대한상의 측은 “내수 침체와 건설 경기 둔화 등 복합 악조건이 겹친 결과”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이 같은 제조업의 위기가 단순히 기업의 위기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제조업이 지역경제의 핵심산업인 만큼 지역의 소멸 위기와도 무관치 않다. 윤재호 한라대 경영학과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2018년 한국GM 군산공장 폐쇄 1년 뒤 군산시의 지역경제 생산액은 1조4944억원 감소했다. 지역 내 부가가치는 3961억원 감소했고, 3690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지난달 28일 포항·광양·당진시 등 세 개 도시가 정부에 철강산업 위기 극복을 위한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국내 철강산업은 내수 부진과 함께 산업용 전기요금 상승, 중국·일본산 저가 철강재 유입, 미국의 50% 관세 부과로 전례 없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포스코 1제강공장과 현대제철 포항2공장 등 일부 공장은 폐쇄했고, 영업이익도 큰 폭으로 감소했다. 정부는 8월 포항시를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한 데 이어 광양시도 산업위기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선제대응지역으로 지정되면 2년간 중소기업 긴급 경영안정자금 융자 우대, 지방투자촉진보조금 국비 보조율 상향, 보통교부세 가산 등 재정·행정적 지원이 집중된다. 나주영 포항상공회의소 회장은 “철강산업은 단순한 제조업이 아니라 국가 기간산업이자 지역경제 버팀목”이라며 “산업 경쟁력 유지를 위한 현실적인 보완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제조업·지역 위기는 더 가속할 전망이다. 미국의 관세 정책으로 ‘공동화(空洞化)’ 우려 마저 나오고 있다. 한국 정부와 기업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임기 내에 미국에 3500억 달러(약 500조원)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이는 연간 국내 제조업 설비투자 금액(약 150조원)의 3.3배에 달한다. 3년여 간 국내 제조업에 투자할 자금이 미국으로 빠져나가는 셈이다. 국내 제조업 기반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배경이다. 외국인의 국내 투자를 유치하거나 해외로 이전한 공장이 돌아오면(리쇼어링) 되지만, 모두 실적은 저조하다.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외국인의 국내 직접투자 신고액은 올 상반기 130억90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 153억3000만 달러보다 15%가량 감소했다. 2023년 상반기와 비교하면 23% 줄었다. 한국으로 공장을 이전하는 리쇼어링 기업 역시 해마다 감소세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리쇼어링 업체는 20여 곳에 불과하다. 한은은 과감한 구조 개혁을 주문한다. 한은은 8월 보고서에서 “과거 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기업, 정부 그리고 가계가 위기의식을 가지고 노후화된 경제구조를 혁신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1%대로 추락한 잠재성장률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상반기 한국의 2025~2030년 평균 잠재성장률을 1.5%로 추정했다. 한국 경제의 기초 체력을 끌어 올리기 위해선 무엇보다 생산연령인구 확보가 중요하다. 한국의 생산연령인구는 2019년을 기점으로 빠르게 감소하고 있지만, 고령 인구는 급증하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노동시장은 물론 글로벌 스탠다드와 맞지 않은 여러 규제를 걷어내는 과감한 경제 개혁을 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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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증시·성장률만 보면 ‘회복세’ 맞는데…반도체만 훨훨, 체감경기는 싸늘
━ 반도체 착시에 갇힌 한국 경제 그래픽=남미가 기자 “장사요? 그냥 그래요. 정부가 소비 쿠폰 나눠줬을 때 잠깐 느는 것 같더니 제자리로 돌아왔어요. 경기가 이러니 여기도 빈 상가나 사무실이 채워지지 않고 있어요.” 직장인이 많은 서울 강남구 역삼동 먹자골목의 한 사장이 하는 하소연이다. 계속되는 불황 여파 속에 겨우 버티고 있다고 했다. 고금리·고물가에 이어 소비 위축까지 겹치면서, 매출은 줄고 대출 이자 부담은 커져 버틸 힘이 고갈된 자영업자가 속출하고 있다. 한국은 미국과의 관세 협상 난항 속에서도 9월 역대 최고 수출을 기록했다. 코스피는 최근 사상 처음으로 4000선을 돌파한 뒤, 이제는 5000선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3분기에는 깜짝 성장세를 보이기도 했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28일 발표한 3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분기 대비 1.2%(속보치)로, 시장 예상치(1.1%)를 웃돌았다. 이 덕에 올해 한국 경제가 0%대 저성장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그런데 기업이나 국민이 느끼는 체감 경기는 다르다. 한은이 지난달 29일 발표한 10월 전(全)산업 기업심리지수(CBSI)는 90.6으로 전월보다 1포인트 하락했다. CBSI는 경제 전반에 대한 기업의 인식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지수로, 수출 호조에도 기업은 경기가 나아졌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 11월에도 나아질 것 같지 않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11월 기업경기실사지수(BSI) 전망치는 기준선인 100을 밑도는 94.8을 기록했다. 관련기사 AI 수요 늘며 범용 D램 가격도 급등…“10년에 한 번 오는 수퍼사이클” 돈 빼가는 미국, 점유율 빼가는 중국…포항·군산 등 제조업 심장 ‘허혈증세’ 관세 등 대내외 불확실성이 사라지지 않고 있고, 내수 경기가 위축된 영향이다. 서민들의 삶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강민국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불황형 대출’로 불리는 신용카드 대출(현금서비스·카드론)은 8월 말 기준 44조7850억원에 이른다. 특히 이 가운데 1개월 이상 연체된 금액은 1조4830억원으로 2023년 9830억원, 2024년 1조940원보다 급증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수출 증가와 정부 지출로 올해 0%대 성장은 면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한국경제의 구조적 회복세로 보기는 힘들다”고 진단했다. 경제 지표와 체감 경기의 괴리는 ‘반도체 착시’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인공지능(AI) 투자 열풍으로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면서 반도체 수출이 증가하고 반도체에 증시 자금이 몰리면서 표면적으로는 한국 경제가 ‘호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수출만 해도 반도체를 걷어 내면 상황이 썩 좋지 않다. 올해 들어 8월까지 한국의 누적 수출액은 4538억27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 4499억1700만 달러를 뛰어넘었지만, 반도체를 제외하면 3495억3300만 달러로 지난해 9월보다 2.8% 감소했다. 석화 구조조정, 2차전지·조선 지원책 시급 그래픽=남미가 기자 화공품(-8.0%)·자동차부품(-5.6%)·기계(-5.0%)·철강(-3.8%) 등 제조업 대부분이 역성장했다. 월별 수출액 역시 7월과 8월 각각 5.8%, 1.2%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지만, 반도체를 제외하면 7월 -0.3%, 8월 -5.5%로 부진이 심화하고 있다. 수출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 확대했다. 8월까지 반도체 수출액은 1042억94만 달러로 전체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3%에 이른다. 2023년까지만 해도 전체 수출액의 15.9%였던 반도체 비중은 지난해 21%로 올라선 데 이어 올해 더 확대된 것이다. 증시도 상황이 비슷하다. 한국거래소 집계 결과 코스피가 3000선 재돌파한 6월 20일부터 지난달 24일까지 코스피는 30%가량 급등했지만, 같은 기간 내린 종목은 1537개로 오른 종목 1104개보다 400개 이상 많았다. 이 기간 하락 종목이 상승 종목보다 많았던 날은 52일로, 상승일보다 오히려 잦았다. 즉, 지수는 치솟았지만 상당수 종목은 제자리걸음을 했거나 뒷걸음을 했다는 의미다. 특히 대형주 중심으로 구성된 ‘코스피200’에서도 소수 종목 쏠림이 뚜렷했다. 6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코스피200은 64.7% 올랐지만, 이 상승률을 웃돈 종목은 200개 중 41개(20.5%)에 불과했다. 나머지 160여 종목은 평균에도 못 미쳤다. 일부 반도체와 AI 초대형주가 지수를 끌어올린 결과다. 지난달 29일 기준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은 594조9236억원으로 코스피 전체의 15.51%에 이른다. SK하이닉스 시가총액은 406조2253억원(10.59%)으로 삼성전자의 뒤를 이었다. 두 종목의 시가총액 비중은 코스피 전체의 26.10%로 8월 29일 20.01%보다 6.09%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여기에 삼성전자 우선주(65조1963억원·1.70%)를 더하면 비중은 27.80%까지 오른다. 서상영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지수를 이끌고 있지만 중소형주는 여전히 부진하다”며 “미국의 경기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K자형 경제가 나타나고 있고, 한국 증시도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반도체가 경기에 따른 부침이 심한 업종이라는 점이다. 특히 한국 기업이 주력으로 삼은 메모리 분야가 대표적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2년 전인 2023년만 해도 가격이 급락한 D램 등 메모리 반도체 재고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삼성전자는 2023년에만 반도체 부문에서 수조원대 적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시장에서는 반도체 업황이 수요가 급증하는 ‘수퍼사이클’에 진입했다는 분석이 나오지만, 마냥 낙관하기는 어렵다. 조원경 UNIST 교수(글로벌 산학협력센터장)는 “최근 미국에서는 AI 투자와 주가에 거품이 끼었다는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며 “AI가 기술적 한계에 부딪히거나, 수익성 논란으로 투자가 줄면 반도체 수요도 급감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체 수출액에서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한은은 지난달 23일 ‘최근 수출 및 경상수지 상황에 대한 평가와 전망’ 보고서를 통해 “반도체 수출이 그간 미국 관세 충격의 부정적 영향을 완충해 왔다”면서도 “그 과정에서 의존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향후 반도체 경기가 하강 국면으로 전환하면 경제 전체에 미치는 파장이 예전보다 클 수 있다”고 밝혔다. 반도체가 무너지면 한국경제가 휘청일 수 있다는 경고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쏠림 속도를 늦추려면 결국 경제 체질 개선에 집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정책 초점을 단기 부양책이 아니라 연구·개발(R&D), 인적자원, 신산업 전환 등 생산성 기반의 경기 부양책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불황형 대출’ 카드빚 연체 1.4조원대 급증 그래픽=남미가 기자 이와 함께 석유화학 구조조정 서두르고, 2차전지·조선 등에 대한 지원도 강화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중국의 저가 공세에 휘청이고 있는 석유화학은 연말까지 기업 간 자구계획안을 제출해야 하지만, 논의는 답보 상태다. 기업 간 주요 시설을 사고팔고 해야 하는 만큼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석유화학업계 한 관계자는 “업계 자율로 맡겨 둬서는 골든타임을 놓칠 가능성이 크다”며 “정부가 각사의 안을 받아 조율과 중재에 나서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한국 경제의 새로운 먹거리인 2차전지에 대한 지원 강화도 필요하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1~8월 국내 완성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의 세계 시장 점유율 37.8%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7.1%포인트나 하락했다. 한국이 잃은 시장은 대부분 중국 기업이 차지했다. 중국은 배터리 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해 정부가 대규모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한국은 세액공제 등 간접지원 정도에 그치고 있다. 김세호 LG경영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배터리 산업의 경쟁은 기업 경쟁에서 국가 시스템 경쟁으로 변모하고 있다”며 “한국 배터리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동등한 조건으로 경쟁하기 위해서는 파격적인 정책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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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SNS 결합, 상상 넘는 파급력…해적기 밈 퍼뜨리며 연대감 과시
“대륙을 뛰어넘는 Z세대 시위의 확산은 젊은 층과 SNS와의 결합이 상상 이상의 전염성과 파급력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숙종 성균관대 특임교수(전 동아시아연구원장·사진)는 22일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Z세대 시위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다. 실제 마다가스카르에서 Z세대 시위에 참가한 한 젊은이는 “네팔 시위로 정권이 붕괴되는 것을 보면서 시위 전략을 배울 수 있었다”고 자신의 디스코드에 적었다. 이 교수는 “다만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Z세대라는 특정 세대에 의존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14년 전 ‘아랍의 봄’처럼 실패하지 않으려면 민주적인 제도화를 통해 부패 정권에서 벗어나는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시아 민주주의 전문가인 이 교수를 만나 최근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젠지(Z세대) 혁명’에 대한 평가와 전망 등을 들었다. 제2의 ‘아랍의 봄’이 오는 것인가. “‘아랍의 봄’과 젠지 혁명 모두 과거 시민 혁명이 내건 계몽과 이성이 아닌 분노라는 ‘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 SNS를 매개로 시위가 전개되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는 인구 구조 변화로 국민 다수가 된 Z세대가 주축이 됐다는 점이다. 그래서 Z세대 특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틱톡과 디스코드 같은 앱에서 소통을 하고 디지털 네이티브인 만큼 SNS에서 실시간으로 반응하면서 젠지 혁명에 불을 붙였다. 그 점화력과 파급력은 한 달 새 3대륙의 10개국을 뒤흔들었다. 군부가 독재 정권에 등을 돌린 것도 특징인데, 정권 붕괴를 이끈 결정적 요인이 됐다.” 관련기사 해적 깃발 아래 모였다, 불공정에 뿔난 Z세대 젠지 혁명으로 정권이 붕괴된 네팔과 마다가스카르는 실제 30세 이하가 인구 절반을 차지한다. Z세대가 시위를 주도한 동티모르,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도 마찬가지다. 이곳의 대다수 젊은이들은 빈곤층이다. 게다가 네팔(20.8%), 인도네시아(16%)의 청년실업률은 세계 평균(13.5%)보다 높다. 이런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시위로 분출된 것이다. 이 교수는 “분노를 표출하지만, 이념을 외치는 식의 진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며 “젠지 혁명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인데 ‘분노+밈 문화’를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놀이문화에 가까웠단 말인가. “시위에서 부상당한 청년이 침상에 누워 만화 포켓몬 담요를 덮고선 ‘이젠 일하러 가야죠’라며 웃으며 말하더라. Z세대는 분노를 표출할 공동행동(퍼포먼스)으로 공유할 그들만의 문화요소를 찾았다. SNS에서 해시태그(#)를 달아 정치 참여를 유도하고, 자유의 상징인 만화 원피스의 해적기 같은 밈을 퍼뜨렸다. 체포되는 시위자들이 자유를 뜻하는 ‘브이’자를 들어 보이는 영상은 챌린지처럼 돌고 있다. 이같은 퍼포먼스는 같은 처지의 다른 지역 Z세대에게 ‘우린 하나’란 동질감을 줬고, 그것이 젠지 혁명의 동력이 됐다.” SNS가 Z세대의 ‘무기’가 됐다는데. “정치적 압박을 가하기에 충분했다. SNS는 국가가 통제하기 어려운 분산형 시위를 가능케 했다. 가령 SNS에 일시만 알려주고 지역별로 시위 장소 리스트만 공유하는 식이었다. SNS의 특징 중 하나가 개인과 국가 사이 중간 영역인 시민단체와 정당과 같은 사회적 완충지대를 뛰어넘을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뿔뿔이 흩어지고 모이는 개인화가 가능했다. 특정 정당과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치거나 하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정부의 입장에선 협상할 대상을 찾을 수 없었고 통제도 불가능했다.” 젠지 혁명의 반부패 개혁이 성공하려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 어려운 글로벌 사우스 지역의 Z세대가 들고일어난 건 분명 지지해줘야 할 변화다. 그러나 정권 교체가 능사는 아니다. ‘아랍의 봄’도 여기서 멈춰 실패했다. 다음 정권도 똑같이 부패하면 Z세대의 후속 세대가 다시 개혁을 외칠 것이다. 악순환을 끊기 위해선 부패 개혁을 제도화해야 한다. 또 젠지 혁명이 이끈 변화가 지속할 수 있게 하려면 Z세대뿐 아니라 기성세대가 포함된 두터운 시민사회가 형성돼야 한다.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 역시 지속적 관심을 갖고 Z세대가 꾸준히 정치 참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Z세대 주도의 청년 민주주의가 미숙하다는 지적도 있는데. “네팔에서는 정권 붕괴 후 임시 총리를 공식 투표가 아닌 디스코드 앱에서 온라인 투표를 통해 선출됐다. 이렇게 제도화된 정치를 배제하게 되면, 민주주의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SNS에 Z세대 목소리가 갇히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한 이유다. 청년의 정치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 디지털 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건 일본의 청년정당 ‘팀 미라이’처럼 SNS를 정치 참여의 장으로 해서 현실 정치권과 연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청년 민주주의가 지속되는 사례가 있나. “태국에 ‘무브 포워드(전진)’라는 정당이 있었다. 젊은 세대에게 인기를 끌었던 당이다. 지난 2023년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해 제1당이 됐지만, 이후 왕실 모독법 개정을 추진하다가 입헌군주제 체제를 위협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해산됐다. 하지만 이 당의 구성원들은 당명을 바꾸거나 다시 신당 창당을 하면서 청년 정치의 자리를 지켜가고 있다. 끊임없이 정치 지분을 갖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이 청년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첫걸음이라고 본다.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신수민 기자 shin.su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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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깃발 아래 모였다, 불공정에 뿔난 Z세대
━ 지구촌 휩쓰는 Z세대 시위 지구촌 곳곳이 ‘Z세대 시위’ 물결로 뒤덮이고 있다. Z세대가 기득권층의 부패와 경제·사회적 불평등에 맞서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이다. 최근 Z세대의 격렬한 반정부 시위로 아시아의 네팔과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에서 정권 교체가 이뤄진 데 이어, 남미의 페루에선 정국 혼란이 지속되는 가운데 지난 22일 수도 리마에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디나 볼루아르테 전 대통령이 지난 10일 의회에서 탄핵이 된 이후에도 반정부 시위로 인해 극심한 혼란 상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페루에서는 지난달부터 강력 범죄 급증으로 인한 치안 불안과 기득권층의 부정부패, 고용 관련 대책 마련을 요구하는 Z세대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이달 중순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권을 무너뜨린 마다가스카르에서도 Z세대 청년단체들이 “우리는 물과 전기, 가족이 충분히 먹을 식량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 얻지 못했다. 다시 거리로 나설 수 있다”는 경고를 새 정부에 보냈다. 언제 다시 격렬한 시위가 발생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 특권층 명품 사치, 의원 주택수당·특혜에 분노…“우리가 99.9%다” 항거 최근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대륙을 휩쓸고 있는 반정부 시위의 주축 세력은 Z세대다. Z세대는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태어나 인터넷과 스마트폰, SNS 환경에서 성장한 젊은이들을 일컫는다. 이들은 특정한 리더를 두지 않고 SNS를 통해 소통하면서 자신들의 의사 표현을 위한 시위를 위해 모인다. 전문가들은 Z세대의 시위를 2011년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 2010~12년 아랍의 봄, 2014년 홍콩 우산혁명에 이어 보다 진화한 형태라고 분석하고 있다. 또 과거보다 높아진 청년들의 교육 수준도 Z세대 시위의 동력이 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지난달 9일 네팔에서 정권이 붕괴된 후 시위대가 축하하고 있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관련기사 청년·SNS 결합, 상상 넘는 파급력…해적기 밈 퍼뜨리며 연대감 과시 최근 Z세대 시위의 시작은 아시아였다. 특권층 비판에 초점을 맞춘 반정부 시위가 여러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특히 지난 8월 말~9월 초에 발생한 네팔의 Z세대 시위는 정권을 교체시켰다. 네팔 시위는 ‘네포 키즈(nepo kids)’라고 불리는 소수의 특권층 젊은이들이 고급 호텔에서 명품을 자랑하는 모습을 담은 SNS에서 출발했다. 이를 본 일반 Z세대 젊은이들이 SNS를 통해 “너희들의 사치가 우리들의 고통!”이라는 메시지를 공유하면서 시위는 시작됐다. 최상류층의 호사스런 삶이 일반 젊은이들을 자극한 것이다. 네팔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450달러(약 200만원)에 불과한 세계 150위권의 가난한 나라다. SNS에서는 Z세대들의 분노가 끓어 넘쳤고, 네팔 정부는 지난 9월 8일 이를 ‘가짜 뉴스’라고 주장하면서 SNS 플랫폼 26개에 대한 접속을 차단했다. 이 조치로 Z세대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격렬한 시위로 인해 불과 일주일도 안 돼 전직 총리의 부인 등 70여 명이 사망했고, 경찰서 등 주요 관공서가 불탔으며 장관이 길거리에서 구타당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결국 카드가 프라사드 샤르마 올리 총리는 9월 9일 사임을 발표하고 관저를 떠났다. 현재 그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네팔, 특권층 SNS로 명품 자랑이 발단 이후 네팔은 Z세대가 지지하는 수실라 카르키 전 대법원장을 임시 총리로 새 내각을 구성했다. AP통신 등은 “네팔의 시위는 기존의 정당이나 노조 등 특정 세력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희망을 잃은 Z세대 젊은이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일어난 점에서 독특하다. 젊은이들이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지난달 4일 인도네시아에서 ‘저항할 때’라고 쓰인 현수막을 들고 시위를 벌이는 Z세대. [AFP=연합뉴스] 지난 8월 발생한 인도네시아의 반정부 시위도 Z세대가 주력이었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하원의원 580명에게 주택수당으로 월 5000만 루피아(약 430만원)씩 지급했다는 뒤늦은 언론보도가 도화선이 됐다. 이는 수도인 자카르타의 월 최저임금인 540만 루피아의 10배에 육박하는 금액이었다. 특히 최근 인도네시아에서는 세금 인상과 높은 실업률로 인해 많은 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였다. 지난 10년 동안 5%대의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제조업 분야에서의 일자리 감소로 올 상반기 해고된 노동자만 4만2000명에 달했다. 이는 지난해보다 32%나 급증한 수치다. 이런 상황에서 국회의원들에 대한 과도한 특혜는 대학생 등 젊은이들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이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였고, 경찰 장갑차에 깔려 시위대가 숨지는 등 인명 피해까지 발생했다. 10여 명이 숨지고 20명이 실종됐다. 시위 사태가 확산되자 결국 인도네시아 정부와 의회는 의원 주택수당 등 다양한 특혜를 폐지하고 재무장관 등 내각 일부를 교체했다. 자카르타포스트 등 현지 언론들은 “시위 사태는 진정됐지만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있고 기득권층의 부정부패 문제가 언제 다시 불거질지 모르는 상황”이라며 “정부가 민심을 거슬리지 않도록 세심한 정책을 펼쳐야 할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주변국인 동티모르와 필리핀에서도 최근 젊은층이 주도한 시위로 인해 정국이 요동쳤다. 지난달 동남아 최빈국인 동티모르에서는 국회의원들에게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지급하기로 한 문제를 둘러싸고 대학생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동티모르 의회가 의원 65명의 의정활동을 돕기 위해 도요타의 신차 제공 목적의 예산 420만 달러(약 58억원)를 편성했다가 철퇴를 맞은 것이다. 동티모르는 전체 인구 141만 명 중 40%가 빈곤층으로 빈부 격차와 영양실조, 실업률 등이 심각한 수준이다. 대학생 2000여 명은 지난달 15일부터 사흘간 수도 딜리의 관공서를 습격하고 불을 질렀다. 결국 동티모르 의회는 신차 지급을 백지화하고 국회의원 종신 연금도 폐지키로 했다. 지난달 필리핀에서도 정치권의 비리로 인해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태풍 등 자연재해 대비를 위한 홍수 예방 사업에서 비리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사업에는 지난 3년간 5450억 필리핀페소(약 13조2000억원)가 투입됐는데, 부실한 사업 운영에 따른 손실이 최대 1185억 필리핀페소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특히 고위 정치인들이 이 사업과 관련해 뇌물을 받았다는 주장이 잇따라 나왔다. 결국 상·하원 의장 모두 교체됐다. 지난 18일 마다가스카르 Z세대가 해적기가 새겨진 옷을 입고 시위를 벌이는 장면. [AP=연합뉴스] Z세대 시위는 아시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사회 시스템이 덜 정비된 빈곤국이 많은 아프리카와 남미 대륙에서도 Z세대 시위가 활발히 벌어졌다. 특히 아프리카의 섬나라 마다가스카르는 최근 발생한 Z세대 시위로 네팔처럼 정권이 바뀌었다. 마다가스카르의 시위 사태는 정부의 잦은 단전·단수가 원인이었다. 이에 항의한 시의원 2명이 지난달 19일 체포됐고, 이에 항의하는 젊은이들이 같은 달 25일 시위에 나섰다. 청년단체인 ‘Z세대 마다(Gen Z Mada)’가 온라인으로 시위를 주도했다. 유엔은 당시 20여 명이 숨지고 100명 이상이 다쳤다고 밝혔으나, 안드리 라조엘리나 대통령은 “확인된 사망자는 12명으로 모두 약탈자였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으로 인해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대통령은 물러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상황이 격화되자 라조엘리나 대통령은 내각을 총 사퇴시키고 새 총리를 임명하면서 사태 해결을 꾀했지만 시위는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지난 11일 육군 엘리트 부대인 캡사트 부대가 시위대를 호위하고 합류하면서 정권 퇴진을 예고했다. 부패척결·예산투명성·치안개선 등 요구 위기에 몰린 라조엘리나 대통령은 13일 국외로 탈출했고 현재 아랍에미리트(UAE)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마다가스카르 의회는 14일 라조엘리나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의결하고, 캡사트 부대 지휘관이었던 마이클 랜드리아니리나 대령이 17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로이터통신은 “마다가스카르는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줄곧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면서 “특히 빈곤층이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하고 있는 최빈국으로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고 전했다. 마다가스카르 사태에 놀란 모로코 정부는 젊은이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에 적극 나서겠다고 밝혔다. 지난 14일 나디아 페타 알라위 재무장관은 “최대한 젊은 세대에게 기회를 제공하는데 국가 예산을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로이터통신은 “각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Z세대 시위가 모로코의 정책에 큰 변화를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 모로코에서도 지난달 27일부터 Z세대 청년들의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시위를 주도하는 단체는 ‘Z세대 212’로 212는 모로코의 국가 전화번호다. 이들은 교육·의료 등 정부의 기본 서비스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또 정부가 2030 월드컵 공동 개최와 오는 12월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유치를 위해 예산을 무절제하게 쓰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남미 대륙에서도 Z세대 시위대의 함성이 울려 퍼지고 있다. 파라과이의 수도 아순시온 도심에서는 지난달 28일 청년들의 거리 행진이 있었다. 이들의 구호는 “우리가 99.9%다”였다. 자신들의 요구가 국민 대다수의 요구라는 의미였다. 시위대의 요구 사항은 정치권의 부정부패 척결과 국가 예산의 투명성 확보 그리고 치안 상황 개선 등이었다. 뉴욕타임스 등은 “최근 발생하고 있는 Z세대 시위는 경제적 불평등과 기득권의 부패, 높은 실업률 등에 대한 젊은이들의 항거”라면서 “특히 정치가 신뢰를 잃은 사회에서 SNS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 Z세대 시위 상징 된 ‘해적기’…일본 애니 ‘원피스’에서 유래 「 일본 만화 ‘원피스’에 나오는 해적기가 세계 곳곳의 시위 현장에 등장해 주목을 받고 있다. 해골이 밀짚모자를 쓴 그림을 담은 깃발이다. 이 해적기가 처음 관심을 끌게 된 지난 8월 17일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 시위 때였다. 정부는 이날 국기 게양을 독려했지만 곳곳에선 이 해적기가 내걸렸다. 정부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마다가스카르 시위대는 원본 해적기의 밀짚모자 대신 자신들의 전통 모자를 씌운 그림의 깃발을 선보였다. 만화 원피스의 주인공 루피가 이끄는 ‘밀짚모자 해적단’은 정의를 위해 싸우는 집단이다. Z세대 시위대들이 이 깃발을 사용하는 것도 만화 내용과 자신들의 상황이 유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만화이기에 누구나 쉽게 깃발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1997년 연재가 시작된 이래 원피스는 전 세계 40개 언어로 번역돼 5억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다. 단일 작가 작품으로 가장 많이 팔린 만화다. 영화나 게임 등으로도 출시됐다. 」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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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럭키금성 앞으로 크게 발전할 것…대우는 미지수"
━ 정주영 110주년…미공개 회의록으로 본 ‘위기극복 리더십’ 〈5·끝〉 1990년대 말 과잉투자와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시대가 끝났다. 한 시대를 호령했던 기업들이 사라졌다. 기업들은 생존을 건 사투를 벌였고 그중 일부는 질주했다. 세계적 기업들도 나왔다. 세계경제 순위에서 대한민국이 베네수엘라를 제쳤다는 게 뉴스이던 1980년대 초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시선은 어디까지 이르렀을까. 정주영 회장이 자신의 고희 및 연설문 출판기념회에서 이병철 당시 삼성 회장과 건배하고 있다. [중앙포토] “앞으로는 삼성, 그 다음 럭키금성(현 LG)이 가장 크게 발전할 거로 보인다. 개발 투자에 제일 적극적이다. 대우는 눈에 띄는 개발 투자가 없으니 미지수인데, 삼성하고 금성은 고도 기술 산업으로 발전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다. 우리는 개발 투자에 너무 소홀한 감이 있다.” “삼성처럼 전면적인 인사이동도 고려 중이다. 삼성은 사람보다 조직의 힘으로 움직인다. 사장이 누가 되든 조직이 굴러가고, 새로운 사장이 와도 일이 돌아가는데, 우리는 상무, 이사급도 거의 고정이라 유연성이 없다. 이것이 배움의 기회를 막고 있다.” 해외 산업시찰 중인 정 회장(왼쪽)과 구자경 럭키금성 회장(오른쪽), 가운데는 박성상 수출입은행장. [중앙포토] 1984년 11월 26일 사장단 회의 발언이다. 당시 현대는 재계 부동의 1위였다. 2001년 정 회장 작고 이후 현대가 분할되고 삼성이 반도체 투자에 성공하기 전이었다. 정 회장은 경쟁 기업에서 배울 건 배우자는 취지였지만 삼성·LG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드러내곤 했다. 정 회장은 이런 말도 했다. “박영욱 사장, 지금 수치를 보면 우리하고 대우만 수출 증가율이 침체되어 있잖아? 럭키금성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수출이 10억 달러도 안 됐는데 올해는 12억~13억 달러야. 미국에 컬러TV 공장 내고, 내수제품은 접었는데, 참 잘했다. 이제는 그룹 매출에서도 4대 그룹에 들어갔다.” 이때만이 아니었다. “삼성과 럭키금성이 가장 바람직한 성장이다. 전자제품 중심이다. 미국에 공장을 세워 대부분을 현지에서 조립하는데, 매우 바람직하다.”(1985년 1월 14일) 전두환 정권에 “후진국형 경제” 공개 비판 역대 전경련 회장 부조.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병철(삼성), 구자경(LG), 정주영(현대), 최종현(SK), 김용완(경방), 이정림(대한유화), 손길승(SK), 김각중(경방). [중앙포토] 선경(현 SK)도 눈여겨봤다. 5개월 뒤 사장단 회의에서 “럭키금성이 이제 종합상사 4위가 됐다. 그 다음 성장할 곳은 선경”이라고 했다. 선경은 1980년 석유공사를 인수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1984년 수출액이 쌍용(10억8600만 달러)·국제상사(7억9200만 달러)에 밀려 10위권에 겨우 턱걸이하던 때였다. 하지만, 정 회장은 “쌍용은 타사 제품 위주로 취급하고 자사 제품이 없어 약세로 전환될 것”이라며 “현대·삼성·대우·럭키금성 앞으로 선경 순으로 우리나라 수출 실적이 이어질 거다. 이 순서가 향후 4~5년간 유지될 거라고 본다”고 말했다. 정 회장의 예견대로 됐다. 당시 재계 3위인 대우에 대해선 그러나 평가가 높지 않았다. 1980년 전두환 정부가 추진한 산업합리화 정책으로 발전설비 분야를 대우에 양보하는 과정에서도 그런 시각을 드러냈다. 정 회장은 “정부 관계자가 ‘김우중 대우 회장은 순순히 찬성하는데, 왜 반대하냐’고 해서, 김 회장이 사업을 해온 과정과 우리는 다르다. 현대는 땅을 사서, 길을 닦고, 말뚝을 박아가며 밤낮으로 애를 써 공장을 짓고 운영을 해왔다. 반면 김 회장은 지금까지 자기가 직접 공장을 지은 일이 없다. 서울역 앞 건물도 정부가 하던 것을 산업은행을 통해 수의계약으로 따낸 거다. 자동차회사도 원래 신진자동차 김창원씨가 하던 것을 대우가 정부를 끼고 수의계약으로 넘겨받은 거다. 대우는 어느 하나 자기 손으로 시작한 게 없다고 말했다”(1987년 1월 12일 사우지 인터뷰)고 회고했다. 1984년엔 “대우가 수출을 줄인건 실적 위주의 정책 변화라고 보면 된다. 손해나는 일은 안 하겠다는 뜻이다. 우리는 내년에 수입대체 산업에 집중 투자해야 한다. 정부의 국제수지 개선에 협조하려면 수입대체 산업과 수출산업, 두쪽 다 투자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정 회장은 공개적인 발언을 주저하지 않았다. 지금의 잣대로도 상당히 솔직한 비판을, 전두환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자주 했다. 정부가 기업이나 경제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걸 ‘후진국형 경제’라고 칭하며 민간주도 경제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으로서 소명으로 여긴 듯하다. 그는 1977년부터 10년 간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1982년 6월 14일 경제기획원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에선 “몇 년 전 세계은행의 한 전문가가 ‘한국은 각종 정부위원회에 관민이 함께 참여하는데, 정책 수립에 민간기업 의견이 잘 반영되는 모범 사례’라며 나의 견해를 물어 꽤 당혹스러웠다”며 “우리나라에는 부처별로 수많은 위원회가 있고, 대부분 정부 관계자와 일부 기업, 다수의 어용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다. 몇 가지 형식적인 질의응답과 짧은 간담회 후 대부분 원안대로 통과되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기업의 일차적 사명은 고용·세원 확대” 정 회장이 주재한 현대 그룹 사장단 회의록 원본. 김정훈 기자 1985년 6월 14일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의 중앙위원 특강에서는 “선거에서 국민의 표를 얻기 위해 사회 윤리가 지나치게 고조되면서 경제는 자연스럽게 위축된다. 기업 활동을 죄악시하게 되고 이는 기업의 의욕을 꺾어 결국 경제 침체로 이어진다. 국민의 목표는 생활의 번영과 사회의 안정이지, 정치 활성화가 삶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반대기업’ 정서를 업고 30대 기업 여신 동결 등을 추진하거나 기업인들에 대한 수사를 벌이는 데 대해 비판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부도를 냈다는 이유만으로 형사 처벌을 하는 것은 선진국엔 없는 일”이라고 했다. 1983년 11월 11일 언론사 특강에선 “국회가 기업의 채무를 공개하자는데, 단순히 ‘부채가 얼마다’가 아니라, 그 부채가 얼마나 국민 경제에 기여하고 있는지, 고용을 얼마나 창출하고 있는지 같은 통계를 함께 공개해야 한다. 그 빚이 무엇을 위해 쓰였는지, 어떤 결과를 만들어냈는지가 중요하다. 해외 은행들은 그런 걸 더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기업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여는 고용과 국부 증가라고 봤다. 그는 “기업의 이윤을 사회 환원해야 하지 않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런 시각엔 별로 공감하지 않는다. 기업인의 1차적 사명은 기업을 성장시키고 고용을 늘리며, 국가의 세원을 확대하는 것이다. 기업을 계속 성장시켜 기술 발전과 고용 증대, 세원 확대를 지속해나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 기여이자 국가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한다.” ■ 정주영은 ‘현대’ 한국 기반 일군 고마운 사람 「 김명호 곰팡이가 잔뜩 낀 누런 표지 속 원고지에는 수기(手記)로 된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표지 위에는 ‘1984년 3월 23일 기획원 주체 경제 각 부처 연수 교육 특강’, 1982년 4월 19일 고졸·전문대졸 신입사원 특강, ‘1983년 1월 10일 종합상사 영업회의’, ‘1984년 7월 2일 사장단 회의’ 같은 라벨이 붙여져 있다. 지금까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정주영 비록(秘錄)’이다. 20일 찾아간 경기 파주시 김명호 교수의 연구실은 이런 자료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김 교수는 “A4 용지로 4200쪽가량이다. 책 12권 분량”이라며 “중요한 내용을 추려 다음 달 25일 정 회장의 탄신 110주년에 맞춰 출간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회장과는 어떤 인연인가. “1990년대 정 회장이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작업복 차림으로 서 있는 사진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때마침 사진을 통해 인물의 생애를 반추하는 특별한 책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는데,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사진을 본 순간 ‘이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왔다. 그래서 정 회장 측에 구상을 말했고 미공개 사진을 비롯해 다양한 자료를 접할 수 있게 됐다. 그 자료들을 책으로 냈고, 정 회장도 무척 흡족해 하셔서 1996년 중국, 1997년 한국에서 가족들과 함께 출판기념회도 크게 열었다.” 자료가 방대하다. “어떻게 이런 걸 다 기록해 보관했는지 참 대단하다. 워낙 방대해 지난해 봄부터 정리하는 데만 1년 6개월이 걸렸다.” 어떻게 확보하게 됐나. “2001년 3월 21일 정 회장이 별세하셨고, 24일 빈소에 갔다. 마침 2000년 남북회담의 주역 송호경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 방문하는 날이라서 부산했다. 빈소 옆 방에 작은 철제 캐비닛이 있었는데, 안에 버릴 짐들을 가져다 놨더라. 그걸 살펴보니 이게 있었다. 소장해야 할 것들이더라. 그래서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에게 가서 ‘중요한 자료 같다’고 했더니, ‘그럼 잘 갖고 있어라’고 하시더라.” 정주영 회장은 어떤 사람인가. “한국이 고마워해야 하는 사람. 폐허가 된 조국에 사명처럼 ‘현대’ 한국의 기반을 일궜다. 아니, 설명이 무의미하다. 그저, 떠올려보라. 정주영이 없는 한국을.” 」 유성운·신수민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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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있으면 고소득, 푸른 작업복 입는 2030…"쇠 뚫어 취업난 뚫어요"
━ AI도 두렵지 않다, 요즘 주목받는 ‘네오블루칼라’ 한국폴리텍대 울산캠퍼스에서 한 학생이 용접 실습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윙~. 쉭~. 여기서 쇠를 자르고, 저 너머에선 쇠를 붙였다. 쇠에도 냄새가 있다. 그 쇠 냄새가 지난 2일 울산시 한국폴리텍대 에너지산업설비과 실습실에 퍼졌다. 10월의 선선함에도 뜨거움이 가득했다. 쇠, 그러니까 철강은 제조업에 필요한 밑재료다. 조선과 자동차·반도체는 ‘철공예’로 부른다. 손기술이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삼성이 베트남을 반도체 해외 생산기지로 낙점할 때 기준 중 하나가 ‘젓가락 문화’였다는 일화가 있다. 손기술 때문이다. 실습실에서 쇠 절단 작업 중이던 박모(24)씨는 “정교한 손기술로 취업난을 뚫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쇠를 뚫고 있다”며 땀을 닦았다. 경기도의 한 마이스터고에 다니는 이모(18)군도 “일자리를 위해선 기술 먼저, 대학은 나중에”라고 말했다. “정교한 기술 필요한 곳, 블루칼라 더 필요”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하려는 2030세대가 실습에 집중하고 있다. [사진 진윤근] 20대 취업난은 심각하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지난 8월 20대 고용률은 60.5%. 1년 전보다 1.2%포인트 떨어지면서 12개월 연속 반등하지 못하고 있다. 20대 실업률은 5%로 1%포인트 올라 2022년(5.4%) 이후 3년 만에 최고치다. 구직 활동을 하지 않은 ‘그냥 쉼’ 20대도 50만 명을 넘었다. 이런 취업난 속 김씨와 이군처럼 푸른 작업복을 입은 20대 블루칼라가 늘고 있다. 이들은 고숙련 기술로 무장하고 고소득을 향해 뛰고 있다. 3D(Dirty·Dangerous·Difficult)를 도맡으며 저임금을 받는 기존의 블루칼라 이미지와 확연히 다르다. 새로운 블루칼라, 이른바 ‘네오블루칼라(Neo-Blue Collar)’다. 이들은 “땀 흘린 만큼 보상이 따른다”며 만족도도 높다. 실제로 진학사 캐치가 Z세대(1990년대 후반 이후 출생)에게 물어봤다. ‘연봉 7000만원 교대근무 블루칼라’와 ‘연봉 3000만원 야근 없는 화이트칼라’ 중 58%가 블루칼라를 택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하지만 인공지능(AI) 시대, AI 학자인 제리 카플란이 『인간은 필요 없다』 에서 지적했듯, 블루칼라는 화이트칼라와 동반 추락할까. 이종선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화이트칼라로 은퇴를 앞둔 중장년층이 심심치 않게 하는 말이 ‘기술이 최고’다. 블루칼라는 정교한 기술이 요구되는 곳에서 수요가 더 생기면서 위상이 오히려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마침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1일 열린 ‘제조 AI 전환(MAX) 얼라이언스 전략회의’에서 2030년까지 제조기업의 AI 도입률을 40%로 끌어올리기 위해 ‘AI 팩토리(공장)’ 선도사업장을 500개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앞서 HD현대미포는 “AI 로봇을 투입해 용접 검사와 조립 시간을 12.5% 단축했다”고 밝혔고, GS칼텍스는 “AI로 정유 공정 데이터를 실시간 분석해 비용을 20% 절감했다”고 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이런 제조업 AI의 역할은 데이터 분석과 평가에 집중된다. 관련기사 작년 취업률 73%…‘명장’ 꿈꾸는 청소년들 마이스터고 몰린다 “조선 용접 자동화 85%, 나머지 사람 몫…세세한 손기술 들어가야 좋은 선박 건조” 고윤열 울산과학대 기계공학부 교수는 “쇠를 잘라 붙이고(용접), 그 쇠로 정유관을 만들며(제관), 그 정유관을 설치(배관)하는 일은 결국 ‘사람’이 한다”며 “AI가 컴퓨터 속 데이터는 무한대로 학습할 수 있어도, 컴퓨터 밖 세상은 배울 길이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현장과 손기술, 이른바 ‘AI 시대의 역설’이다. 고 교수는 “20대 중심의 네오블루칼라는 오히려 AI를 이용하면서 고도로 진화하는 중”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한국폴리텍대에서는 챗GPT 등을 이용해 쇠를 절단하고 배관 설계도를 그린다. 명장의 증가는 우리 사회에서 기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자동화 흐름에도 얼마나 필요한지 일깨우는 척도가 될 수 있다. 명장은 고도의 숙련된 기술자에게 부여하는 칭호다. 1986년부터 올해까지 명장은 719명. 이중 공예·서비스 직종을 제외한 제조업 분야 명장은 400명 남짓이다. 22개 분야 37개 직종으로 시작했다가 2018년부터는 37개 분야 97개 직종으로 선정 범위가 넓어졌다. 이우영 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은 “명장 선정 분야가 전통 산업·공학 중심에서 금형·차량·소재 등으로 세분됐듯, 제조업은 AI 시대에도 도태되지 않고, 오히려 분야를 확장해 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배사들이 한 구축 주택 현장에서 작업하고 있다. [중앙포토] ‘쇠’에만 네오블루칼라가 뛰어드는 건 아니다. 서울 은평구의 한 기술학원에 다니는 윤형준(27)씨는 “무작정 인테리어업체를 찾아가 도배와 타일 작업을 어깨너머로 배우다가 안 되겠다 싶어 전문적으로 왔다”며 “타일 기능사 자격을 따면 일당도 오르고 평생 일할 밑천이 될 것”이라고 했다. 현재 윤씨의 일당은 15만원 정도. 자격증을 따면 두 배 가까이 늘어난다. 기능장 취득 30대 4년새 1818명→2562명 그래픽=남미가 기자 윤씨처럼 기술 자격증을 따는 2030 세대가 늘고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이 지난 7월 발표한 국가기술자격통계연보에 따르면 ‘기능장’ 자격을 취득한 20대는 2020년 269명에서 2024년 432명으로, 30대는 1818명에서 2562명으로 각각 1.5배가량 증가했다. 명장이 말 그대로 명예로운 ‘칭호’인 것과 달리 기능장은 고난도 기술 ‘자격증’이다. 국가기술자격 체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기능사·산업기사·기사·기능장·기술사 순으로 높은 기술력을 요구한다. 3년 전 위험물 기능장을 취득한 이영재(31)씨는 현재 화장품 제조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씨는 “위험물 취급과 관리에 대한 안전성을 평가하는 자격증이기 때문에 화장품은 물론 고무·금·염료 등 다양한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다”며 “우리 공장에서 일부 제조는 자동화했지만, 위험물 취급은 기계보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더 높다”고 말했다. 이호준(29)씨는 지난해 한국폴리텍대를 졸업하고 가스 공급업체에 취업했다. 그는 ABS(미국선급협회) 국제 선급 용접 등 6개의 국가기술자격증을 보유했다. 이씨는 “현장에서 기술을 활용할수록 나 자신도 발전한다는 성취감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그래픽=남미가 기자 고숙련을 통한 자격증은 고소득과 직결된다. 화이트칼라는 수요보다 공급이 많다. 반면 블루칼라는 수요가 공급을 넘어선다. 현장에선 “고숙련자 일당은 부르는 게 값”이라는 말도 나온다. 본지가 지난해 일당을 살펴봤더니 특고압 케이블 작업공은 42만1236원을 받았다. 고층 임시 가설물을 설치하는 비계공(28만1721원)과 용접공(26만2551원), 미장공(25만6225원), 도장공(24만9977원) 등도 임금이 높은 직종에 속했다. ‘AI 시대의 네오블루칼라’는 우리만의 현상이 아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Z세대를 ‘공구 벨트(tool belt) 세대’로 정의하며 이들이 냉난방·배관·전기 등 자동화가 어려운 분야로 몰린다고 보도했다. 배관공만 해도 연평균 9만348달러(약 1억2800만원)를 버는 ‘고소득’이 이유 중 하나라는 분석이다. 최성용 서울여대 경영학과 명예교수는 “취업난 속 만족감과 자기계발 가능성이 높은 네오블루칼라에 대한 젊은 세대의 관심이 높아졌다”며 “또 화이트칼라가 은퇴하는 연령에도 일을 계속할 수 있어 선호도는 계속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네오블루칼라의 시대’로 단정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블루칼라의 수요가 공급을 넘어선 이유도 그간의 저임금, 부정적 인식으로 인한 인력 이탈 때문. 11년 차 배관 기술자인 정승훈(39)씨의 “이제 막 일을 배우려는 신입은 많아도 10년 이상 일한 30~40대 숙련공은 드물다”는 발언에는 이런 현장의 어려움도 묻어난다. 30년 넘게 특고압 케이블 포설 작업을 했다는 김형수(59)씨는 “젊은 친구들이 자격증은 따도, 막상 현장에 오면 며칠 못 가 그만두는 게 부지기수”라며 “일감은 계속 밀려드는데 동료들은 은퇴가 머지않아 언제까지 일을 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도 했다. 이종선 교수는 “블루칼라 종사자의 80% 이상이 여전히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며 “대다수가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정규직의 절반도 안 되는 월급을 받고, 업황에 따라 일감이 꾸준히 보장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산재 신청도 어려운데 이를 보완할 정부의 제도 마련과 함께 기술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적 인식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제언했다. 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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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취업률 73%…'명장' 꿈꾸는 청소년들 마이스터고 몰린다
━ AI도 두렵지 않다, 요즘 주목받는 ‘네오블루칼라’ 미래의 기술 명장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마이스터고에 눈길을 되돌리고 있다. 마이스터고는 2010년 도입된 산업 수요 맞춤형 고등학교다. 학교와 기업이 협약을 맺고, 현장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기술 인력을 양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2013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마이스터고의 초기 취업률은 90.6%에 달했다. 취업자의 90%가 정규직이라는 점에서 고등기술교육 모델의 표본으로 자리잡았다. 이렇듯 ‘취업 보증수표’로 통하며 한때 평균 입학 경쟁률이 4대 1을 웃돌 만큼 치열했지만 2010년대 후반 기업들이 고졸 채용 규모를 축소하는 등 부침을 겪으며 인기가 식었다. 그러나 장기 경기 침체의 여파로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 문턱을 넘지 못하는 청년이 늘면서 마이스터고가 재조명 받는 분위기다. 지난해 전국 마이스터고 51곳의 졸업생 취업률은 72.6%를 기록했다. 이는 전체 직업계고 졸업생 취업률(26.3%)을 크게 웃도는 것은 물론 전체 대졸 취업률(2023년 기준 70.3%)과 맞먹는 수치다. 입학률도 덩달아 올랐다. 서울시교육청에 따르면 2025학년도 서울 관내 마이스터고는 모집정원 558명 중 824명이 지원해, 이중 565명이 최종합격했다. 모집 정원 대비 충원율이 101.25%를 기록하며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충원율 100%를 넘어섰다. 관련기사 기술 있으면 고소득, 푸른 작업복 입는 2030…“쇠 뚫어 취업난 뚫어요” “조선 용접 자동화 85%, 나머지 사람 몫…세세한 손기술 들어가야 좋은 선박 건조” 중학교 1학년, 3학년 두 자녀를 둔 강혜성(50)씨는 “애매한 성적으로 인문계를 가서 대학에 진학한다고 해도 취업이 어려운 게 현실”이라며 “아이가 AI에 관심이 많은데 이왕이면 마이스터고에 입학해 진로를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평촌에서 고교 입시 컨설턴트를 하는 김주현(42)씨는 “대기업과 공기업 취업률이 높은 상위권 마이스터고의 평균 경쟁률은 3대 1에 달한다”며 “이들 학교에 입학하려면 중학교 내신 성적이 최소 상위 30%에는 들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런 수요에 힘 입어 첫 해 전국 21개로 출발한 마이스터고는 지난해 54개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올해는 대구·경북·충남지역 3개교가 새로 추가됐다. 분야도 더욱 세분화됐다. 기계·매카트로닉스, 자동차, 항공, 조선 등 정통 제조업 분야로 시작해 반도체장비, 해양플랜트, 로봇, 소프트웨어 등으로 다변화됐다. 경기도교육청의 박기철 진로직업교육과 장학관은 “마이스터고는 기업과 연계한 실무 교육을 펼쳐 졸업 후 취업은 물론 현장에서의 빠른 적응을 돕는데 강점이 있다”며 “내달 말 내년도 입학 전형이 시작되는데 더 많은 학생이 지원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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